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49강 E. 영과 육의 갈등[5:16-26] Ⓒ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3-08-02 13:59
조회
98

※ 연재되는 필자의 주석책 「갈라디아서․에베소서」


[오래 참음]은 마크로튀미아(μακροθυμία)이며, 문자적으로는 μακρός(‘긴’, ‘오랜’)와 θυμός(마음)의 합성어로 ‘오래 참는 것’을 의미한다.

바클레이(W. Barclay)는 {근원적 의미는 사람에 대해 참는 것이다. 사람에 대하여 매우 참을성이 강하여 불쾌하거나 심술궂거나 잔인한 대우에 대하여 고통을 느끼지 않고, 가르칠 수도 없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에 대해 실망하지 않고, 미련한 것에 대해 성내지 않고, 미움에 대해 사랑이 결코 변질되지 않는 특성을 가진 마음과 생각이다. 이 말은 사람에 대한 인내심과 신뢰와 희망을 결단코 잃지 않는 정신을 의미한다}(골 1:11의 주석).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이 낱말은 역경이나 비난 또는 피해 등에 대해 오래 참는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자비]는 크레스토테스(χρηστότης)로서 ‘탁월’, ‘선’, ‘유용’, ‘정직’, ‘친절’(롬 3:12, 갈 5:22, 골 3:12, 딛 3:4), ‘자비’(엡 2:7) 등을 의미한다. 또, 이 말은 다른 사람에 대한 온화하고 부드럽고 관대한 태도를 뜻하기도 한다.

[양선]은 아카토쉬네(ἀγαθωσύνη)로서 ‘번영’(전 5:10, 17), ‘친절’(삿 8:35, 9:16), ‘의’(시 38:20), ‘선’(롬 15:14, 엡 5:9, 살후 1:11)등의 뜻이다.

[자비](크레스토테스)와의 차이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는 “자비가 단지 도와 주는 것을 뜻하는 데 비해, 양선(아가토쉬네)은 적극적인 의미의 선, 즉 견책이나 교정 또는 훈련을 통해 돕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충성]은 피스티스(πίστις)로서, 본래 ‘신실성’(마 23:32, 롬 3:3, 딛 2:10)을 뜻했으며, 여기서 인간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믿는 특수한 형태의 믿음(롬 12:3, 6, 고전 12:9, 13:2)을 뜻하게 되었다.

이 구절의 경우는 믿음(AV. J. A. Bengel)이라기보다는 신실성)➊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온유]는 프라오테스(πραότης)로서, 고전 헬라어에서는 본래 순한 말(馬)을 표현했고, 나아가서 사람을 대하는 부드러운 태도를 가리켰다(이상근). 아리스토틀(Aristotle)은 프라오테스를 정의하여 “지나치게 노여워하는 것과 지나치게 노여워하지 않는 것 사이의 중용이며, 반드시 노해야 할 때만 노하고, 노해서는 안 될 때 노하지 않는 사람의 자질”➋이라 하였다.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순종(마 5:5, 11:29, 21:5), 겸손하게 잘 배우는 태도(약 1:21), 사려 깊음(고전 4:21, 고후 10:1, 엡 4:2) 등을 의미하였다.

온유한 인간이란 연약한 자가 아니라 오히려 강한 자이다(참조: 마 11:29). 강한 힘이 없는 사람은 억압과 박해 아래서 온화하고 친절할 수 없는 것이다.

[절제]는 엥크라테이아(ἐγκράτεια)인데, 플라토(Plato)는 ‘극기’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➌

바울은 내주하신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 육체의 일들을 제어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전 9:25, 7:9). 앞에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열거한 바울은,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고 말한다. 율법(양심)이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그들의 죄와 죄책과 심판을 인식시키기 위해 주신 것이므로(딤전 1:9-10), 성령의 역사에 대해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를 금지하거나 정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성령의 열매란 율법의 모든 규례와 규칙 이상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 자신의 말대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면 율법 아래 있지 않는 것이다(18절).

육체의 일들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하여 열거했던 바울은,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나(5:6), 성령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나(16절),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18절. 참조: 롬 8:9, 10)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므로(롬 6:6, 갈 2:20), 육체와 그 육체의 작용인 욕심과 욕정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아들의 영(성령)을 받은 새 생명이 된 것이다(고후 5:17, 요일 5:12).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아직 완전한 구원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 것이 아니며, 더욱이 “죄에 대해 완전히 승리한 것도 아니다”(M. Henry, R. C. H. Lenski, C. R. Erdman).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역사에 순종함으로써, “육체를 그 타락한 욕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우리의 계속적인 관심사로 삼아야만 하는 것이다”(M. Henry, R. C. H. Lenski).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권면하였으며, 또한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근본 원칙을 말한 바울은, 그 자신을 포함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25】[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부터 6장에 소속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으나,➍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적합하다.

우리의 육체와 그 욕심과 욕정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성령 안에서 또는 성령에 의해서 새로운 영적 생명을 얻은 것이다(2:20, 고후 5:17, 롬 8:9-10. cf. 롬 7:4, 골 3:1). 따라서 우리가 성령으로 산다면 ‘열을 지어 행진하는 것’(스토이코멘, στοιχώμεν)처럼 성령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바울은 금해야 될 것에 대해, 【26】[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헛된 영광](케노독소이, κενόδοξοι)의 [영광]은 1:5의 주석을 보라.

칼빈(J. Calvin)은 “이교도의 철학자들은 영광을 구하는 모든 욕구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영광을 공허하고 헛된 야심이라고 비난한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영광은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원한 영광이지(골 3:4, 벧전 5:10), 이 세상의 영광이 아니다.

육체를 좇아 행하는 자들은 이 세상의 헛된 영광을 구하느라고 서로 [격동하고](프로칼루메노이, προκαλούμενοι), 즉 싸움을 일으키고 [투기](21절의 주석을 보라.)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되는 상대에 대한 격동과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되는 상대에 대한 투기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다.

5:16-26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인 내부의 성령의 갈망과 육체의 욕심 사이의 갈등을 보여 주고 있다. 성령의 갈망은 하나님 위주의 삶을 추구케 하는 것인 반면에, 육체 곧 죄된 인간 본성의 욕심은 자기 위주의 삶을 추구케 하는 것이다.

이 둘이 서로 대적하여 두 소욕 중 어느 하나도 성취되지 못하게 한다. 그 이유는 성령의 힘과 육체의 힘이 대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신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자유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사랑의 종노릇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행함으로써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제어할 수 있으며, 또한 율법 이상의 것을 성취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바울은 열 다섯 가지의 육체의 일들을 열거하면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또, 그는 대조적으로 율법이 금지하거나, 정죄할 수 없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열거한다.

끝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육체와 함께 그 욕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라 한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구원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 것은 아니며, 더욱이 죄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얻은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계속적인 관심사로 삼아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의해 영적 생명을 얻었으므로, 성령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헛된 영광을 구하느라고 서로 싸움을 걸거나 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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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M. Luther, J. B. Lightfoot, E. D. Burton, “Vincent”(in 이상근), RSV, NEB.
2) in W. Barclay.
3) 상동.
4) “H. A. W. Meyer”(in 이상근), F. Rendall. 참조: “Lipsius, Weizsäcker는 26절부터”(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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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247-252.

필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6권/ 기타 다수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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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02 14:02

    필자의 주석책에는 각주로 되었고, 주석되는 성경의 구절과 용어는 고딕으로 구분했는데, 이 인텨넷 화면에는
    그대로 표시되지 않으므로 각주를 미주로 바꿨고, 고딕을 부호 [ ]로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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