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5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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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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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1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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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
2. 예수의 변화[9:2-8]

<비교: 마 17:1-8, 눅 9:28-36>

슈바이처(E. Schweizer)는 “이 전승에 관한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라고 단정하였다. 불트만(R. Bultmann)은 여러 학자들1)의 견해를 좇아 이 전승은 부활 설화가 전설적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하였다.2) 그러나 山口 昇은 “예수님의 부활의 현현 설화는 모두 먼저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던 일이 기술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처음부터 예수님이 존재하고 계신다고 하는 점에서 반론이 되어진다. 더욱이, 부활의 현현 설화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말씀하신 일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시종 침묵을 지키고 계신다. 또한, 이 전승에 있어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지만, 부활의 현현 설화에 있어서는 예수님 이외에는 천사가 나타날 뿐이고, 이와 같은 구약의 인물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점들로 보아 역시 이 전승은 부활 설화와 종류를 달리하고 있어, 불트만(R. Bultmann)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라고 논박하였다. 슈바이처(E. Schweizer), “에벨링(H. J. Ebeling), 퍼키(E. Percy), 로마이어(Lohmeyer) 등도 이 변형 사화가 원래의 부활 보도라는 데 반대한다.”3)

리젠펠트(H. Riesenfeld)는 사실에 대한 연구를 단념하면서, 설화의 배경을 주제사적 관점에서 어떤 메시아 등극식의 제의적‧종말론적 도식으로 해석하고 이 등극식이 예수에 적용된 것이라고 보며, 또 그 보도는 이 등극식을 부분적으로 앞당겨 서술한 것으로 해석하는데, 이 등극식의 완성을 위해서는 아직 수난과 종말적인 ‘안식’에 들어가는 일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는 유대적 메시아 등극식과 예수의 변형이 초막절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4) 이러한 주장에 대해 山口 昇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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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ellhausen, Loisy 해당 구절, Bousset, G. Bertram, K. G. Goetz, M. Goguel, O. J. F. Seitz, Morton S. Enslin”(in R. Bultmann, op. cit., p. 323의 주 58).
2) Ibid., pp. 322-323.
3) in Ibid., p. 323의 주 58.
4) 참조: Ibid.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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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 후에”라고 하는 표현은 출애굽기 24:16과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제사장이 성전에 있어서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일수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또, 불트만(R. Bultmann)은 리젠펠트(H. Riesenfeld)의 개체 주제의 분석은 환상적인 것이 많고, 유대적 메시아 등극식과 예수의 변화가 초막절과 관련되어 있다는 그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반박하였다.1)

슈바이처(E. Schweizer)는 “아마 이 전승은 예수님의 오심을 종말의 시작으로 해석한 교회에 의해 묵시적 색깔로 묘사된, 세 제자들의 경험(혹은 환상이라 할지라도)에 대한 설명인 것 같다.”라고 하였다. 山口 昇은 더욱 구체적으로, “이 전승은 역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환상 중에서 일어난 사실이냐 그렇지 않으면 환상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일어난 일이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마태복음 17:9에 ‘본 것’이라는 표현이 있으므로 환상 중에 일어났다고 하는 견해도 성립된다. 그러나 ‘환상’이라고 번역된 호라마(ὅραμα)는 ‘환상’이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나 동시에 보통 방법으로 본 것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마가복음 9:9의 ‘본 것’(하 에이돈, ἅεἶδον), 누가복음 9:36의 ‘그 본 것’(혼 헤오라칸, ὧν ἑώρακαν)과 같은 의미로 취할 수가 있다. 어느 것으로 하든지 스위트, 데라, 크랜필드 등은 분명히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취하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빅케스테트(E. Bickersteth)와 웨셀(W. W. Wessel)도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마가는 이 기사를【2】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로 시작한다.

