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활동
구한말 선교의 시작과 교육사업 (1985-1910)

sub05_01_img감리교회의 처음 선교사인 아펜젤러, 스크랜튼 부부, 스크랜튼 대부인은 고종께서 윤허하신 대로 미감리교회의 파송을 받아 교육사업과 의료선교를 한국에서 시작하였다.사범학교와 일반대학 및 드류신학교를 졸업한 젊은 선교사 아펜젤러는 의술을 배우려고 스크랜튼에게 찾아온 학생들을 위한 영어교육을 하면서 1886년 6월 서울에 “배재학당” (전 배재고 터 – 현 고덕동으로 이전)을 정식으로 시작하였다.

이 학교의 명칭은 고종께서 하사하셨고, 공적으로 인정받는 학교가 되었으며, 이 곳을 졸업한 이들은 정부의 공무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한편, 스크랜튼 대부인은 1885년 10월 정동에 선교부지를 마련하고 여학당과 사택을 마련하여 “한국의 부녀자들이 보다 좋은 한인이 되며, 한국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하여 훌륭한 한국”이 되게 하자는 목적으로 시작하였다.
또한 왕비께서 “이화학당”(현 이화여고 터)이란 이름을 지어 보내주었으며 점차 성장하기 시작했다.

1888년 내한한 올링거 목사와 존스 목사는 배재학당에서 가르치며 문서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인천 내리교회의 담임자로 시무하였다.

1893년 인천에서 아펜젤러에 의해 시작된 어린이 매일학교로 시작된 교육사업은 남녀 공학의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으로 성장하여 존스 부인이 그 학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서울과 인천 및 평양 지역을 순회하며 신학교육을 하던 신학회는 배재학당 내에 신학반을 두어 운영하였다.

특별히 감리교의 신앙 교육은 사회적 복음으로 확산되어 문명 부국에 대한 사상, 애국정신, 문화적 토착화에 힘쓰는 교회로써 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특별히 청년운동은 주일학교 운동과 엡웟청년회 운동을 통하여 전개되었는데, 주일학교에서는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기독교 교육을 가르쳤으며, 엡웟청년회는 1) 경건한 신앙훈련, 2)교육활동, 3)선교와 4)사회봉사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들을 지도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한 이들은 목회자들과 독립협회의 중심인물인 서재필, 윤치호 등이었다.

윤치호는 밴더빌트와 에모리에서 신학과 일반학문을 수학한 첫 신학도였다.

서재필은 1895년 귀국하여 아펜젤러 선교사의 집에 머물면서 순한글로 발행한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한국의 사정과 국민의 입장을 알리기 위해 영문판을 감리교 삼문출판사를 통해 발행하였다.

또한 1896년 7월 윤치호,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청나라 시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립하는 등 자주독립과 내정 개혁을 목적하는 민권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가르치면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배재학당에서 조직된 “협성회”는 충군애국의 정신을 함양하고, 동창간의 깊은 우애를 심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복음전도와 봉사하는 것을 다짐했다.

당시 임원은 양흥묵, 노병선, 이승만, 윤창렬, 이익채, 주시경 등 이었다. 그들의 토론제목은 주로 국한문 혼용에 대한 것, 신앙의 중요성, 노비제도의 폐지 등이었다.

이러한 그들을 협성회회보를 통해 주간지로 발행하였고, 1898년 4월9일 한국최초의 “매일신문”을 발행했다.
감리교회의 교육 및 청년활동은 이 시기에 세 방향으로 나타났다. 독립협회는 정치적 단체로, 협성회는 계몽단체로, 엡웟청년회는 선교단체였다. 특별히 만민공동회 운동을 통해 내정간섭에 대한 개혁과 자주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수구파의 모략으로 서재필이 추방되어 아펜젤러와 윤치호가 독립신문을 발행, 국민의식을 고양시켰다.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현 YMCA)가 미, 영, 일, 중, 한인들에 의해 창립, 국제적인 성격을 띤 창립총회를 열고 헐버트 선교사를 의장으로 뽑았다. 이사회는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운영부는 한국인들에 의해 관장하게 되었는데 이 때 지도자들이 윤치호, 이상재, 최병헌 등이었다.

