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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주님 대접 : 마르다의 주님 대접과 마리아의 주님 대접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3-07-09 19:18
조회
388
<누가복음 10:38-42>

38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1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 시작하는 말

초등학교 시절의 어느 날, 오후반이라서 혼자 30분쯤 걸리는 학교에 가고 있었는데, 저만치 앞서 가는 친구가 보였습니다. 반가운 나머지 큰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지만 반응이 없었습니다. 더 큰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면서 같이 가자고 했는데도 반응이 없었습니다. 같이 가면 친구도 심심하지 않아서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더욱 큰 목소리로 “얌마, 귀먹었냐? 같이 가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힐끗 돌아보더니, 그냥 앞만 보고 가는 겁니다. 기분이 상한 저는, 친구의 이름을 연거푸 부르면서 전심전력을 다해 달려갔습니다. 앞만 보고 가는 친구의 등을 손바닥으로 탂 치면서 “얌마, 왜 모른 척해?”라고 했습니다. 순간 그 친구가 고개를 돌렸는데, 모르는 애였습니다. 헛다리짚은 겁니다. 얼마나 무안했는지 모릅니다. 다른 길로 가자니 늦을 것 같아서 그냥 가는데, 참 멋쩍었습니다.

2. 자기 본위와 자기 위주로 주님을 대접한 마르다

성경 본문은, 마르다가 전심전력을 다해서 예수님을 대접한다고 했지만, 완전히 헛다리짚은 내용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갈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2마일 떨어진 베다니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마르다의 성격은 활동적이며 적극적이며 능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충동적이었습니다. 사람은 생긴 대로 하게 마련인 것처럼,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에도 역시 마르다이었습니다. 주님을 대접하느라 이것저것 준비하는 일이 많아서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고 나르고 차리는 등 손님 접대를 위해 준비하는 일이 많아서 마음이 분주했던 마르다처럼, 복잡한 현대에 사는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바쁩니다. 아이들도 학교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 학원으로, 이 학원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 학원으로 엄마들의 자가용을 타고 다니지 않습니까? 막간엔,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하느라 바쁘지 않습니까?

바쁠수록 더욱더 진지하게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정말 바쁠 만한 일로 바쁜 것인가, 정말 바쁠 만한 가치가 있는 일로 바쁜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으므로, 주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는 때때로 자문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내가 정말 분주할 만한 일로 분주한 것인가?’ ‘주님이 보시기에, 이 일은 정말 바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어떤 교인들은 너무 바빠서 교회 예배에 참석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정말 예배를 빠질 만큼 바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을 최대한으로 대접하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느라 몸과 마음이 바쁜 마르다의 눈에, 아주 못마땅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여동생인 마리아가 주님의 발아래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겁니다. 그 바쁜 와중에 돕지는 않고, 그림처럼 앉아서 한가히 말씀을 듣고 있으니 얼마나 얄미웠겠습니까?

화가 난 마르다는 주님께 나아가,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마리아를 데리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대해서도 불평을 터뜨린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 여동생 마리아에게 자기를 도와주라고 명령해 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주님의 처사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지시를 내린 것입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하는 자신의 태도가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히 주님을 향해 불만 섞인 지시를 한 것입니다. 마르다는 주님께 한 자신의 지시가, 얼마나 모순되고 어리석은 말인지를 몰랐습니다. ‘주여’라는 호칭은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또는 ‘나는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라는 뜻을 내포하는 것인데, 이 경우에 마르다는 자기도 모르게 주님의 주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지시를 들으신 주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하기 위한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주님의 생각에는 그 많은 일이 염려하고 근심할 가치가 있는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마르다가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자기 본위와 자기 위주의 수고를 하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일들로 분주하게 사는 인생은, 설령 그 일들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자신도 만족한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대접은, 몇 가지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결정적인 대접은 한 가지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복음 곧 성령을 좇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말씀을 순종하는 성결한 삶과 영생의 구원을 얻는 진리를 들려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3. 주님 본위와 주님 위주로 주님을 대접한 마리아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의 주님 대접은, 언니인 마르다와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성격의 소유자이었고, 보다 더 값진 것, 보다 더 중요한 것, 보다 더 먼저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여 행할 줄 아는 매우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만 가지 일을 다 제쳐놓고, 주님의 발아래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마리아가 자신의 발 곁에 앉아서 열심히 배우는 것을 용인하고 격려하는 것은, 율법의 박사라 할 수 있는 랍비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의 유대교의 선생들은, 대체로 여인들이 배우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한 음식 준비에 분주한 마르다가 아니라, 주님의 발아래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한 마리아가 칭찬받은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0:28을 보면, 인자 곧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한 것이고, 죄로 인해 지옥의 멸망을 당할 인류를 구원하는 대속 제물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주님을 잘 대접하는 것은 좋은 음식물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인 영생의 진리를 듣고 받아들여 행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주님의 뜻과 마음에 합당한 대접입니다. 최고의 손님 대접은 자기 본위나 자기 위주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 본위나 손님 위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가장 잘 대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십 년 전에, 미국에서 목회하시던 어느 목사님의 글입니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 공항에서 이용했던 택시의 기사님이다. 함박 미소와 친절함으로 나를 대해 주었다. 몸에 배어 있는 친절함이었다. 그에게 살짝 물었다. ”불경기인 요즘 택시 운전이 즐겁고 행복하신가요?“ ”그럼요, 이 일이 신나고 즐겁습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2주 후, 모국여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날, 다시 그분 택시를 이용했다. 그는 지난번처럼 또 친절했다. 그에게 물었다. “운전이 여전히 즐거우시죠?” 그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아니요. 지금은 즐겁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며칠 전 세상을 떠나셨어요.” “아니, 그런 상황인데 손님을 여전히 친절하게 대하시는군요.” “그야 승객분들은 아버지가 세상 떠나신 것에 하등 관계가 없기 때문이죠. 제가 슬프다고 손님들에게 불친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혹시 주님에 대한 우리의 대접이 주님 본위가 아니라, 우리의 기분 위주는 아닙니까? 우리의 주님 대접이 주님 위주가 아니라, 우리 위주는 아닙니까?

모든 사람이 주님을 잘 대접하는 것은 마리아처럼, 결정적인 한 가지인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이며 목적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리아가 이 좋은 편을 택했으므로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주님께 대한 최고의 대접인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은 죄 사함과 성결한 삶과 영생의 구원을 얻는 길일뿐만 아니라, 값지고 보람된 삶을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적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고, 창조의 원동력이고, 영적 싸움의 검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7을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보다 더 우선적이고, 더 가치 있고,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중요한 일인 주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무의미해질 많은 일들에 얽매여 염려하고 근심하며 분주하게 살고 있습니다.

4. 맺음말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은 아랑곳없이, 이기적이며 세상적인 욕망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결국은 멸망입니다. 둘째, 마르다처럼 일단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주님의 뜻과 말씀은 아랑곳없이 자기 본위와 자기 위주로 대접하며 사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인들은 아슬아슬하게 구원을 받을지는 모르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는 못합니다. 셋째, 마리아처럼,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주님 위주와 주님 본위로 대접하며 사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모든 사람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그의 복음 곧 영생의 진리를 청종하는 것입니다.

(설교 동영상 : 유튜브)
설교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6권/ 기타 다수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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