엿새 후에(마 17:1)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첫 번째 수난 및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와 제자의 도를 말씀하신 지(8:27-9:1) 엿새 후라는 뜻이다.2) “이 명백한 기간에 대한 언급은 출애굽기 24:16 이하를 회상시켜 준다. 거기서 육 일 동안이란 계시를 받아들일 준비를 위한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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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Ibid.
2) W. Hendriksen, W. W. Wessel, 山口 昇,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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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리켰다. 마가는 예수님의 다가오는 고난에 대한 선언을, 그리스도의 참된 성격의 노출을 증거하기 위해 요구된 준비로 간주하고 있다”(W. L. Lane).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누가의 기록에는 “팔 일쯤 되어”(눅 9:28)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일수 계산법이 정확하지 않았다는 점(E. P. Gould)과 누가의 기록이 엄밀히 팔 일이 아니라 팔 일쯤으로 된 점을 볼 때 서로 모순된다고 할 수 없다. 팔 일간이자 만 육 일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예수께서 ‘베드로’(1:16의 주석을 보라.)와 ‘야고보와 요한’(1:19의 주석을 보라.)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세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 가장 큰 제자들로서 중요한 사건, 즉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5:37)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사건(14:32) 등에 동반되었다.

예수께서 아주 중요한 일에 이 세 제자만을 동반하신 것은 편애가 아니라, 이들이 보다 잘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더욱 충분히 받아들이고, 더욱 쉽게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참조: 5:37, 14:32, 마 26:37).

높은 산이 어느 곳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초대(Cyril of Jerusalem, Jerome 등) 이후 16세기까지의 전설은 다볼 산(Tabor)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다볼 산은 예수님이 계셨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상당히 먼 곳이었다. 둘째, 유세비우스(Eusebius, 「유대 전기」 VI 1:8)에 의하면, 당시 정상에는 요새가 있었다. 셋째, 다볼 산은 높이가 약 560m밖에 안 되므로 높은 산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학자들1)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가깝고, 높이가 약 2743m이며, 정상에 눈이 덮여 있는 헐몬 산(Hermon)으로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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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 Henry, E. P. Gould, E. Bickersteth, D. W. Burdick, A. E. Sanner, W. Barclay, J. H. Burn, “Cranfield, Dalman, Carr, Johnson 등”(in 이상근), 山口 昇, 이상근,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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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에 올라가신 목적은 기도하시기 위한 것이다(눅 9:28). 이것은 변형이 산행의 목적이 아니라, 기도에 따른 사건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눅 9:29).

높은 산은 하나님의 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을 회상시킨다(출 24장: 시내 산, 왕상 19장: 호렙 산). 거기서 모세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영광의 환상을 보았다. “예수께서는 지역 선택에 있어서 단순히 한적한 곳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제자들의 느낌과 생각들을 그 시간의 때의 의미에 더 가깝게 이끄시기 위해 구약의 광야 전승에 있어서 산의 환기시키는 의미를 사용하였다”(W. L. Lane).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의 변형되사는 메타모르포테(μεταμορφώθη)이며 ‘본질 또는 내적 본성에서 변화되었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이곳 외에 로마서 12:2과 고린도후서 3:18에만 나타나는데, 전자는 인격 또는 심성의 변화를 의미하고, 후자는 마지막 때에 신자가 그리스도의 영광의 형체와 같이 변화되는 실제적 변화를 의미한다. 다니엘 12:3에서는 종말의 때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라고 하였고, 다른 묵시문학에서도 그와 같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에녹서 38:4, 104:2, 제 2 에스드라서 7:97).

여기서의 예수님의 변형은 “외모의 피상적 변화가 아니라 본질적 형체의 변화이다”(D. W. Burdick). 이 변형의 발원은 외부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숨겨진 내적 생명이다. 이 영광스런 변형은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한 그 자신의 신적 영광의 발현이다. 그러나 온전한 발현이 아니라, 세 제자들이 지각할 수 있을 만큼의 발현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재림 때의 영광의 발현의 예표”(米田豊), 또는 부활이나 “재림 때의 영광과 비슷한 것”(黑崎幸吉)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1)