이외에도 배화학당 및 평양 광성학교, 정의여학교, 영명학교, 인천 송도학원 등을 건립하여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일제하의 교육과 청년운동(1911-1945)

sub05_02_img포츠머드 강화조약(1905)으로 한국에서의 정치, 군사, 경제상의 특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한국의 주권을 박탈하고 식민통치를 준비하였다. 이에 고종은 감리교 선교사 헐버트를 통해 미 대통령에게 밀지를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는 복음 선교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와 역사의 연구자이며, 교육자로서 정치적 문제에 관심하고 사역하였으며 코리아 레포지토리와 코리아 리뷰를 편집하고, 연구논문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도미를 알아챈 일본은 그를 회유하였으나 그는 워싱톤으로 갔다.
일본은 이등박문을 급파하여 을사보호조약을 강제 조인하고 미국에 전문을 보냈다. 이로 인해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미 친일 정책으로 돌아섰다. 이 당시에도 학교 건립은 계속되어 개성에는 호스돈 여학교가 세워졌고, 1899년부터 존스가 주도하던 신학회가 1906년에는 성경학원으로, 그리고 1907년에는 남북감리교회가 연합하여 서울 서대문에 협성신학교(현 감신대)를 설립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국정이 어수선항 때에 105인 사건이 발생 했는데 이는 한국에서 가장 반일적인 세력이 기독교였음을 파악한 총독부의 조작극이었다. 이는 서울의 YMCA와 평양의 신민회 운동을 향한 반격이었다.

한국선교활동의 시작이 교육활동이었는데 일제는 학교교육에서 성경, 지리, 역사 등의 교육을 배제하였다.

1919년 항일비폭력 운동인 3.1절 운동에 기독교인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는데 그중에 감리교 대표는 9인이었다. 이는 감리교회의 신앙이 하나님 신앙과 민족의 십자가를 지고 독립정신으로 무장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회운동과 민족운동을 병행(윤치호, 이승만, 남궁억)하거나 목회적 본분을 다하는 이(현순, 손정도, 이필주, 신석구, 전덕기)들과 오직 민족운동에 전념한 이(김구, 안창호)들로 분류되는데 이들은 사회 교육과 민족을 위한 구원운동을 수행하였다.

이들에 의해 임시의정원, 대한국민회의, 한성정부 등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도록 하는데 산파역할을 감당하였다.

1930년 미북감리교회와 미남감리교회는 우리의 요청에 의해 통합을 위해 합동전권위원회를 조직하여 통합을 의논하여 교리적 선언과 사회신경을 채택하고 기독교 조선 감리회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그 후 일본의 문화정책에 의해 종교와 교육을 분리시키고, 각 기관으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하게 하였다.

이는 일본의 천황제를 신격화한 국가 종교로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정당화하였다.

신사참배에 대해 한국 그리스도인은 민족적 양심과 신앙적 양심에 따라 이를 거부하였지만 점차 학교와 교회에 강요하자 교회는 이에 굴복하여 종교적 수난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은 의도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투옥과 고문 등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었고 마침내 감리교회는 1942년 제2회 총회를 기점으로 폐쇄되었고 1943년 해산되었다.

혼란과 격변기의 교육사업 (1946-1960)

sub05_03_img1945년 포츠담 선언이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위력을 체험한 일본은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2차대전은 종막을 내렸지만 38선의 비극은 시작되었다.38선 이북은 조선공산당에 의해 그리고 남쪽은 미국의 군정 하에 제헌의회가 구성되고, 단독으로 이승만 정부가 세워졌다.

이에 반대한 김구와 김규식에 의해 통일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공산
정권에 의해 이용당하였다.

해방후 교회는 단일교회를 출범하려 했으나 일제시대의 잔재가 남은 교권에 반대하여, 각 교파로 환원 독립하여 분열하게 되었다. 또한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미래는 6.25 동란이란 결과를 가져왔다. 서울의 정동교회에서는 인민군들의 공포분위기 속에서도 예배를 강행했다.

