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활동
구한말 복음 선교와 사회구제사업 (1885-1910)

sub06_01_img감리교회는 개인 구원과 사회구원의 조화를 믿는 교회로서 그리스도인의 복음 체험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통해 복된 사회를 이루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를 추구하는 교회가 되고자 했다. 교회는 기독교 복음 선교가 시작된 19세기말 우리 민족의 사회적 요구에 따라 사회선교 및 의료, 구제 사업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였다. 이는 1884년 6월 미선교사 맥클레이 박사가 고종께 “병원과 학교사업”을 해도 좋다는 윤허를 받아냄에 따라 의사나 교사의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와 외래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을 제거하고 사랑과 봉사의 사역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감리교 최초의 의료선교사 스크랜턴은 1885년 9월 정동 사택에서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정부에서 ‘시병원(施病院)’을 지어 감리교 의료선교사업을 지원하였다. 1887년 10월 하워드에 의해 시작된 한국최초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은 의료사업을 시작한지 10개월만에 1137명을 진료했는데 대부분 빈민층이었다.

1890~1893년에는 서울 남대문과 서대문 밖 동대문에 시약소를 설치, 간의 의료사업과 복음의 구심점이 되어 상동, 아현, 동대문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외에도 평양에 광혜여원을 설치 소외계층을 위해 진료하였고, 해주에 구세병원, 원주에 서미감병원(현 원주기독병원), 개성에 남성병원, 원산의 구세병원을 설립하였고, 공주, 인천, 영변, 철원 등에 시약소 형태의 진료소를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의료혜택을 베풀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화학당(현 이화여대)과 정동교회(현 정동제일교회)를 통한 성탄절 구제사업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금을 모아 쌀지원 사업을 하였고 보호여회(여선교회)를 통해 복음전도, 친교사업 및 빈민구제사업을 하면서 경제적 자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후 애휼회가 조직되어 순수 빈민 구제사업 단체로 활약하였다.

일제시대 감리교 사회사업(1911-1945)

sub06_02_img1910년 일제의 정치적, 경제적 탄압에 따라 보다 복잡해진 사회상황에 맞추어 교회와 사회는 상호 협조하는 시대가 되었다. 즉 교회는 복음의 실천현장으로서 사회를 필요로 하고 사회는 보다 나은 삶의 실현을 위해 교회를 필요로 하였다. 이에 감리교회는 사회신경(Social Creed)를 통해 사회적 관심과 선교의식을 반영하였는데 이는 미국에서 남·북 감리교회로 전파되어진 감리교회가 1930년에 합동하면서 교리적 선언과 더불어 우리 상황에 맞게 개정되어 발표하였다.
이러한 사회신경이 발표와 더불어 감리회 중앙부서인 총리원(현 감리회 본부)안에 사회국을 설치하여 “기독교 정신에 따라 교회내외의 정치, 경제(농촌사업), 도덕, 습관, 교제의 개선과 교회내의 자선 및 교화기관을 유지 권장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특히 봉건적 사회구조 속에서 억압받았던 여성과 아동을 위한 사회복지를 위해 태화복지관(현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 및 여학교, 유치원을 열러 공중위생, 우유급식, 빈민아동을 위한 무료급식, 요리 및 재봉 강습소, 학생과 성인을 위한 구락부를 제공하였다. 계속해서 공주에는 진료소를, 공주에는 중앙영아원을 열어 미감리회의 도움으로 아동복지 사업외에 우유급식 및, 간호원양성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개성에 고려여자관을, 철원 여자사회관, 원산에 보혜여자관 및 여자성경학원을 열어 사회교육에도 힘을 썼다.

뿐만 아니라 시각장애자 및 고아원 사업 및 결핵퇴치운동을 벌였는데 시각장애인을 위한 맹인학교는 평양에서 선교사 홀 부인에 의해 시작되었고, 맹인의 세종대왕으로 알려진 강화출신 성도였던 박두성으로 인해 훈맹정음(訓盲正音)이란 한글점자가 완성되었다. 이와 더불어 한글점자성경과 찬송가를 완성하여 시각장애인들에게 커다란 용기를 주었다.

1935년 평양에 애린원을 세워 탁아사업 뿐만 아니라 빈민계층의 자활을 위한 종합적 사회복지 기관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홀 선교사 부인의 봉사와 더불어 그의 아들 셔우드 홀은 해주 구세병원에 의료선교사로 부임하여 결핵요양원을 설립하는 등 1928년에는 7,100여명이 넘게 혜택을 받게 되었다. 인천에서는 부인병원(현 인천기독병원)을 통해 의료사업을 확대하였다.

해방과 전쟁 직후 사회구제사업 (1946-1960)

sub06_03_img동서의 이념분쟁의 결과로 남북 분단과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감리교회도 3차에 걸쳐 교회분열의 아픔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사회복지 및 병원, 농촌 사업에 정진하였다.1946년 복흥파 연회의 사회사업은 구체적이었다. 즉 38선 이북에선 온 극빈자녀를 위해 헌금하여 보조하였고, 협동조합 조직사업과 전국연합회에 적극 가입하도록 권장하였고, 금주주간을 정하고 전국적인 금주 운동을 일으켰다.