이 영광의 변형에 대해, 고울드(E. P. Gould)는 주목할 만한 설명을 하고 있다. “변화의 육체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데서 비롯된 정상적인 견해를 따르면, 변형은 예수님이 자신의 낮추심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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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Barclay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는 8월 6일을 변형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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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 존재이셨음을 보여 주는바 둘러싸인 어두움 한가운데서의 주의 참된 영광의 빛이었다. 그러나 우리 주 자신의 견해에 따르면, 그 피상적 세상성에 반하여 자신의 영광이 낮춤과 죽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낮춤과 죽음 자체였다는 것을 확립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었다.”
이어서 마가는 예수님의 옷의 변화에 대해,【3】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변형에서 비롯된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세상에서······희어졌더라라는 세상적인 것과 대조되는 천적 백색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예수님이 천적 존재이심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때, 나타난 인물들에 대해, 마가는【4】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이라고 하였다.

엘리야가 모세보다 먼저 언급된 것은 본서의 특징이다. 마태와 누가처럼(마 17:3, 눅 9:30), 모세를 먼저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마가 나름의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엘리야가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선구자라는 점(말 4:5-6)을 강조하기 위한 것 같고,1) 또한 “11절 이하의 기사와 연결시키기 위한 것 같다”(J. A. Bengel).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세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에 대해, 칼빈(J. Calvin)은 “실제로 모세와 엘리야가 존재한 것인지, 혹은 그들의 망령이 제자들 앞에 제시된 것인지―예언자들이 종종 없는 것인 환상을 본 것처럼―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내게는 실재라고 하는 것이 더욱 그럴듯하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에 몸과 영혼들을 가지신다면, 그 자신의 뜻을 따라 죽은 자에게 당분간 생명을 주시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와 엘리야는 스스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곁에 존재하게 된 것이었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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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 Schweizer, “Bruce, Lohmeyer”(in 이상근), 山口 昇,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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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엘리야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대표하고, 모세는 율법을 대표한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모세도 예언자이었다. 그리고 그가 전해준 율법은 그의 예언적 발언의 일부이다”(E. P. Gould). 특히, 그는 예언적으로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였다(눅 24:27, 요 1:45).1) 반면에, 엘리야는 예언적인 것, 특히 기록에 의하면, 예언의 메시아적 측면과 관계가 없는 것이기는 하나, 마지막 때에 사람들에게 신의 법(모세 율법)을 일깨워 주고, 입법자이신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선구자로서의 사명이 있었다(1:2-, 9:11, 말 4:4-6).

그렇다면, 모세는 곧 예수님의 죽음에서 성취될 옛 언약의 대표로 나타나고, 엘리야는 마지막 때에 만물을 회복하는 예언자로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과 그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사건들의 종말론적 의미인 궁극적 중요성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예수님과 엘리야 그리고 모세의 대화의 주제가 장차 발생할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별세(눅 9:31)였다는 것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와 같이 율법과 예언을 특징으로 하는 구약의 주제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인 것이다.

근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모세는 죽음에서 부활할 성도들의 모형으로, 엘리야는 죽음을 거치지 않고서 영화로움을 입어 하늘로 들려질 성도들의 모형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출현한 이제 구약의 의미는 완성된 것이므로, 이 마당에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져야만 한다(눅 9:33).

놀라운 광경을 본 베드로의 충동적인 반응에 대해, 마가는【5】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라고 하였다.

누가는 그때의 상황을 가리켜,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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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누가복음 24:27의 주석과 요한복음 1:45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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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떠날 때에”(눅 9:32-33 전반)라고 하였다.

고하되는 아포크리테이스(ἀποκριθεὶς)이며, “말이 아니라 행해진 것에 대해 응답하는 것이다”(E. P. Gould). 여기서는 “베드로가 생각하기에 그 당시의 상황, 즉 홀연히 하늘에서 온 두 사자와 예수께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는 것 같은 상황에 반응했다거나 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W. Hendriksen).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점에 대해, 헨리(M. Henry)는 “영광스럽게 변화된 예수께도 참된 신자는 담대히 다가가 말할 자유가 있다. 이 천국의 소리에서도 베드로가 말할 여지는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라.”라고 하였다.

