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회사
복음 수용과 선교사 내한

1870∼1880년대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갈망하는 한국인들은 선교사들이 내한하기 이전부터 만주와 일본에서 기독교 복음을 접하고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이들이 해외에서 출판한 한글 성서들은 매서인을 통해 국내에 들여와 읽혔고 그 결과 많은 세례 지원자들이 나왔다. 1744년 영국에서 존 웨슬리 목사에 의해 첫 감리교회 연회가 시작된 이후 미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미국의 감리교회는 1784년 연회에서 공식적으로 독립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1883년 9월 미감리회 볼티모어 연회 소속인 가우처(John F. Goucher) 목사는 신사유람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 중이던 민영익을 만난 후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우처 목사는 미감리회 국외선교부에 한국 선교 착수를 촉구하였고 일본 주재 미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 로 하여금 한국 선교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중국과 일본에서 감리회선교를 개척했던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24일 내한해서 ‘학교와 병원 사업을 해도 좋다’는 고종의 윤허를 받았다.

이에 미감리회 국외선교부는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부부와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부부, 국외여선교부는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Scranton)을 초대하여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이들 중 아펜젤러 부부가 제일 먼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내한하였다.

미감리회의 한국 선교

미감리회의 선교는 교육과 의료, 문서 사업으로 시작되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한국 근대 교육의 요람이 되어 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하였으며, 시병원과 보구여관은 한국 근대 의료사업의 요람이 되었다. 감리회 출판사에서 펴낸 성서와 서적은 복음 전도에 유효한 도구가 되었고 한글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1887년 7월 24일 배재학당 학생 박중상이 첫 감리교 세례교인이 되었고, 1887년 10월 9일 서울에서 오늘의 정동제일교회의 모체인 ‘벧엘예배당’이 설립되었다. 1897년 서울과 인천, 평양에서 엡웟청년회가 창설되었는데 이는 오늘의 감리교 청년회와 청장년선교회 및 남·여 선교회의 모체다.

선교 초기부터 신학반과 신학회를 조직하고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추진하여 1901년 최초 한국인 목사로 김창식 목사, 김기범 목사를 배출했다. 미감리회에서는 1902년 하와이 이민 선교를 시작으로 북만주와 몽고, 일본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

남감리회 선교의 시작은 개화파 지도자 윤치호가 망명중인 1887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세례 받고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면서 부터이다. 그는 미국에 유학할 때부터 남감리회 국외선교부에 한국 선교를 촉구하였다. 이에 1895년 10월 18일 중국에 있던 헨드릭스(E. R. Hendrix) 감독과 리드(C. F. Reid) 선교사가 내한하였고 이듬해 8월 리드 부부가 서울에 정착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 1897년 5월 2일 고양읍에 첫 남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

남감리회에서도 배화여학교, 한영서원, 호수돈여학교, 구세병원 등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였고, 태화여자관을 비롯하여 개성, 원산, 춘천 등지에 여자사회관을 설립하여 한국 근대 사회복지사업의 문을 열었다. 남감리회는 선교 초기부터 신학교육에 있어서 미감리회와 협력하였고, 1907년에 두 교회 연합으로 협성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남감리회는 1907년 동만주 선교를 시작으로 만주, 시베리아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부흥운동과 토착 신학

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의 회개로 시작된 부흥운동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거쳐 1909년 백만명구령운동으로 연결되었다. 한국인들은 이 부흥운동을 통해 회개와 중생과 성결을 체험하였고, 기독교적 가치와 윤리 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신앙체험을 바탕으로 복음을 주체적으로 해석하려는 토착 신학이 감리교 신학자들에 의해 수립되었다. 노병선 목사는 기독교를 동양과 서양을 포괄하는 ‘하늘의 종교’이자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은혜의 종교’로 변증하였다.

최병헌 목사는 동양 전통 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절대성’을 규명하였다.

이같은 토착 신학은 성서와 기독교 신앙 전통에서 동양의 문화·종교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여 수구 세력의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해소시켰으며, 기독교가 민족 문화와 종교 전통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문화선교의 길을 열어 주었다.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저항하는 감리교인들의 민족운동은 구국기도회로 시작하여 다양한 항일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전덕기 목사는 상동교회 엡윗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많은 민족운동가들을 규합하여 국권 회복운동과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경기도 이천지방 구연영 전도사는 교회 청년들로 구국회를 조직하여 민족 계몽운동을 벌이다가 아들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희생되었고, 같은 해 강화읍교회 김동수 권사도 의병운동과 관련되어 두 동생과 함께 일본군에 희생되었다.

1911년 105인사건 때 윤치호, 서기풍, 안경록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3·1운동 때 이필주 목사, 신홍식 목사, 정춘수 목사, 최성모 목사, 오화영 목사, 신석구 목사, 박동완 전도사, 박희도 전도사, 김창준 전도사 9명이 민족대표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루었다. 3·1운동 당시 교회는 만세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그로 인한 희생도 컸다.

수원지방의 제암리와 수촌리, 화수리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당이 일본군의 방화로 불탔고 교인들이 희생되었으며,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과 평양 남산현교회 부목사 박석훈 등이 옥중 순국하였다.

3·1운동 이후에도 감리교인들은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단체, 애국부인회 등 민족운동 단체에 적극 참여하였고, 농촌계몽운동, 절제운동 같은 민족주의적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남북 감리회 합동

3·1운동 이후 한국 교회의 자립 의지가 높아지면서 미감리회와 남감리회 지도자들은 교회 합동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924년 두 교회 ‘교회진흥방침연구회’를 중심으로 교회 합동을 추진키로 하고 1925년 ‘남북 감리교연합기성위원회’가 조직되어 교회 합동을 위한 실무작업에 착수하였다. 미감리회와 미남감리회 총회에서도 한국 교회의 합동운동을 인정하였고 1930년 11월 18일 남북 감리회 대표 22명으로 합동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30년 12월 2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창립 총회가 서울에서 열려 초대총리사로 양주삼 목사를 선출하고 한국 감리교회의 ‘자치교회 시대’를 열었다.

