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55강 A. 참 자랑거리[6:11-17]Ⓑ B. 축도[6:18] # 연재 끝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3-10-03 15:37
조회
126

※ 연재되는 필자의 주석책 「갈라디아서․에베소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사느냐 함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께 복종하여 그분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고(2:20), 그 십자가의 도를 방어하며 또한 사랑의 강권에 의해 선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전 9:16, 고후 5:14). 따라서 세상적인 것과의 관계는 끊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하였다.

[세상]은 코스모스(κόσμος)로서 ‘우주’ 또는 ‘세상’(요 1:9, 10, 롬 1:20, 딤전 6:7, 히 9:26, 요일 4:1), ‘모든 인간’(마 5:14, 눅 12:30, 요 1:29, 3:17), ‘하나님을 떠난 인간’ 또는 ‘하나님과 대립되는 불 신앙적인 삶’(요 3:16, 8:23, 18:36, 고전 1:20, 엡 2:2, 벧전 5:9, 벧후 2:5, 요일 3:13, 4:5) 등을 의미한다. 이 외에 ‘단장’, ‘화장’, ‘꾸밈’(벧전 3:4) 등의 뜻도 있다. 여기서는 주로 육체적인 욕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율법주의적인 삶을 의미하고 있다.

바울은 [세상] 곧 율법주의적인 삶의 원리와 자기 자신은 서로에 대해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저주받았다”(E. Huxtable)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둘 사이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빌 3:8). 이것은 바울 자신의 의지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다.

믿는 사람은 바울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2:20의 주석을 보라) 다시 살았으므로(고후 5:17), 세상 것이 아니라 위엣 것을 찾아 살아야 하는 것이다(골 3:1, 빌 3:14, 롬 12:2).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로 복음 곧 십자가의 도(고전 1:18)를 믿는 믿음의 세계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며”(5:6의 주석을 보라.), 다만 중요한 것은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인 것이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란 카이네 크티시스(καινὴ κτίσις)로서 ‘새 피조물’(AV), 또는 ‘새 창조 행위’(RSV)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의 피조물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에 의해 창조된 새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다(요 3:3, 5, 딛 3;5. 참조: 고후 5:17).➊ 이 새 생명은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며(2:20, 롬 7:4, 8:13, 고후 5:17, 딛 3:5, 벧전 1:23), 그 완성은 내세에 성취되는 것이다(롬 8:23, 고전 15:23, 44, 51:53, 살전 3:13, 빌 3:21, 골 3:4 등).

율법주의의 부당성을 논박하고 복음의 진리를 역설해 온 바울은, 이제 복음의 진리를 좇는 모든 이들에게【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고 있다.

[규례]는 카논(κανών)으로 곧은 막대를 가리켰으며, 여기서 목수의 자 또는 줄자를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비유적으로 행동의 규칙 및 원리(빌 3:16), 의무의 한계 또는 영역(고후 10:13, 15, 16) 그리고 정경의 뜻으로 사용된다.

이 구절의 경우에는 할례 또는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거듭난다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진리를 가리키는 것이다.➋ 또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에 대해, 헨리(M. Henry)는 “본문에서 그가 말한 규례는 넓은 의미에서 신앙과 생활의 완전하고 흠 없는 규례인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나 복음의 교훈이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도리, 또는 그가 조금 전에 말한 새로운 피조물에 관한 진리라고도 볼 수 있겠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이 규례를 따라 행할 자(스토이케수신, στοιχήσουσιν:행하다의 미래형)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에이레네, εἰρήνη: 5:22의 주석을 보라.)과 긍휼](엘레오스, ἔλεος) 곧 자비와 사랑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해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라는 설(J. A. Bengel, “Zahn”➌)이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➍은 모든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바울은 믿음으로 거듭난 자가 [하나님의 이스라엘](롬 9:6. 참조: 빌 3:3)이라고 함으로써, 할례를 받은 자가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을 공박하는 것이다.

끝으로, 바울은 “짜증스럽고 분개한 마음으로”(M. Luther)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고 하였다.

이 표현은 율법주의자들인 거짓 교사들만을 가리키는 것➎이 아니고, 복음의 진리에서 이탈하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만을 가리키는 것(W. Hendriksen)도 아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과 복음을 가짜라고 악선전하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로 갈라디아 교회의 신앙을 뒤흔들고 있는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아 복음에서 이탈하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 모두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서신을 쓴 후에는 그러한 짓들로 인해 자신과 자신의 일을 더 이상 괴롭히거나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바울은 권위 있게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고 설명하였다.

