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53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2-02-13 13:06
조회
812
7. 베드로의 신앙 고백[8:27-30]

<비교: 마 16:13-20, 눅 9:18-21>

불트만(R. Bultmann)은 이 전승을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을 나타내는 ‘믿음에 의한 전설’이라고 하여, ‘역사적 설화와 전설’의 부분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 전승의 본래의 결말은 마태복음 16:17-19이었으나, 마가는 바울을 대표자로 하는 헬레니즘적 그리스도교에 서서 베드로를 대표자로 하는 유대교적 그리스도교의 입장과 논쟁하기 위하여 이 결말을 바꾸어 버렸다고 주장하였다.1) “이에 대하여 데라는 이 전승은 이 사건에서 별로 시간이 경과하지 않고 되어진 증거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하는 지명이 명시되고 있는 일(불트만은 이 지명은 앞의 22-26절의 기사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데라는 별로 지명을 들지 않는 마가가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고 말하여 반론한다.), 베드로에 관한 생생한 묘사, 베드로를 엄하게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33절) 등을 들고 있다. 비록 초대 교회에 있어서 베드로와 바울 양 파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고 하여도 존경받고 있던 베드로에 대하여 초대 교회의 누구가 ‘사단’(33절)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 것인가? 이상의 점에서 이 전승은 베드로의 체험에 의한 추억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된다”(山口 昇).
마가는 이 기사를【27】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쌔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로 시작한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코넬리우스 아 라피데(Cornelius àLapide)에 의하면, 본래는 두 개의 작은 시내인 제오(Jeor)와 단(Dan)이 합쳐지는 곳인 단(Dan)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렇게 합쳐진 두 개의 작은 시내가 요단강을 이루므로 제오단 강(Jeor Dan), 혹은 요단 강(Jordan)이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그러나 양치는 사람들이 섬기는 신인 판(Pan)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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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p. 32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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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보다 이방인들에게 더 잘 알려졌으므로, 이방인들에 의해 파네아스(Paneas)라고 불렸다. 오늘날에는 바니아스(Banias)라고 불려진다.1) “그것은 언덕 꼭대기에 그리스의 자연의 신인 판(Pan)의 출생지로 전해진 동굴이 있었기 때문이다”(W. Barclay).
“이 지역을 분봉왕 헤롯 빌립이 확장하고 미화한 후에, 자신과 로마 황제를 기념하여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새 지명을 붙인 것이다”(E. P. Gould). 이 “가이사랴 빌립보는 지중해변에 있는 가이사랴(행 23:33)와 다른 곳으로, 메론 호수와 헤르몬 산 중간에 위치하여 성지에서 가장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이상근).
예수님께서 이 지역에 오신 목적에 대해, 슈바이처(E. Schweizer)는 “이 땅의 유대와 이방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버려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할 것인가 결단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빅켈스테트(E. Bickersteth)의 추측이 보다 더 그럴듯하다. 그는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이웃해 있는 많은 이방인들, 특히 베니게인들이 살았다.······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같이 가르치시기에 좋은 기회일 뿐만 아니라, 유대 지역에서보다도 메시아에 관해 더욱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방문하신 것 같다.”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하신 목적에 대해 (1) 29절의 보다 더 개인적인 질문을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설(W. L. Lane, W. W. Wessel, 山口 昇), (2)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설(A. E. Sanner, 黑崎幸吉), (3) 제자들을 순수한 신앙으로 확고하게 세워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곧 알게 되는 것과 같은 많은 견해들 사이에서 혼동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설(J. Calvin, E. Bickersteth) 등이 있다.
세 가지 설이 다 서로 연관되는 것이지만, 세분하면 앞의 두 설은 일차적 목적이라 할 수 있고, 맨 끝 설은 궁극적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질문을 들은 제자들의 대답에 대해, 마가는【28】여짜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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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E. Bickerste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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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마태복음에는 예레미야가 첨가되어 있다(마 16:14). 어쩌면 마가는 그를 선지자 중의 하나에 포함시켰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제자들은 예수께 대한 여론 중에서 좋은 면만을 보고한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에 대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혹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 11:19), 혹은 미친 사람(3:21), 혹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는 자(3:22) 등의 악평이 있었다. 아마 일부의 여론이어서 뺀 것 같다.
세례 요한은 1:4-8의 주석을 보라.
엘리야는 6:15의 주석을 보라.
선지자 중의 하나는 다시 올 것이라고 예언된 선지나(신 18:15)나 이사야 선지자(II Esd. 2:18)나 예레미야 선지자나(마 16:14) 에스라 선지자(II Esd. 14:9) 중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이런 대답을 했던 것으로 미루어 일반 대중이 예수 그리스도를 탁월한 하나님의 사자로 믿었거나, 과거에 죽었다가 예수라는 인간으로 다시 살아난 어떤 존재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는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눅 9:19)라고 기술함으로써 이 사실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라고 설명하였다. 헨리(M. Henry)도 “모두가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난 자라고 동의했다.”라고 비슷한 견해를 표명하였다.
그러한 유대인들의 예수께 대한 이해는 전적으로 왜곡된 이해에 불과한 것이었다. 웨셀(W. W. Wessel)은 “제자들의 대답 중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귀신들조차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며, 그 사실을 공공연히 외치지 않았는가(1:24, 3:11, 5:7)! 그런데도 그토록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이해를 질문하신 것과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 마가는【29】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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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라고 하였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위의 견해들에 대한 경계성 질문인데, 특히 원문에는 너희는(휘메이스, ‘Υμείς)이 강조되었다.