랍비(ῥαββὶ)는 율법의 스승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그 의미는 ‘나의 큰 자’이다(10:51, 11:21, 14:45).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는 베드로가 황홀한 마음으로 한 말임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가 아직도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영적 사실의 속뜻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레인(W. L. Lane)은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제안은 분명히 상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하면서, 마우서(U. Mauser)의 “다시 하나님이 사람들과 대화하실 수 있는 새로운 만남의 초막을 짓겠다는 욕구는, 베드로가 제 2의 출애굽(인류 구원)이 성취된 것으로, 그리고 안식일의 안식 목표가 달성된 것으로 간주한 것을 의미한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계속해서 레인(W. L. Lane)은 “베드로는 예수께서 필수적인 것으로 선포하신 고난에 앞서 지금 약속된 영광의 성취를 열망한다. 그의 주석은 예수님의 변형이 단지 완성된 천국의 영광에 순간적으로 참여한 것이었음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했음을 반영해 준다.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가 나누게 될(13:26-) 새 세대의 복들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는바 정해진 임무에 절대 필요한 고난들을 다 겪으신 다음에야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다. 마가의 해설적인 주석은 세 제자가 자기들이 본 것에 대한 메시아적 의미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음을 지시하는 것이다.”라고 잘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와 두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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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고 운명하심으로써만 인류가 죄와 죽음과 멸망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둘째, “베드로는 종들인 모세와 엘리야를 주님과 같은 수준에 놓을 만큼 어리석었다”(J. Calvin, 山口 昇).

셋째, “베드로는 천국과 천국의 영광 그리고 천사 같은 영광을 받은 사람들을 위해 일시적인 장막들을 짓고 싶어하는 잘못을 범하였다”(J. Calvin).

넷째, “베드로는 내적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적 제도에 의해서 세상을 부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J. P. Lange).1)

다섯째, 베드로는 심지어 산 아래서 기다리고 있는 동료 제자들마저 잊어버렸다. 헨리(M. Henry)는 “우리가 잘 지낼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잊기 쉽다. 그리고 우리의 즐거움이 충만할 때, 우리 형제들의 필요를 잊기 쉽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의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라고 한 말은 매우 값진 것이다.

이러한 베드로에 대해 누가는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눅 9:33)라고 하였다.
베드로의 몰이해를 베드로에게만 국한시키지 않는 마가는, 그들의 몰이해의 이유에 대해【6】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라고 설명하였다.

아마도 베드로 자신이 그때의 사정을 마가에게 말했을 것이다.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나온 말은 후회 거리가 되기 쉽다.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말했을 때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마가는【7】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라고 하였다.

높은 헐몬 산에는 지금도 갑자기 구름이 와서 덮고, 또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한다(Edersheim).2)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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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H. Burn.
2)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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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표시이며, 그 성서적 배경은 충분하다(출 13:21, 14:19, 16:10, 19:9, 24:15-, 33:9, 레 16:2, 민 9:15-23, 11:25, 왕상 8:10, 시 78:14, 99:7, 사 4:5, 겔 10:3, 막 13:26, 14:62, 행 1:9, 살전 4:17, 계 11:12 등).

저희를 덮으며의 저희는 구름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덮었다는 것이다.1)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cf. 출 24:16)의 내용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1:11의 주석을 보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라는 것이다.

세 제자에게 모세나 엘리야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완전히 복종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약 1:22-24). 칼빈(J. Calvin)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교회의 지고의 유일한 스승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 제자에게 변화산의 경험을 하도록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즉,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취급하든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이시며, 인정받는 진리의 화신임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제자들은 미래의 영광을 미리 맛볼 수 있었고, 구름 아래서 발생한 것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있었으며, 특히 구름 속에서 들은 소리를 모든 세대에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을 구름 속에서 인정받았다.

제자들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8】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라고 하였다.

모세와 엘리야로 대표되는 구약성경은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으므로, 이제는 다 물러가고 구주 예수님과 그 증거자들만이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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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 E. Sanner, W. W. Wessel, 山口 昇, 마경일.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절기 설교집 외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T. 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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