[흔적]이란 스티그마타(στίγματα)로서, 바늘 따위로 찔러서 만든 육체의 표적, 단순한 낙인, 소유의 표시로서 가축에 새겨진 표시, 도망하지 못하도록 노예의 이마나 손에 찍은 낙인, 신의 노예라는 표시로 찍은 낙인, 병졸이나 포로의 이마나 손에 찍은 낙인 등을 뜻하는 것이다.➏

여기서는 바울이 복음의 진리, 즉 그리스도를 위해 당한 핍박과 고난 때문에 몸에 생긴 상흔들을 의미하는 것이다(행 14:19, 롬 8:17, 고후 4:10, 6:5, 11:23-28, 빌 3:10, 골1:24). 이 상흔들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자 군사인 사도라는 하나의 증표이기도 하다.

[가졌노라]는 바스타조(βαστάζω)로서 무거운 짐을 진다는 뜻이다. 실로 사도직이란 영광인 동시에 무거운 짐이다(黑崎幸吉).
율법주의자들인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의 남근에 행해진 할례의 흔적을 자랑하였지만(5:13), 바울은 자신의 몸에 가해진 예수님의 흔적을 크게 자랑하는 것이다.

6:11-17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이 부분에서 본 서신의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직접 큰 글씨로 쓰고 있다. 그에 의하면, 율법주의자들(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 때문에 받을 유대인들의 핍박을 모면하고, 또한 할례 받게 한 것을 자랑하려는 속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심령 속에 성령을 모신 사도로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산다고 고백하였다. 그 이유는 죄와 죽음의 종인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정도로 타락한 인간의 잔악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심오하고도 원대하신 사랑을 바로 그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리스도에 의해 그와 죄악 세상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할례가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에 의해 새 생명을 얻는 일이다. 바울은 그 복음을 좇아 행할 자들과 참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끝으로,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위해 당한 핍박과 고난 때문에 생긴 몸의 상흔, 즉 그리스도의 군사이자 종인 사도라는 증표를 지니고 있으니, 이 서신을 쓴 이후에는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B. 축도[6:18]

바울은 이 서신을 축도로 끝낸다. 【18】[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 서신에서 볼 수 있는 축도 중에 성 삼위의 이름으로 빈 고린도후서의 축도(고후 13:13)가 가장 장엄하고, 그 밖에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공통적인 것은 [은혜](카리스, χάρις: 1:3의 주석을 보라.)를 비는 것이다.

이 축도에는 세 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 번째의 특징은 [형제들아]라는 호칭을 한 것이다. 이 사실은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을 여전히 사랑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➐ 이 점에 대해, 헨리는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이 그들에게서 받았던 부당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하여 품고 있었던 부드러운 사랑과 위대한 겸손을 보여 준다.”라고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의 특징은 [심령]에 축복을 빈 것이다(빌 4:23, 몬 25). “아마 갈라디아의 율법주의자들의 육체적 종교와 구별하기 위한 언급일 것이다”(Chrysostom,➑ J. A. Bengel).

세 번째의 특징은 아멘(ἀμήν: 1:5의 주석을 보라.)이 첨가된 것이다.
결국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부당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는 형제로 여겨 그들의 심령에(프뉴마토스, πνεύματος: 6:1의 주석을 보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도록 축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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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M. Luther, W. Hendriksen, 黑崎幸吉, 윤성범, 박윤선.
2) M. Luther, J. Calvin, E. Huxtable, W. Hendriksen, C. R. Erdman, 黑崎幸吉, 이상근. 참조: J. Wesley는 (1)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으로 삼는 것, (2)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 (3) 새로 지음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3) in 이상근
4) J. Calvin, M. Henry, H. Alford, J. B. Lightfoot, E. D. Burton, 黑崎幸吉, 박윤선, 이상근.
5) J. Calvin, E. Huxtable, R. T. Stamm, 박윤선, 이상근.
6) 참조:R. T. Stamm, E. Huxtable, 黑崎幸吉, 이상근.
7) E. D. Burton, E. Huxtable, W. Hendriksen, 박윤선, 이상근.
8)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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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273-278.

갈-엡.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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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03 15:38

    필자의 주석책에는 각주로 되었고, 주석되는 성경의 구절과 용어는 고딕으로 구분했는데, 이 인텨넷 화면에는
    그대로 표시되지 않으므로 각주를 미주로 바꿨고, 고딕을 부호 [ ]로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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