해방 후 감리교회청년회는 지역별로 청년회 재건 사업에 나서 1949년에 청년회 헌장을 발표하며 재조직되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다가 1954년 공주영명학교에서 모였던 하기 수양회를 시발로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리교회청년회의 목적은 “남녀기독 청년의 신앙과 성결의 생활을 돈독 향상케 하며 지.덕.체의 교양과 봉사와 친목의 정신을 함양하여 본 교회에 헌신하게 함”이었다. 1952년 김광우 목사는 세계기독교교육대회를 다녀와서 청장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영상매체와 음성매체를 사용한 교육 등을 설명하며 새로운 교육의 가치관을 심어줌으로써 한국교회로 하여금 앞서가는 교육기관이 되도록 이끌어 전후 교회는 점차 발전하였다.

1954년 중부, 동부연회의 결의로 대전신학교 전수과를 설립하여 농촌교역자 양성하자는 취지로 시작한 대전신학원이 1960년 총리원 이사회의 결의로 감리교 대전신학대학(현 목원대학)으로변경하고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1955년에는 기독교교육자 전국 하기연합대강습회를 열고 유년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함께 나누었다. 이 강습회는 현대교육의 첨단을 걷고 있었다. 그 내용을 살려보면, 7부의 지도자과정으로 주일학교, 청년회, 음영교육, 교회학교, 성가대, 오락, 기독교가정에 대한 지도자 교육 및 특강으로 이루어졌다.

감리회보로 발행되던 소식지도 1959년부터는 감리교생활이란 월간지로 제작하여 감리교회의 기관보고 및 각종 소식을 나누게 되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시청각 교육에 대한 강조로 시작하여 주일학교의 아동교육이 본궤도에 접어들면서 주일학교 전국연합회가 1963년 7월에 결성되었다.

현대 감리교 교육사업 (1965년 이후)

sub05_04_img감리교회의 선교는 복음전도와 사회봉사 그리고 학교교육 사업으로 발전해 왔는데 한국의 사회와 문화가 발전하면서 그 활동 무대를 일반에게 넘겨주는 추세로 흘러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사업과 교육 사업은 교회의 중요한 선교활동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학교설립은 계속되어 1966년에는 파주중, 공고교, 1968년에는 영란여중, 상고교를 설립하였으며, 1970년에는 교육국 창설 40주년기념 교육대회를 연세대에서
개최하였다.

또한 1975년에는 경화여중.상고를 설립하였고, 동부신학교, 남부신학교(1978)가 설립되었다.

1980년 무인가 신학교의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총회에서 중부, 남부, 동부신학교를 협성신학교로 통합하여 1982년 승인을 받음으로써 서울 감리교신학대학, 목원대학 신학과, 협성신학교(현 협성신학대학) 3개의 감리교회의 신학대학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94년에는 감리교 입석교육원을 건축하여 봉헌예배를 드렸으며, 1995년에는 감리교연수원(샬롬유스호스텔)을 건립하여 봉헌하였고, 감리교교육 100주념기념대회를 이화여대에서 개최하였다.

현재 교목회등을 조직하여 30여개의 학교의 교육 사업을 지원하고 있으며, 기독교 교육 도서의 보급 및 “신앙과 교육” 월간지를 발행하고 기독교진흥 주일을 통하여 교회교육을 발전시켜 나가도록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학교교육보다 교회교육을 통한 신앙교육, 사회교육에 더 치중하고 있다. 1995년 감리교회내의 모든 출판업무를 일원화 하기 위해 홍보출판국을 신설하여 교회의 신앙 및 성서에 관련한 교재 및 월간 신앙잡지 기독교세계, 신앙과교육, 강단과 목회 등을 발간하여 일반 사회교육 보다는 신앙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95년 9월에는 기독교타임즈를 창간하여 기독교문화를 홍보하고 대중화된 매체로 자리매김된 감리교회의 주간지가 되었다. 이후 1998년 말로 잠시 폐간하였다가 2000년 부터 새롭게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