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55강 <1>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2-02-27 13:34
조회
1233
나. 제자의 도<8:34-9:1>

이 부분은 용기와 희생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예수께 대한 인격적 위임에 관계된 자극적인 짤막한 부분들로 구성된다. 그것들은 전승 속에서 함께 모아진 것으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마가가 표제에 결합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W. W. Wessel, W. L. Lane). 이 사건이 발생한 시간과 장소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마가가 전승에서 그러한 점들에 관해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음을 보여 주므로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W. W. Wessel).
이 전승을 구성하고 있는 사건이 예수님에 의한 고난 예고 다음에 일어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마가가 이 부분을 기록한 목적은 당시 박해와 시련을 당하고 있던 로마의 기독교인들을 북돋워 주고, 또한 그들의 신앙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한 것이다(W. L. Lane, W. W. Wessel). 그는 그와 같은 시련이나 박해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W. W. Wessel). 사실상,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고통이 자신의 운명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운명임을 일깨우셨다”(W. L. Lane).
마가는 이 기사를【34】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로 시작한다.
마태는 제자들만을 언급하고(마 16:25), 누가는 무리만을 언급하지만(눅 9:23), 마가는 무리와 제자들을 같이 언급한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께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고, 당시의 제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시대의 모든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무리에 대한 언급은 “갑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것이지만, 설화에서 생동적인 기능을 나타내 주고 있다”(W. L. Lane).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은 “나의 제자가 되어 나에게 자신을 의탁하거든”(W. Hendriksen)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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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부인하고는 부정 과거 명령형인 아파르네사스토(ἀπαρνησάσθω)이며 ‘단번에 결단성 있게 부인하다’, ‘부정하다’, ‘버리다’, ‘무시하다’ 등을 의미한다. 특히, 이 말은 스승에 대한 베드로의 부인을 지시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고란 영, 생각, 욕구, 육체 등의 어떤 요소를 부정하거나, 혹은 자기 중심적인 삶의 원리를 포기하거나, 혹은 자신의 유형‧무형의 소유를 버리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기 존재 자체를 부인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송두리째 내맡김으로써만 가능하다. 그 때에 비로소 자아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부인이란 주님 안에서의 자기 긍정을 초래하는 것이다(빌 1:21, 3:7-9, 갈 2:20).
사람이란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나 감정이나 욕구 등을 긍정하며 살 때보다는 부정하며 살 때가 더 많다. 그렇다면, 구주 예수님을 위해 자기를 부정하며 산다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
바울 사도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7-9)라고 하였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라고 하였으며,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 1:21 전반)라고 하였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부정의 극단적 단계이다”(E. P. Gould). 이 말씀은 당시의 사형수가 자신이 달려 죽을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끌려갔던 풍속을 배경으로 하신 것이다. 그 관념은 제자들이 보다 높은 생의 목적에 속하는 것들보다 앞선 이기적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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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들에 속하는 모든 것, 심지어 생명 자체를 포기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이다(E. P. Gould). 보다 더 적극적인 관념은,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아 고난을 겪고 자신을 죽이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고생하고,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일이다. 우리들 각자에게 정해진 십자가가 있다”(山口 昇).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어떤 특수한 상황에 대해 요구하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누가는 “날마다”(눅 9:23)를 첨가하여, 일상적인 제자의 길로서 요구하신 것임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셋째, 나 곧 예수님을 좇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에 추가된 세 번째 것이지만, 그러나 그 의미는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것에서 그를 따르는 길이 발견된다는 것이다”(E. P. Gould).
“위의 세 가지 조건은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 열거하신 것은 아니다. 그 순서는 다만 논리적 순서일 뿐이다”(W. Hendriksen). 그리고 그러한 조건들은 인간의 주도적 결단에 의해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음으로써만 충족되는 것이다(참조: 요 3:3, 5, 갈 5:16-26).
바클레이(W. Barclay)는 제자의 길을 제시하신 예수님의 정직성에 대해, “예수께서는 쉬운 길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을 매수하시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지 않고, 영광을 제시하셨다.”라고 설명하였다.
산너(A. E. Sanner)는 “제자가 되는 대가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제자 의식을 차 버리는 대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라고 하였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3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라고 하였다.
원문에는 첫머리에 가르(γὰρ: 왜냐하면)가 있어서 앞 구절의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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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어야만 할 이유를 나타내고 있다.
목숨은 프쉬켄(ψυχὴν)이며 ‘생기’, ‘정기’, ‘감각’, ‘동물의 생명’(계 8:9, 16:3), ‘인간의 목숨’(마 6:25, 살전 2:8), 신체와 구분되는 ‘영혼’, 또는 ‘정신’(마 10:28), 애정과 의지 등의 자리인 ‘영혼’(행 14:2, 22), ‘자아’(마 10:39), ‘인격’, ‘개인’(롬 13:1) 등의 의미가 있다.
케네디(H. A. A. Kennedy)는 “프쉬케(ψυχή)란 구약성경에서는 대개 개인의 생명 원리를 지시하는 것 같다. 그러나 특별하게 정서적 행위성을 의미하고, 가끔 인격적 대명사로 대치된다”1)라고 설명하였다.
불트만(R. Bultmann)은 “구약성경에서처럼 바울의 경우에도 프쉬케는 생명력 혹은 생명 자체를 의미한다.”2)라고 하였다. 그는 “너희가 ‘일심으로’(ἐν ἑνὶ πνεύματι) 서서 ‘한 뜻으로’(μιᾴ ψυχή)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빌 1:27)을 들어서, ‘일심으로’와 ‘한 뜻으로’는 같은 의미라고 한다. 즉, 의지의 같은 태도 혹은 같은 방향이라는 것이다.3) 그러나 기능적으로는 같을지 모르지만 존재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바울은 프뉴마와 프쉬케를 대조하여 사용한다. 그 예로 바울은 첫 아담은 산 영(프쉬케)이 되었다고 한 반면에, 둘째 아담은 살려 주는 영(프뉴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첫 아담은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흙에 속한 자인 반면에, 둘째 아담은 신령한 자요 하늘에 속한 자이다.
이 두 아담은 하늘에 속한 자들과 흙에 속한 자들과 같다(고전 15:45-49). 즉, 프뉴마는 구속받은 자요, 성령을 따라 영적 삶을 사는 영적 인간을 의미하는 반면에, 프쉬케는 자연적이며 세상적인 삶을 사는 자연인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은 “단순히 동물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의 삶, 즉 초자연적인 삶과 대조적인 지상적인 인간의 자연적 삶을 의미한다”(R. Bultman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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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 A. A. Kennedy, op. cit., p. 36. 참조: W. D. Davies, Paul and Rabbinic Judaism(New York : Happer &Row, 1967), p. 193. 구약성경의 nephesh와 같은 것으로 생명의 원리이다.
2) R. Bultmann, op. cit., p. 204.
3) Ibid.
4) Ibid., p.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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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예수님을 좇지 않고, 자기 본위로 살아가는 자연인 또는 자연적 생명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또는 자연적 생명에 집착하여 고수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잃을 것이다. 버딕(D. W. Burdick), 웨셀(W. W. Wessel), 黑崎幸吉, 그리고 山口 昇 등은 영생을 잃는 것이라고 하나, 얻지 못한 영생을 잃을 리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받아들일 수 없다. 이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라는 구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여기의 구원하리라는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35절 후반은 예수님과 복음(1:1의 주석을 보라.)을 위해 자기 또는 자기의 생명을 잃는 사람은 누구든지 신령한 삶을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생명은 조금씩 상실되고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누구 또는 무엇을 위해 상실되고 있는가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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