한국 감리교회는 그 설립 취지로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조선적 교회’의 3대 원칙을 선포하였으며 신앙 및 신학 원리로 8개조 “교리적 선언”과 16개조 “사회신경”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모든 의회 구성을 평신도와 성직자 동수로 하여 평신도의 역할을 증대시켰으며, 여성 성직의 문호를 개방하여 1931년 연합연회에서 한국 최초로 여선교사 14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교회의 영적 갱신과 신학의 발전

1930년대 한국교회가 점차 신앙적 영성과 사회적 지도력을 상실한 채 비판을 받고 있을 때, 이용도 목사는 부흥회를 통해 영적 각성과 교회의 갱신을 촉구하였다. 그의 몰아적이고 체험 중심적인 신비주의 신앙이 일부 교회로부터 견제와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보여 준 진솔한 ‘예수 중심’의 신앙과 삶은 큰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영성 회복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또한 1930년대 한국 교회는 진보·보수 신학 사이에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웨슬리 복음주의 전통에서 진보적 신학을 수용하였던 정경옥 목사는 ‘신앙에서는 보수주의, 신학에서는 자유주의’ 입장을 취하면서 ‘신학의 현대화’와 ‘신학의 향토화’를 추구했고, 경건적 신앙 실천을 바탕으로 성서의 절대 권위를 강조했던 변홍규 목사는 보수적 신학 전통을 계승하며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 발전에 기여했다.

일제 말기 교회 수난

일제 말기 교회는 ‘신사참배’를 비롯한 일본의 국가 종교의식을 강요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일제의 회유와 위협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점차 강력해지는 일제의 억압 하에 한국 감리교회는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되었다가 1945년 7월 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흡수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신앙양심과 민족의식에 투철한 신앙인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쟁하였다. 예산제일교회 청년·학생들이 ‘학생속회’를 통해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하다가 발각되어 투옥되었고, 모곡교회의 민족운동가 남궁억 전도사에게 영향을 받은 홍천과 춘천 지방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은 ‘십자가당’을 만들어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투옥되었다.

그리고 동부연회의 철원읍교회 강종근 목사, 회양읍교회 권원호 전도사, 천곡교회 최인규 권사 등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쟁하다가 옥중 순교하였다.

민족 분단과 교회 분열

우리 민족은 8·15해방과 함께 남북 분단의 비극을 맞았다. 38선 이북에 있던 교인들은 1946년 서부연회를 재건하였으나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극심한 수난을 받았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공산정권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되었고, 철원에서는 장흥교회 청년들이 애국청년단을 조직하여 반공투쟁을 벌이다가 투옥되었다. 결국 북한에 있던 많은 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고, 이후 북한 교회는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6·25 전쟁으로 많은 예배당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전쟁을 겪은 후 남과 북사이에 정치·문화·종교적 갈등과 대립 구조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런 민족의 분단상황에서 교회는 내적 갈등과 분열로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 감리교회도 해방 직후 재건파·복흥파 분열을 시작으로 1954년, 1970년, 1974년에 각각 교회 분열의 아픔을 겪었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합동함으로 ‘하나된 감리교회’ 전통을 이어 나갔다.

교회 성장과 해외 선교

전쟁 후 감리교회는 미연합감리회 선교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재건과 복구 작업을 신속하게 전개하였다. 그리고 1968년 온양에서 개최된 한·미 선교정책협의회를 계기로 한·미 감리교회는 선교의 동반자 관계를 정립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감리교회는 교회 부흥과 민족 구원의 선교적 사명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1964년 김활란, 홍현설의 발의로 시작된 민족복음화운동은 초교파적 대중부흥운동으로 연결되었고, 1974년 시작된 ‘5천 교회 1백만 신도운동’과 1987년 시작된 ‘7천 교회 2백만 신도운동’은 교회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해방 당시 5만 명 수준이던 교세가 1984년에 90만 명, 1996년 현재 7개 연회, 국외선교연회, 서부연회, 183개 지방, 4,700교회, 135만 명 교인을 넘게 되었다. 이처럼 교회 성장을 이룩한 한국 교회는 해외 선교를 통한 세계복음화에 적극 참여하였다.

1958년 볼리비아 선교를 시작하였고, 1965년 ‘감리교 선교 80주년 기념사업’으로 사라왁 선교가 시작되었으며, 1970년대 태평양 동아시아 지역, 1980년대 동남아시아 중동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 그리고 1990년대 러시아와 동유럽, 중국 등 옛 공산권 지역으로 선교가 확산되었다.

교회 일치운동과 사회 참여

‘하나된 교회’
를 지향하는 한국 감리교회는 해방 후에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한성서공회, 대한기독교서회, 한국찬송가위원회, 기독교방송, 대한기독교교육협회, 기독교청년회, 여자기독교청년회를 통한 초교파 연합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아시아교회협의회, 세계교회협의회, 세계감리교협의회 등 국제적 교회일치운동 기구에 참여하면서 아시아와 세계 교회 신학과의 교류를 통해 감리교회의 선교 및 신학적 과제를 확인하였다. 1960년대 이후 감리교 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토착화 신학’은 기독교 신학 전통에서 한민족의 종교·문화 전통을 재해석함으로 동·서 신학의 교류와 대화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신앙인의 적극적인 사회 현실참여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선교’ 신학 입장에서 1961년부터 산업선교가 시작되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의 인권 회복과 노동 환경의 구조적인 개선을 위한 노력으로 발전된 산업 선교는 1970년대 들어서 사회정의 구현운동,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1980년대 노동운동, 농민운동, 도시빈민운동, 환경운동, 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

선교 100주년과 자치 60주년

한국 감리교회는 ‘선교 1백주년’을 맞아 1984년 6월 24일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기념 연합예배’를 드렸고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신앙선언”을 발표하였으며 1985년 4월 5일에 개최된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기념대회’에서는 “기독교대한감리회 1백주년 기념대회 선언문”을 채택하여 선교 1세기를 정리하고 선교 2세기를 전망하는 신앙과 신학적 결의를 밝혔다.