1949년 통합연회 사회사업위원회에서 형무소목사파견, 농민학교개설, 농민강좌 추진, 산학교
에 농민지도과목 개설, 지방여자복지관 설립, 교역자 자녀 기숙사 설립 등이 거론되고 시행되었다.

정신적 교화와 자립갱생 사업을 위해 개성에는 소년교화소를, 공주에는 형제자매원을 설립 운영하였다. 1947년에는 개성에 복음고등공민학교를 세워 농촌지도자를 양성하였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사회를 위해 감리교회는 기독교 세계봉사회와 감리교해외구제위원회를 통해 들어온 복구 및 사회구호활동을 위한 원조를 받아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단체들의 원조로 말미암아 해외동포의 귀환선 마련, 전쟁미망인 지원, 전쟁불구자를 위한 의수족사업 및 재활사업, 결핵퇴치 및 농촌개발운동을 추진하였다. 미 연합장로회와 더불어 대전에 복음농민학교를 설립하여 농촌지도자를 양성하면서, 가축대여 및 양곡은행을 설립하여 경제적 자립을 위한 실질적인 사업을 실행하였다.

구제위원회를 통해 전쟁미망인을 위해 모자원 사업을 시행하였는데, 서울 마포에 성광모자원을 비롯하여 전국에 20여개의 모자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이와 더불어 고아원 및 양로원 사업을 위해 50여 기관을 지원하였다.

서울 동대문 부인병원은 이화여대부속병원으로, 새로 천안과 강화에 기독병원을 설립하였으며, 제주와 강릉에 진료소를 설립하였다. 사회복지관 사업을 확대하여, 서울의 태화기독교사회관을 비롯 인천기독교 사회관, 부산 기독교 사회관, 마포 기독교 사회관, 이화여대 사회관, 대전기독교 사회관, 군산기독교 사회관을 설립하였으며, 서대문에 남녀기숙사인 인우학사와 명덕학사를 설립하였다.

또한 경제적 자립을 위해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금융지원 사업 및 양곡은행을 통해 저리로 지원하였다.

현대이후 사회사업

sub06_04_img감리교회는 사회경제적 성장과 교세 성장을 바탕으로 사회사업을 비롯한 전반적인 선교사업에 구체적으로 사역하기 시작했다. 1968년 한국과 미국 감리교회의 온양선교정책협의회를 통해 동역자 관계를 설정하고, 미선교부의 재산을 한국감리교회에 이양하면서 사회복지법인을 설립을 논의할 목적으로 사회사업연합회를 결성하여 1974년에 사회복지재단 규약이 만들어졌다. 당시 노동운동을 전개하던 인천도시산업선교회를 지도하며 노동운동을 전개하던 오글 목사가 반정부 활동으로 추방당하고 감리교회의 분열로 어려움이 있었으나 추후 사회복지사업을 위한 운영독립권을 보장하는 정관을 만들어 사회사업유지재단 이사회가 구성되고, 1984년부터 사회복지법인이 출범하였다.
전쟁이후 윤락여성에 대한 지도계몽 사업을 실시하여 여성인권이 보호와 매매춘을 금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여선교회를 통하여 자립갱생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여성선교에 최선을 다하였다. 또한 60년대부터 도시산업화에 따른 산업선교는 인천산업전도회를 필두로 시작되어 그 목적은 1)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정립하며, 2) 노동자와 사용자간의 화해관계를 추구하며 3) 노동자의 권리와 복지를 위한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 노동선교사업은 계속되어 영등포, 성수동, 구로동 및 강원도 탄광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사역에 참여하던 목회자들은 노동자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인권회복 및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적 사회 개혁운동의 성격으로 확산되었다. 1980년대 들어 세계의 격변기에 돌입하여 동서대립이 무너지고, 선교100주년을 맞이하여 사회신경을 개정하였다.

 

sub06_04_img01새로 제정된 감리회 사회신경은 생태계 환경, 가정과 성윤리, 자유와 인권, 평등과 정의, 노동과 분배 정의, 사회복지, 도덕성 회복, 생명공학, 타종교 협력, 평화통일, 세계 평화 등 오늘 한국과 인류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 신앙과 실천으로 다가가도록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들어서 독자적인 사회복지관을 설립 운영하거나 지역단체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등 사회선교 사업의 영역을 확대하였다. 사회사업의 확대에 따라 평신도국이 사회평신도국으로 확대되었으며, 사회복지 사업을 사회복지법인 감리회 사회관 재단과는 별도로 현 감리교 주안원로원 부산부녀복지관, 내리양로원을 기본재산으로 사회 복지재단을 추진하여 1995년 12월 창립이사회를 개최하였고, 1996년에 보건복지부로부터 사회복지재단으로 설립인가를 받았다.국가정보화 사업에 따라 보건부의 지원으로 인천 사회복지선교회(구 도시산업선교회)에 감리교 사회복지정보센터를 설립하여 인터넷 서버를 통해 감리교 사회복지정보를 위한 데이어베이스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이덕주 목사 – 한국 감리교회의사회복지 봉사사역의 역사-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