여기서 베드로(1:16의 주석과 3:16의 주석을 보라.)는 열두 제자의 대표 격으로(W. L. Lane, W. Hendriksen, 山口 昇) 그들을 대변하고 있다(E. Bickersteth, W. W. Wessel, D. W. Burdick).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해 마태는 “주(수, Σὺ: ‘당신’)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로, 누가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눅 9:20)로, 마가는 ‘주’(7:28의 주석을 보라.)는 ‘그리스도’(1:1의 주석을 보라.)시니이다로 기록하고 있다. “마태의 기록은 신앙 고백적으로 가장 상세하고, 누가의 기록은 종합적이며, 마가의 기록은 원형적이다”(이상근).
베드로의 신앙 고백인 그리스도관 곧 메시아관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의 메시아관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다.
가장 보편적인 메시아관은 다윗의 자손에게서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나타난다고 하는 기대이었다(삼하 7:12, 시 18:50, 89:19-37, 132:11, 12, 사 9:6, 7, 11:1-5, 암 9:11, 12). 이 기대는 중간 시대에도 계승되어 마카비 시대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레위족에게서 제사장이자 왕인 메시아가 나온다는 기대가 높아졌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도 의연히 존재하고 있었다(솔로몬의 시편 17:5-8, 23-28, 18:6-8). 쿰란 공동체에서는 두 메시아인 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아와 왕으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교단 교류 계율 9:11). 예수님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다윗의 왕국을 회복해 주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 메시아는 지상에 다윗의 왕국을 정치적으로 확립하는 인물이며,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인물로 생각되고 있었다.1)
위와 같은 메시아관들은 뒤이어 밝혀질 예수님의 정체인 고난의 메시아(31절)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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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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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인지, 아니면 위의 메시아관들 중 어느 한 가지를 따른 것인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레인(W. L. Lane)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와 이스라엘의 소망들의 실현을 특징짓는 하나님의 임명을 받으신 대행자이심을 인식한 것이었다.”라고 하였고, 바클레이(W. Barclay)도 “베드로는 십자가를 향해 나가시는 나사렛 출신 순회 교사가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발견하였다.······그 대답과 더불어 예수님은 자신이 실패하지 않았음을 아셨다.”라고 하여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올바른 이해에 근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로 {웨슬리(J. Wesley), 반즈(A. Barnes), 힐(D. Hill), 슈바이처(E. Schweizer), 黑崎幸吉}(마 16:16의 주석), 마경일, 이상근 님이 있다.
이와 같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올바른 메시아관으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의 출처가 밝혀진 마태복음 16:17-18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로 뒷받침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고백한 그 자체에 국한된 것일 뿐이지, 예수님의 메시아성까지 깨달은 것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베드로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안 것이지,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본질과 역할을 안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9:32, 눅 9:44-45).1)
이 점은 뒤이어 예수께서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8:30. 참조: 마 16:20,2) 눅 9:213))와 예수께서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본질과 역할의 특징인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을 때에 베드로가 강력하게 만류하다가 혹독한 책망을 들은 사건(8:31-33,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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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마가복음 9:32의 주석과 누가복음 9:44-45의 주석을 보라.
2) 필자의 마태복음 16:20의 주석을 보라.
3) 필자의 누가복음 9:21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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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231))과 고난의 메시아로서 고난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한 사실 등으로 분명해진다.
베드로가 정말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이신가를 알았다면, 즉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알았다면,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받아들였을 것이고, 또한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이며 군사적이며 현세적인 의미를 갖는 유대교의 영광의 메시아로 오인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회만 있으면 예수님이 세계를 지배하는 메시아 왕국의 왕으로 등극하실 때,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해 가끔 논쟁을 벌이곤 하였다(참조: 9:33-35, 눅 9:46-47, 22:24-272)).
물론,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에게 그 사실을 알게 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수준으로 완벽하게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인간 세계에서도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의 이해 정도가 서로 다르다. 아무리 탁월한 제자라도 스승의 수준으로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米田豊과 데이비스(J. N. Davies)는 “베드로는 아직 옛 대중적인 메시아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라고 하였고, 스테벤즈(J. D. Stevens)도 “그의 참 정체를 인식한 것 같지만, 다른 유대인들과 같이 그들도 군사 지도자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혼동은 남는다.”라고 하였고, 산너(A. E. Sanner) 역시 거의 같은 의견을 표명하고 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의 죽음과 부활 후에 비로소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알게 되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적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서, 마가는【30】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라고 하였다.
산너(A. E. Sanner)는 “베드로의 이 표현에 대해 예수께서는 기뻐하시기는 하면서도(마 16:17), 어찌하여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라고 경계하셨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신 또 다른 이유에 대해서는 1:43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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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마태복음 16:21-23의 주석을 보라.
2) 필자의 누가복음 9:46-47, 22:24-27의 주석을 보라.

출처: 저자의 newrema.com의 ‘마가복음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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