그리고 1990년 10월 29일 ‘기독교대한감리회 자치 6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자치 60주년 선언문”을 통해 한국 감리교인들은,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는 교회와 민족 앞에서 그리고 나아가서 세계의 참된 평화를 위하여 우리의 선교적 사명을 마음 속에 되새기면서’ ‘새로운 각성과 결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할 것’을 다짐하였다.

 

한국 감리교회는 한 세기 역사를 통해

1)성서, 전통, 이성, 체험을 바탕으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웨슬리 복음주의 신앙 전통

2)한말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족이 처한 사회·국가적 상황과 현실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의 구원을 구현하는 민족주의 신앙 전통

3)기독교 복음을 한민족의 역사·문화적 전통에서 주체적으로 수용·해석하는 토착적 신학전통

4)‘하나의 복음’,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 일치운동 정신에 입각하여 다른 교파 교회와 대화와 협력을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신앙 전통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역사 및 신앙 전통을 계승한 오늘의 한국 감리교회는 민족과 세계 복음화, 민족의 평화 통일 그리고 세계 인류의 평화공동체 구현을 위한 선교 사명이 있음을 확인한다.

21세기 감리교회의 위상

21세기에 들어오면서 한국감리교회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노력했다. 위대한 감리교회 선언을 통해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WMC 대회를 유치하는 등 세계화가 시작되었으며, 이어 감리교회의 미래를 위해 300만 총력전도운동을 전개하여 감리교회 배가 운동에 앞장섰으며, ‘정직합시다.’라는 사회운동을 전개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특히 2003년 호남선교대회를 광주에서 개최함으로써 감리교회의 역동적인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제26회 총회에서 피선된 신경하감독회장과 감독들은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를 선언하고 영적대각성운동을 전개해 우선 감독회의에서 금식기도회와 자기반성의 영적대각성 선언식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제주선교대회를 통해 열악한 제주지역에 선교열기를 일으켰다. 제19차 세계감리교 대회를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한국감리교회 위상을 드높였으며 세계의 감리교회들이 우리와 선교협약을 요청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실한 감리교인이란 주제로 희망 프로젝트를 세워 감리교인의 성화를 향한 삶을 강조하였으며, 부산에서 영남선교대회를 개최하여 영남지역의 선교역량을 강화시킴으로써 든든히 서가는 감리교회를 세워가고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약사(연도별)
년 도 기독교대한감리회 약사
1883.9 가우처목사가 보빙사절단 전권대신 민영익을 만나 조선선교에 관심을 갖다.
1883.11.6 가우처 목사가 미감리교 해외선교부에 한국선교를 요청하고 2천불을 기탁하다.
1884.1.31 가우처 목사가 일본주재 선교사인 매클레이에게 한국방문을 요청하다.
1884.3.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에서 매클레이 목사에게 한국 방문 지시하다.
1884.6.24 맥클레이 선교사, 최초로 공식내한하여 교육, 의료사업을 제안하는 고종 윤허(7.3)를 확인하다
1884.10 스크랜턴 대부인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에서 선교사로 임명하다.
1884.11. 미 감리회 총회 선교위원회에서 한국선교를 결정하다.
1884.12.4 스크랜튼 선교사 목사안수를 받다.
1884.12. 매클레이 선교사가 이수정에게 감리교교리문답 한글번역을 요청하다.
1885.2.2 아펜젤러 선교사 파울러감독의 집례로 목사안수를 받다.
1885.3.5 동경 아오모리, 맥클레이 선교사 사택에서 조선선교사회를 조직하고, 파울러 감독이 매클레이 목사를 조선선교사업관리자로, 아펜젤러를 부관리자로, 스크랜트 대부인을 회계로 임명하다.(2.23 파울러감독)
1885.4.5. 감리교회 첫 선교사 아펜젤러 선교사(교육), 스크랜턴 선교사(의료5.3) 스크랜턴대부인(여성6.20) 내한
1886.8.3 배재학당 개교
1885.9.10 스크랜튼 선교사, 정동 시병원 개원하다.
1886 이화학당 개교
1886.4.25 부활절에 언더우드의 보좌로 서울에서 스크랜튼의 딸(마리나), 아펜젤러딸(앨리스), 일본공사 하야카와 테츠야에게 세례를 주다.
