갈라디아서 37강 I. 사랑의 호소]Ⓑ 4:14-16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3-04-29 18:26
조회
108

※ 연재되는 필자의 주석책 「갈라디아서․에베소서」


그래서 바울은 【14】[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라고 지난날의 아름다운 일을 회상하고 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는 א*, A, B, C2vid, D*, G를 따른 것이고; D, E, K, L, P 사본 등에는 [너희를](휴몬, ὑμών) 대신에 “나의”(무 톤, μου τὸν)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시험이 내 육체에 있으나”의 뜻으로 쓰고 있다.➊ 그렇지만 사본들의 가치로 미루어 전자 곧 [너희를](휴몬, ὑμών)을 취해야 할 것이다.

[시험하는 것]은 페이라스몬(πειρασμόν)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상시키거나 복을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하시는 시련이나 연단(창 22:1, 출 15:25, 신 8:2, 13:3, 38:8, 대하 32:31, 요 6:6)이라는 의미와, 마귀가 인간 특히 성도를 멸망시킬 목적으로 하는 유혹(마 4:1-11, 약 1:13)이라는 의미가 있다. 물론, 여기서는 후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외에 ‘고난 또는 환난’(눅 22:28)이라는 뜻도 있다.

마귀는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혹은 환난과 핍박으로, 혹은 감언이설로, 혹은 재물이나 명예나 권세 등의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으로, 혹은 기사와 이적으로, 혹은 그럴 듯한 합리적인 논리, 혹은 질병 등으로 시험한다. 아마 하나님이 막지 않으신다면, 마귀가 인간을 멸망시키거나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사용하지 못할 수단과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 궁극적 목적은 단 하나, 즉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특이한 사실은, 때로 하나님께서는 마귀에게 인간을 시험하도록 허용하신다는 것이다(욥 1:12. 비교: 막 1:12).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신앙을 시험하시곤 하신다.

어느 경우의 시험이든 이기는 자, 또는 합격하는 자에게는 향상과 보상이 있고, 지는 자에게는 죄와 멸망이 있는 것이다. 끝까지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이다(계 2:11).
갈라디아 교인들을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라고 한 바울의 말을 가리켜, 칼빈(J. Calvin)은 “바울의 외양이 초라했다는 것을 뜻한다.”라고 하지만, 앞서 밝힌 대로 바울의 몸에 생긴 병을 뜻하는 것이다.

스탐(R. T. Stamm)은 “바울의 병명을 알 수는 없지만 빈약한 자료가 말해 주는 모든 것은 바울의 병고가 만성적이고, 지극히 고통스러우며, 불쾌감을 일으키는 굴욕적인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거나 열렬하게 능동적인 생활을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쨌든, 바울의 병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전하던 그를 업신여기고 배척할 만한 병이었음에 틀림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였다.

[업신여기지도]는 엑쑤테네사테(ἐξουθενήσατε)로서 신약 성경에서는 누가와 바울에게서만 나타나며, 단순하게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경멸한다는 뜻이다(E. Huxtable, 黑崎幸吉).

[버리지도]는 ἐκ와 πτύω의 합성어인 엑쎄프튀사테(ἐξεπτύσατε)로서 침을 뱉어 낸다는 뜻이며, 업신여기고 배척하는 극적인 묘사이다.➋ 또한, 이 말은 싫어한다는 뜻도 있다(黑崎幸吉).

고대의 소아시아인들은 병자나 귀신들린 자에게 침을 뱉음으로써 그 병과 귀신으로부터 보호된다고 믿었다(R. T. Stamm, 이상근).

결국 바울의 취지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의 병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그를 경멸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갈라디아 교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뜨겁게 영접하였다. 바울은 그 당시의 감격을 되새기면서,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1:8의 주석을 보라.)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전에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마치 천사나 그리스도께서 직접 오셔서 전하는 것처럼 그를 환대하였다(M. Henry, R. C. H. Lenski).

여기서 우리는 말씀을 듣는 올바른 자세를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라고 칭찬하였다.

사람의 입을 통해 들려 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이야말로 말씀의 사역자에 대한 최고의 대접이며, 또한 그렇게 들을 때에 그 말씀이 듣는 자 속에서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에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참조: 히 4:2).

바울은 이전에 그토록 자기를 환대했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지금은 율법주의에 빠져들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호소하고 있다. 【15】[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복]이란 마카리스모스(μακαρισμὸς)로서, 이곳 외에 로마서 4:6, 9에만 나타나며, 그 뜻은 “복의 선언이다”(Vincent).➌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에 대해, 렌스키(R. C. H. Lenski)는 “내 입으로 전한 복음을 용납한 너희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무슨 복을 받겠는가?”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보아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여 모든 속박에서 자유를 누렸던 때의 복이 어찌 되었으며, 그때의 기쁨과 감사의 외침이 다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하는 탄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당시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에게 얼마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바울의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고 한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눈이라도 빼어 준다’는 말은 확실히 매우 귀중한 어떤 것을 희생한다는 격언이기도 하다(R. C. H. Lenski). 바울은 자신의 복음을 듣던 사람들이 감사하게 생각하여 자신을 위안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장 귀중한 눈이라도 바쳤으리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이런 말을 썼을 것이다(C. R. Erdman). 실제로, 그때의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무릅쓸 정도로 바울을 열렬하게 사랑하였다. 그 만큼 그들은 믿음에 부유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바울과 그의 복음을 그토록 환영하고 감사하였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지금은 마음이 변해서 바울과 그의 복음을 비방하는 율법주의자들을 추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변화무상한 마음이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4:11의 주석을 보라).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성령을 좇아 행해야만 하는 것이다(5:16).

지금까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과거를 상기시켜 온 바울은, 어조를 바꾸어 그들에게 거짓 교사들의 의도를 일깨워 주고 있다. 【16】[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런즉]은 호스테(ὥστε)로서 ‘그러므로’라고 번역해야 한다. 즉,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을 사랑하였으므로, 바울이 그들의 원수처럼 된 이유란 참된 말 곧 복음의 진리를 전한 것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절규이다”(S. J. Mikolaski). 다시 말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리가 미움을 일으키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원수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은 너무도 흔한 일이다”(M. Luther). 그 당시뿐만 아니라, 언제 어느 곳에서나 복음의 사역자들은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려고 하기 때문에 적을 만드는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복음의 사역자들은 저희에게 오직 진리를 말하였기 때문에 어떤 적의를 산 것이라고 여겨질 때, 마음의 평온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M. 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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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참조: 이상근, E. Huxtable, AV.
2) R. T. Stamm, W. Hendriksen, 黑崎幸吉, 이상근.
3)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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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191-196.

필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6권/ 기타 다수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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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29 18:27

    필자의 주석책에는 각주로 되었고, 주석되는 성경의 구절과 용어는 고딕으로 구분했는데, 이 인텨넷 화면에는
    그대로 표시되지 않으므로 각주를 미주로 바꿨고, 고딕을 부호 [ ]로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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