1887.7.24 아펜젤러 목사가 박중상(배재학생)을 한국인 최초로 세례하다.
1893 감리회와 장로회가 협의하여 전국의 선교구역을 분할설정하다.
1895 미국 남 감리교회 리드 선교사 내한
1897 조선그리스도인 회보 창간
1900.9.9 정동교회에서 조선말신약성서 번역 감사예배를 드리다. 아펜젤러는 마태,마가, 고린도전후서를 맡았다.
1901 개신교 최초로 김기범. 김창식 목사 안수
1905.6 미 감리회 신학당 건립을 결의하고 조원시(C.H. Jones) 목사를 초대당장으로 임명하다. 감리교회 선교연회 조직
1905.6 미 감리회 여학당 설립 결의하고 앨벗슨(M.M. Albertson)을 초대 당장으로 임명하다. 감리교회명칭 통일(9월)
1906 미이미(북감리회) 조선연회(6.7)와 남감리회 조선연회(9.18) 감리교회란 명칭을 사용하기로 결의하다.
1907.6 남감리교와 협동하여 협성신학당으로 개명하다.
1908 북 감리교회 한국 연회 조직
1911 남 감리교회 최초로 김흥순, 정춘수, 주한명 목사 안수
1914 남 감리교회 한국선교연회 조직
1916 신학세계 창간
1918 남 감리교회 한국 연회 조직
1919 삼일운동에 주도적 참여
1924.2.5-6 남·북 감리교회 진흥방침연구위원회 조직하여 합동 사업을 위해 위원을 선출하다.
1926.5.7 재단법인 설립을 허가받다.
1927 남 감리교회 선교 30주년 기념식 거행, 남·북 감리교회 총회에 한국감리교회 합동청원
1928.5 남북 감리교회통합청원서가 미국 북감리회 총회에서 통과하다.
1930.3.20 조선남감리교회 30주년 기념보를 발행하다.
1930.11.18-29 남·북 감리교회 합동성명, 기독교조선감리회 조직(12월2일), 제1회 총회에서 냉천동 협성신학교에서 100인이 모여 헌법과규칙제정, 8일 양주삼 총리사 피선, 10일 정동교회에서 총리사로 취임하다.
1931 제1회 동부, 서부. 중부 연합연회 조직, 제1회 만주선교연회 조직, 세계감리교회 최초로 여목사 제도 및 여자 평신도 총회 대표 제도를 시작하다. S.쿠퍼외 13명의 여선교사에게 목사안수를 하다.
1932.9.20 영국감리교회 분파가 합동하여 영국감리교회(The Methodist Church, Rev. J. Scott Lidgett D.D.)를 조직하다.
1933.1 감리회보(감리교회 기관지) 창간
1933.2.18 이화전문학교후원회 창립총회를 갖다.(임시의장:윤치호)
1933.4.1 류형기씨가 교육국 총무로 시무, 김준옥 목사가 송도고 교장으로 시무하다.
1933. 7.26-8.3 제3회 종교교육대회로 내금강 금강각에서 주일학교교사 및 관계자들이 모여 대회를 개최하다.
1934.6.24 한국 감리교 선교 50주년 기념행사/서울 배재학교
50주년 기념 씰을 발행하다.
1934.1 제2회 총회, 양주삼 총리사 재선
1936.9.24 장로회 총회에서 장.감 양 교회의 교구(선교구역설정)를 철폐하는 글을 양주삼 총리사에게 보내다.
1938.1 제3회, 김종우 감독 피선(-1939.9 소천),
1939 제4대 정춘수 감독 피선(보선) 일본 감리교회와 합동 결의
1940 신학세계 폐간,
10.2 감리교신학교 폐교, 11월 선교사 전원 귀국
1941.3 3부 연회(동부, 서부, 중부) 해산, 기독교조선감리교단 조직, 제1회 총회에서 정춘수 통리자 선출
1942 감리회보 폐간
기독교조선감리교단 제2회 정기총회를 소집하여 불신임안 가결. 목사 다수 구속됨, 변홍규 목사 통리자로 선출
1943 서울 상동교회 황도문화관으로 전환
7.2 임시총회에서 통리자로 김영섭목사를 선출했으나 반혁신파의 반발로 사퇴하다.
10.3 반일파에서 주도하여 총회를 소집하고 통리자로 전진규목사, 총무 송정률목사 선임하여 냉천동에 사무실을 열고 복구시켰으나 총독부의 반대로 무산되다.
10.14 임시총회를 열고 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개명, 변홍규 통리자 해임, 규칙개정후 정춘수 통리 선임
1945.7 일본 기독교조선교단(장, 감, 성 통합) 발족. 해방과 더불어 감리교재건중앙위원회 조직
1945.1 기독교조선감리회 재건위원회 조직
1946 1.14 동중부연합연회(정동교회)
2월 감리교신학교 재건, 6월 복흥파와 유지파로 분리, 9월 복흥파 특별총회 강태희 목사 감독피선, 유지파 변홍규 목사 중심,
10월 서부연회 조직 송정근 목사 연회장 피선
1948.1.23 이규갑 목사의 사회로 서울 동대문교회에서 제4회 총회를 열고 1947.1.11일에 구성한 남조선총회는 무효임을 선언함.
1948 안식관 창설
1949.4.26-5.2 통합, 중부, 동부 연합연회 모이다. 통합 총회(29-30)에서 김유순 목사 제 5대 감독 피선, 기독교대한감리회로 개칭하는 건의안이 가결되다.
1950.8 김유순감독, 양주삼 총리사 등 교역자 40여명 북한 납치, 총리원, 감리교신학교 부산 이전
1951.1 부산영도에 총리원 사무실 설치
1951.11 중부, 동부, 서부 연합연회를 피난지 부산장로교회에서 모인후, 모어 감독의 사회로 11.2-3 총회를 열고 류형기 목사를 제6대 감독으로 선출하다.
1952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위한 교육운동이 웨슬리 구락부 운동으로 발전됨
1953.3 대전제일교회에서 중부, 동부연합연회와 특별총회모임, 류형기 목사 제7대 감독피선, 웨슬리 탄생 250주년 기념 부흥의 해로 정하고 배가운동시작, 부녀회를 여선교회로 개칭
1954.3 제3회 정기총회(정동교회) 류형기 목사 제7대 감독으로 재선,

한국선교70주년 기념사업의 해(1954.4~1955.3)에 전도하기로 결의하다

1954.6.27 한국 선교 70주년 기념주일로 지키다.(6.24기념일)
1954.11 미감리회에서 재건헌금지원 160여만달러, 29일 대전신학원 설립, 전수과 편입됨
1955.3 제1회 남부연회가 대전에서 열리다.
동부 5지방, 중부 8지방, 남부 10지방, 감리교신학교 전수과 대전이전, 감리회청년회 헌장 통과, 전밀라,명화용이 최초의 한국인 여성 목사안수를 받다.
1955.4 제3회 정기총회에 반발 천안에서 호헌총회개최 김응태 감독선출
1956.3 동부,중부,남부연회가 서울과 대전에서 모여 “자라나는 감리교회” 표어 채택, 재단법인 감리학원 설립 국제대 인수경영
1957.3 3부 연합연회 개최(정동교회), 사회국 농촌사업부 설치, 감리회 양호회 조직
1958.9.30-10.6 제8회 총회.
김종필 목사 32차 투표결과 제8대 감독 피선, 3연회 32지방, 1100여교회 240,000명
1959.2 감리교신학교 대학승격, 홍현설 학장
1959.3.17-22 연합연회(정동교회) 호헌파 총회와 합동
1959.5.14 광화문 구)감리회관으로 총리원 이전
1959.9.11 광화문 구)감리회관 봉헌식
1960.1 한국선교 75주년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이란 주제로 4개년 기념사업추진
1960.8 특별총회 소집
본부 부서개편, 총리원-전도국(내지전도부,외지전도부) 교육국(아동사업부,청년사업부,장년사업부,지도자 양성부, 일반학교부,음영교육부,웨슬레구락부,출판부)
사회국(사회사업부,농촌사업부) 부녀국(전도부,사회부,교육부,보건부,농촌부) 서무국(관리부,회계부,은급부)
1962.7 제9회 총회.
이환신 목사 제9대 감독 피선
1962.11.5-11.7 서울 정동 젠센기념관에서 감리교 4년계획연구회를 개최하여 교회재정,전도,교육,사회,부녀운동에 대해 논의하다.
1963.5.24 요한 웨슬레 신생 225주년기념연합예배를 종교교회에서 드리고 세계감리교협회에서 보낸 동메달을 설치하다.
1966.9.21 감리회 36주년 기념예배를 정동제일교회에서 갖다.(축사:영국-빈센트박사 카톨릭-노기남대주교 기독교연합회-이천환주교)
1967.3 제10회 총회에서 변홍규 목사 제10대 감독 피선되다.
교역자파송을 감독파송에서 구역인사제도로 변경하고 연회장제도를 시작하다.
1970.1. 재단이사회에서 인천기독병원 부설 간호학교(현 안산대학교) 법인에 재단설립을 위해 이양하기로 결정하다.
1970.1 제11회 총회.
윤창덕 목사 제11대 감독 피선
1974.12.12 제12회 총회
김창희 목사 제12대 감독 피선. 법통과 갱신 등으로 교회 분리, 장로안수제 신설
1975.9.10 김창희감독이 새세계 선교를 위한 기독교대한감리회 선언서를 발표하다.
1976.3.18 제 12회 총회 제2차 특별총회에서
 연회 감독제에 의해 감독에 박설봉(중부), 박대선(동부), 김순경(남부) 목사 피선
1976.10.28 감리회관 8층 증축 준공식
1978.10.26-28 제13회 합동총회를 배화여고 강단에서 김창희 감독의 사회로 열다. 27일 감독선거에서 김지길 목사(중부연회), 이경재 목사(동부연회) 박우희 목사(남부연회) 총회측은 김재황 목사(중앙연회)를 감독으로 선출하다.(2,200 교회, 60만 교인) 교단대표인 감독회장은 6개월씩 담당키로 함.

총리원 명칭을 감리회본부로,  총리원이사회를 총회실행위원으로 변경하고, 평신도국을 신설하다. (장년회-> 남선교회)

1979.3.3 감독협의회에서 내일의 감리교회를 위한 백서를 발표하다.
1980 제14회 총회.
5개 연회 감독으로 오경린(감독회장, 서울), 최기석(중부), 윤춘병(동부), 노상준(남부), 최상봉(삼남) 목사피선
1980.6.10-12 한국 감리교회 미래의 전망이란 주제로 전국 선교부 및 사회부 총무 협의회를 부산애린유스호스텔에서 개최하다.
1982.1.11-13 감리사,선교부총무,사회부총무협의회(임원대회)를 온양제일호텔에서 개최하다.(강사 제임스 암스트롱 감독)
1982.1 교육국에서 감리교회사 연구회를 조직(1981)하고 연구지를 창간하다.
1982.1 제 15회 총회에서
5개 연회 감독으로 서병주(감독회장,서울), 최용환(중부), 김기종(동부), 장만석(남부), 여관구(삼남)목사피선
1983.9 제15회 총회 특별총회에서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역자 은급규정’ 통과됨.
1983.10.31-11.2 전국속회지도자교육대회를 광림교회에서 교육국 주최로 개최하다
1983.11.28-12.9 [웨슬리전통에서 본 오늘의 감리교회 전도]라는 제목으로 세계감리교협의회 동남아시아지역 세미나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하다.
1984.6 100주년 기념 국제대회 정동제일교회에서 가짐.
1984.11 제16회 총회에서 5개 연회 감독으로 김봉록(감독회장, 서울), 이복회(중부), 임순목(동부), 이준용(남부), 이호성(삼남) 목사 피선
1985.1 제16회 총회 입법 특별총회 개최(정동제일교회)
1985.4.3 연합연회와 100주년 기념대회를 인천 실내체육관에서 개회
1985.8.26-9.6 대만감리교회 목사방문- 연회장 장보라 외 17명 방문
1985.11.7 감리회 본부, 여의도 정우빌딩으로 이전
1986.10.23 광화문 선교 100주년 감리회관 기공예배
1986.1 제17회 총회에서 5개 연회 감독에 장기천(감독회장, 서울), 이춘직(중부), 조충원(동부), 김승호(남부), 김만복(삼남) 목사 피선
1988.10.26 호주연합교회와 선교협력 협약을 체결하다.
1988.1 제18회 총회에서 5개 연회 감독에 최종철(감독회장, 서울), 한경수(중부), 김희도(동부), 이종주(남부), 강원재(삼남) 목사 피선
1989.2.16-17 제18회 총회 임시총회를 금란교회에서 최종철 감독회장의 사회로 개회하다. 교단비리척결특별조치법 통과
1989.5.1~12 세계 감리교 국제전도 세미나를 광림교회 수도원에서 갖다.
1989.7.27 제18회 총회 제5차 실행부위원회에서 한국감리교회와 브라질감리교회(IMB)의 선교협정을 인준하다.
1989.9 교역자 은급재단 설립허가 받음.(문화공보부)
1989.10.31-11.2 제18회 총회
특별총회. 재단법인 기독교대한감리회 은급재단 정관 통과, 7000교회 200만 신도운동 전개
1990.10.29-31 제19회 총회.
자치 60주년 기념행사 거행. 7개 연회 감독에 곽전태(감독회장, 서울남),나원용(서울), 김수연(중부),
조명호(경기), 박성로(동부), 김규태(남부), 김종수(삼남) 목사 피선
1991.12.21 감리회본부 광화문으로 이전
1992.7.17 광화문 감리회관 봉헌식
1992.1 제20회 총회,
7개 연회 감독에 표용은(감독회장, 서울), 이종수(서울남), 고용봉(중부), 최기순(경기), 이석희(동부),
박철규(남부), 구동태(삼남) 목사 피선
1993.4.1-2. 창천교회에서 국외선교연회를 조직하다.
1993.4.13-15 전국임원협의회를 경주 현대호텔에서 개최하다.
1993.1 제20회 총회
특별총회 광림교회에서 개최하다.
1994.10.25-27 제21회 총회,광림교회에서
개최, 7개 연회 감독에 김선도(감독회장, 서울남,) 배동윤(서울), 최세웅(중부), 백문현(경기), 백명호(동부),
이성순(남부), 박문순(삼남)목사 피선, 입법의회를 조직하기로 하다.
1995.4.5 감리회본부, 여의도 정우빌딩으로 이전
1995.8.22-27 세계 감리교 감독회의 개최(세계 감리교 감독 150여명 참석, 광림세미나하우스)
1995.8.27 ’95 세계 감리교 서울희년대회 개최(잠실실내체육관)
1995.9.2 감리교주간신문 「기독교 타임즈」창간
1995.10.9 일영 감리교 연수원 봉헌식을 행하다.
1995.10.24-26 제21회 총회 입법의회, 광림교회에서 열다. 국외선교연회를 신설하다
1995.11.30 제1회 감리교 정보통신 세미나를 선교국 주최로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다.
1996.9.21 사회복지법인 설립허가받다.(보건복지부)
1996.10.29~31 제22회 총회(광림교회)에서
7개 연회 감독에 김홍도(감독회장, 서울), 김용주(서울남), 이호문(중부), 김영수(경기), 김창수(동부),
김영웅(남부), 신완철(삼남) 목사 피선
1997.1.27~28 제22회 행정총회 결의에 따른 입법의회 (임마누엘 교회)
1997.2.20. 국외선교백서를 발간하다.
1998.10.27~30 제23회 총회(숭의교회)에서
9개 연회 감독에 이유식(감독회장, 남부), 박춘화(서울), 안행래(서울남), 이종복(중부), 박만용(경기), 김명기(동부),
김기웅(충북), 김요찬(충청), 최타권(삼남) 목사 피선, 고 이용도 목사 휴직에 대한 명예복귀을 결의
1999.9.10 감리회 본부, 광화문 감리회관으로 이전
1999.10.28~30 제23회 총회
입법의회(만나교회)에서 국외선교연회가 미주선교연회로 개칭되다.
2000.2.1 기독교대한감리회 공식 홈페이지 개통(홍보출판국 주관)kmc.or.kr / kmc.or.kr
2000.8.24 제23회 총회 임시 입법의회가 만나교회에서 열려 감독회장 선거관련 법을 개정하다.
2000.10.25~27 제24회 총회(금란교회)에서
9개 연회 감독에 장광영(감독회장, 서울), 홍안의(서울남), 권용각(중부), 임은택(경기), 박상혁(동부),
김종문(충북), 신동일(남부), 김소윤(충청), 석준모(삼남) 목사 피선
2001.4.2~4 위대한 감리교회 건설을 위한 임원대회를 경주교육문화회관에서 개최하다.
2001.6.4 위대한 감리교회 대회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거행하다.
2001.7.24-31 영국 브라이튼에서 열린 제18차 세계감리교협의회(WMC)가 한국감리교회의 호소문(한반도 화해와 평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시정촉구 결의문)을 지지하다.
2001.8.11 교회학교연합회가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감리교 어린이 선교대회를 열다.
2001.10.29.~31 제24회 총회
정기입법의회를 만나교회에서 열다. 경기연회를 경기연회와 중앙연회로 분할하다. 교역자의 국적 조항 폐기하다.
2002.6. 9 아펜젤라 순교 100주년 추모예배를 정동제일교회에서 드리다.
2002.1. 31 총회실행위원회
4차회의에서 감리교회에서 성경전서 개정개역판과 표준새번역 개정판의 사용을 결의하다.
2002.6.14-18 아시아감리교대회를 광림세미나하우스에서 열고 장광영 감독회장이 AMC 초대의장으로 선출되다.
2002.9.18 세계감리교협의회 실행위원회에서 한국감리교회가 2006년 세계감리교협의회(WMC) 주최국으로 결정되다.
2002.10.25 24회 총회
역사위원회에서 한국 감리교인물사전을 펴내다.
2002.10.29-31 제25회 총회(광림교회)에서
10개 연회 감독에 김진호(감독회장, 서울), 고수철(서울남), 전양철(중부), 한정호(경기), 배정길(중앙),
권오서(동부), 소화춘(충북), 이종현(남부), 조성원(충청), 오세창(삼남) 목사피선
2003.3.8-12 홍콩에서 개최된 아시아 감독회의에 참석하다
2003.4.15 흑룡강성 기독교 대표단 감리회본부 내방
2003.4.24-27 미주한인감리교회
이민선교 100주년 기념대회를 하와이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하와이 컨벤션 센터에서 Remember the past,
Celebrate the present, Envision the future란 제목으로 개최하다.
2003.5.28-30 감리회 300만
총력전도를 위한 전국지도자 대회를 횡성 성우리조트에서 개최하다.
2003.7.7-8 감리교발전을 위한 토론회를 일영연수원에서 개최하다.
2003.7.28 세계감리교협의회 선데이 음방회장.조지 프리먼 총무 감리회본부 방문하다
2003.10.6~9 감독회장 일행이 감리교회에서 지원한 몽골 후레정보통신대학 방문하다.
2003.10.28.~30 제25회 총회
정기입법의회를 광림교회에서 열고 4년제 전임감독제도를 제정하고 호남선교연회를 설치하다.군선교회 정관통과하다.
2004.1.29. 감리회 역사박물관 설립 및 추진위원회를 연회별 2명(목사,평신도)과 감독들로 조직키로 결의하다.
2004.3.2-4 감리회 300만 총력전도를 위한 2차 전국지도자 대회를 횡성 성우리조트에서 개최하다.
2004.3.13-20 싱가폴,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아감독회의에 참석하다.
2004.6.25-7.1 감독회장 및 서부연회 관계자가 북한을 방문 용천구호품을 전달하고 평양신학원을 방문하다.
2004.8.27 광주 염주체육관에서 호남선교대회를 열고 약4만여명의 성도가 함께 모여 호남지역 선교를 위해 기도했다. 감리교회는 광주.전남지역의 수해복구와
광주 장학사업(2억원)을 지원했다.
2004.10.27-28 제26회 총회(장소: 광림교회)에서 감독회장으로 신경하 목사를 선출하고 10개 연회 감독에 윤연수(서울), 김충식(서울남), 이규학(중부),
최호순(경기), 권혁구(중앙), 박거종(동부), 이돈하(충북), 곽성영(남부), 현상규(충청), 장동주(삼남)
목사를 피선하다
2005.5.10-12 2005 임원대회를 강원도 횡성 현대성우리조트에서 개최하여 900여명의 임원이 모여 선교120주년을 반성하고 교회와 민족을 향한 소명을 새롭게 하다.
2005.10.25-27 제주 조천체육관에서 제26회 입법의회(1차)를 개최하였으나 마무리 되지 못해 휴회키로 하고 해산하다. 제주지역 선교와 부흥을 위해 탑동 해변 공연장에서 제주선교대회(26일)를 개최하다.
2005.11.18 제26회 입법의회(2차)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하다.
2006.5.20 본부 교육국 주최로 감리교청년 Worship Conference-Fire from Heaven을 갖다.
2006.5.24 양화진에 하디 선교사 영적대각성운동 기념비를 건립하다.
2006.6.30 제26회 총회 제6차 실행부위원회에서 순교자 기념주일을 6월 4째주에 지키기로 결의하다.
2006.7.18-19 WMC총회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하여 신경하 감독회장이 회장단으로 선출되다.
2006.5 선교사 백서를 발간하다.
2006.7.20-24 WMC대회가 금란교회에서 열려 132개국 대표가 참가하여 성황리에 종료하다. 칭의에 대한 교리합의서에 서명하다.(감리교회, 루터교회, 천주교회)
2006.7.25-26 아시아 감리교 감독회의와 AMC실행위원회가 코리아나 호텔에서 개최되다.
2006.10.26-28 인천 숭의교회에서 제27회 총회를 신경하 감독회장의 사회로 개최하고 김기택 감독(서울연회), 한정석 감독(서울남연회), 김승현 감독(중부연회), 최승일감독(경기연회), 박영준 감독(중앙연회), 김남철 감독(동부연회), 김일고 감독(충북연회), 이기복 감독(남부연회), 강환호 감독(충청연회), 피정식 감독(삼남연회)이 취임하다.
2006.12.22 제4회 광화문 크리스마스 행사를 혼혈.이주민 2세를 위한 성탄행사로 갖다.
2007.3.23 목회자 윤리강령, 제26회 총회 성직위원회에서 기초하여 제27회 총회 제2차 총회실행부위원회의 결의를 거쳐 최종 확정하다.
2007.4.25 광화문 희망광장에서 미 버지니아공대 희생자 추모기도회를 갖다.
2007.5.16-18 2007 임원대회를 경주교육문화회관에서 갖다.
2007.7.8 2007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를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다.(초교파)
2007.8.24 부산에서 영남선교대회를 열고 약 8만여명의 성도가 함께 모여 영남지역 선교를 위해 기도했다. 감리교회는 부산시에 이웃돕기 성금을 기탁하고 영남지역의 사회복지기관을 지원하다.
2007.10.24-26 제27회 총회 입법의회를 계산중앙교회에서 열다.
2007.12.21 제5회 광화문 희망광장에서 크리스마스 행사를 열고 다문화 가정이주민 여성들의 고향방문 기금을 지원하다.
2007.12.20 감리교회,성숙과 부흥을 위한 백서를 발간하다.
2008.1.11-12 감리교회 교사전국대회를 교회학교연합회주최로 도고 토비스콘도에서 갖다.
2008.3.23-30 캐나다연합교회와의 교류 및 협력 확대를 위해 토론토대학 피터 와이어트(Peter Wyatt) 목사를 초청하여 3개 신학대 신학강연을 갖다.
2008.4 3-6 세계 감리교선교사대회를 온양 팔레스호텔, 하늘중앙교회에서 300여명이 참가하여 감리교회 세계선교를 위한 네트워크의 기초를 마련하다.
2008.5.20-22 존 웨슬리 회심270주년 기념 웨슬리 국제전도컨퍼런스를 덕산 스파캐슬에서 개최하다. 저녁성회는 에디 팍스 목사가 인도하다.
2008.7.14-24 사회평신도국, 사회문제 대책위원회에서 미얀마 달라지역과 중국 지진피해지역인 쓰촨성 지역을 방문하다.
2008.9.18 독일감리교회와 선교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독일감리교회 본부를 방문하다.
2008.9.25. 감독 및 감독회장 선거를 실시하여  연회 감독으로 신문구(서울),임영훈(서울남), 전명구(중부), 정판수(경기), 정승희(중앙), 원종국(동부), 조문행(충북), 박영태(남부), 조대해(충청), 정양희(삼남), 한기형(미주특별)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다.
2008.10.3. 제1회 기독교타임즈 사장(감독회장)기 청소년 축구대회를 용인 FC에서 갖다.
2008.10.30 제28회 총회를 무기 연기하다.
2008.11.4 감리교회 선교사자녀 장학재단을 종교교회에서 창립하다.
2008.12.22 노숙자 자활과 노숙인 예방을 위한 광화문 크리스마스 행사를 개최하다.
2008.12.30. 해외선교백서를 발간하다.
2009.8.2-5 세계 감리교농아선교대회를 광림세미나 하우스에서 개최하여 총13개국 대표가 참석하다.
2009.9.17.~10.1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WMC실행위원회에 참석하다.
2009.10.21.~24 WCC 도잔소(홍콩)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다.
2009.2.25 이규학 목사(인천제일교회)를 감독회장 직무대행에 선임되다.
2010.7.7 이규학 목사(인천제일교회)를 임시감독회장에 선임되다.
2010.12.17 백현기 변호사를 감독회장 직무대행에 선임되다.
2012.5.25 김기택 목사(성천교회)를 임시감독회장에 선임되다.
2012.10.30.~31 제30회 총회를 하늘문교회에서 열고 김영헌(서울),고신일(중부), 박계화(경기), 이정원(중앙), 안병수(충북), 한양수(남부), 봉명종(충청), 석준복(삼남) 목사가 8개 연회 감독으로 취임하다.
2013.7.25. 제30회 총회 임시 총회를 열고 전용재(중앙) 목사를 감독회장으로, 임준택(서울남), 이철(동부) 목사를 연회감독으로 취임하다.
2013.10.16 총회실행위에서 임준택 목사(대림교회)를 감독회장 직무대행으로 선출하다.
2014.3.27 총회실행위에서 박계화 목사(함께하는교회)를 감독회장 직무대행으로 선출하다.
2014.4.21 전용재 감독회장 업무에 복귀하다.
2014.10.30~31 제31회 총회를 광림교회에서 전용재 감독회장의 사회로 열고, 여우훈(서울), 김연규(서울남), 김상현(중부), 홍성국(경기), 최재화(중앙), 김한구(충북), 안승철(남부), 이성현(충청), 김진흥(삼남) 목사가 10개 연회감독으로 취임하다.
2016.10.27.~28 제32회 총회를 불꽃교회에서 전용재 감독회장의 사회로 개회하고,  강승진(서울), 도준순(서울남), 윤보환(중부), 진인문(경기), 이광석(중앙), 최헌영(동부), 이병우(충북), 최승호(남부), 유영완(충청), 권영화(삼남) 박효성(미주특별) 목사가 11개 연회감독으로 취임하다.
2018.5.18 총회실행위에서 이철 목사(강릉중앙교회)를 감독회장 직무대행으로 선출하다.
2018.10.30.~31 제33회 총회를 계산중앙교회에서 개회하여 원성웅(서울), 전준구(서울남), 박명홍(중부), 김학중(경기), 김종현(중앙), 최선길(동부), 조기형(충북), 임제택(남부), 김규세(충청), 김종복(삼남) 은희곤(미주자치) 목사가 연회  감독 업무를 시작하다.
2019.1.30 전준구 감독 사퇴(1.19)에 따라 서울남연회 제1차 실행부위원회에서 감독직무대행에 김연규 목사(신풍교회)를 선출하다.
2019.4.8 남부연회 선거무효로 제8차 실행부위원회에서 안승철 목사(힐탑교회)를 감독직무대행으로 선출하다.
2019.6.18 선거무효 및 감독 사임에 따라 연회 감독 재,보궐선거에서 최현규 목사(서울남), 임제택 목사(남부) 당선되다.
2019.8.20 총회실행위에서 윤보환 목사(영광교회)를 감독회장 직무대행으로 선출하다.
2020.10.29 제34회 총회를 꽃재교회외 7교회에서 비대면으로 개회하고 윤보환 감독회장 직무대행의 사회로 이 철 목사(감독회장), 이광호 목사(서울), 김정석 목사(서울남), 정연수 목사(중부), 하근수 목사(경기), 최종호 목사, 양명환 목사(동부), 안정균 목사(충북), 강판중 목사(남부), 유명권 목사(충청), 황병원 목사(삼남), 박용호 목사(호남특별), 임승호 목사(미주자치)가 취임하다.
2022.10.27 제35회 총회를 광림교회에서 개회하고 이철 감독회장 사회로, 이용원 목사(서울), 채성기 목사(서울남), 김찬호 목사(중부), 박장규 목사(경기), 한종우 목사(중앙), 김영민 목사(동부), 박정민 목사(충북), 김동현 목사(남부), 김성선 목사(충청), 정동준 목사(삼남), 김필수 목사(호남특별), 이철윤 목사(미주자치)가 취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