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3강: 실족케 하는 자(9: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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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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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7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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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6
다. 실족케 하는 자<9:41-50>

<비교: 마 18:6-9, 5:13, 눅 14:34-35>

이 부분은 매듭지어진 전승이라고 하기보다는 예수님의 말씀들을 모아 편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에 대해, 불트만(R. Bultmann)은 “42절은 원본에서 ‘아이들’(파이디아, παιδία) 및 ‘소자들’(미크로이, μικροί)이라는 유사어에 의해 37, 41절에 언급되었고, 다음에 43-48절은 ‘실족케 하다’(스칸달리제스타이, σκανδαλίζεσθαι)라는 유사어에 의해 연결되었는데, 이 부분은 교회 교리문답에 내용상 적절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49절과 50절은 불(퓌르, πύρ)과 소금(할라스, ἅλας)이라는 유사어에 의해 배열되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ἔχετε ἐν ἑαυτοίς ἅλα καὶ εἰρηνεύετε)는 교리문답의 결어로서 적당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1)라고 하였다.

마가는 이 기사를【41】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로 시작한다.

물 한 그릇으로 동방의 뜨거운 태양의 열기로 인한,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일은 요긴한 섬김이기는 하나, 작고 쉬운 섬김이라 할 수 있다. 이 작고 쉬운 일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만큼, 그토록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참조: 롬 8:9, 14:8, 고전 1:12, 3:23, 고후 10:7, 엡 1:14, 벧전 2:9)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37-39절 참조) 행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배경이 있다.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의 사자는 그 사람 자신과 같고, 사자에게 행해진 일은 그를 보낸 자에게 행해진 것과 같다고 하는 생각을 하였다(W. W. Wessel, W. L. Lane). 그렇다면, 마가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에게 행해진 일을 그리스도 자신에게 행해진 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마태 역시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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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p. 18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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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45)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클레이(W. Barclay)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가리켜, 곤란한 지경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즉 “주께 대한 사랑으로”(A. Barnes) 또는 “믿음의 순종의 표로”(W. L. Lane) 베푸는 보잘것없는 섬김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받을 상에 대해,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마음의 평안(마 10:13), 재림 때에 받을 공적 인정(마 25:34 이하), 그리고 그 후의 ‘성도들이 빛에 거하게 됨’을 생각해 보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상을 구원 또는 구원받은 상태로 이해하기보다는 섬김에 적합한 하나님의 보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상에 대한 언급이 공과나 공적 사상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한 잔의 물이 천국에 참여할 공로로 이해될 수 있는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W. L. Lane).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42】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앞의 경우와는 정반대이다.

나를 믿는 이 ‘소자’(36절의 주석을 보라.)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스칸달리세, σκανδαλίσῃ: 4:17의 “넘어지는”의 주석을 보라.) 차라리 연자 맷돌, 즉 당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에 대해, 이상근 님은 “믿는 소자의 발에 부딪치는 돌을 두는 것보다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매어 바다에 던지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남을 범죄케 하여 그 영을 지옥에 빠트리는 것보다 그 육을 죽이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구절은 남을 실족시키는 자를 주제로 하고 있으므로, 예수님을 믿는 연약한 자를 믿음의 길에서 실족케 하는 자들은 연자 맷돌이 목에 달려진 채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형벌보다 더 중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1) 그렇다고 하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믿는 자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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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W. Hendriksen, W. W. Wessel, A. E. Sanner, C. R. Erdman, J. Gnilka, 하권, p. 89, 黑崎幸吉, 山口 昇,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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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게 하는 것이며, 영생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즈(A. Barnes)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아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사형 제도는 헬라와 시리아와 로마에서 시행되었다.”라고 하였다.}(마 18:6의 주석).

남을 실족케 하는 것을 경계하신 예수님이, 방향을 바꾸어 자기 자신을 실족케 하는 것을 경계하신 말씀에 대해, 마가는【43】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44】*없음【45】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46】*없음【47】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48】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 부분에서 44절과 46절이 포함된 사본들(A, D, K, Χ, Θ, Π, ƒ13)이 있고, 반면에 없는 사본들(א, B, C, L, W, Δ, Ψ, ƒ1)이 있다.1) 그 내용이 48절의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의 반복이라는 점과 사본의 가치상 개역 한글판 성경처럼 없는 것을 취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손과 발 그리고 눈이 매우 중요한 신체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범죄한 지체를 찍어 버리거나 빼어 버리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나으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 당시에 많은 이교도들에 의해 행해진 자기 신체 절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E. Schweizer). 범죄란 신체의 지체나 기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정신, 더 나아가 영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처럼 과격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신체 기관들에 충동이 있고”(J. Gnilka, 하권, p. 90), 또한 “신체의 각 부분이 범죄한다”(E. Schweizer)는 유대 사상에서 찾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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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K. Aland, et al., 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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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아무튼, 예수님의 취지는 글자 그대로 손발 등을 잘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죄의 유혹이라면, 신체의 기관처럼 중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웨슬리(J. Wesley)는 “너에게 손이나 눈처럼 유용하고 사랑스러운 친척이나 친구가 하나님의 길에서 너를 방해하거나 이완시키거든 그와 모든 교제를 끊어라.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사람에게 관계된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사물에 관계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영생에 들어가는 것은 서로 병행을 이룬다.

영생은 조엔(ζωὴν: 생명)이며, ‘생애’를 뜻하는 비오스(βίος)와 다르고, 죽음(롬 6:22)과 멸망(갈 6:8)의 반대인 신적 생명 곧 영생을 의미하는 것이다(요 5:26, 11:25, 14:6, 요일 1:1, 2, 5:11, 행 3:15, 골 3:4). 이 생명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덕으로부터 비롯되는 생명’(βίος κατ’ ἀρετήν)이나,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신비적 실체로서의 불멸은 결코 아니다.1)

사도 요한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4. 참조: 요일 5:12)라고 하였고,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라고 하였다. 즉, 영생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사이며, 그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 역시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라고 하였다. 영생이란 그 명칭이 지시하는 것처럼, 영원한 생명 곧 결코 끝나지 않는 생명이다.

지옥은 게엔난(γέενναν)이며, 히브리어 게힌놈(수 15:8, 18:16) 곧 ‘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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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 Kittel, ed., op. cit., Vol. I, p. 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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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골짜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 말은 또한 게벤-힌놈(수 15:8)의 생략형이며, 그것은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하스 왕과 므낫세 왕의 통치 중에 바로 그 곳에서 어린아이들을 이방 신인 몰렉에게 희생 제물로 불태워 죽였기 때문에(왕하 16:3, 21:6, 23:10, 대하 28:3, 33:6), 그 곳은 불태우는 곳으로 악명 높았다. 나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시야 왕이 이 끔찍한 불경죄를 중단시켰고(왕하 23:10), 또 그의 벗인 예레미야는 그 곳을 저주하였다(렘 7:31-32, 19:5-6, 32:35). 이 힌놈의 골짜기는 배설물이나 쓰레기 또는 짐승의 시체를 버려서 불태우는 곳으로도 이용되었다.

이 게엔나(게헨나)의 불은 꺼지는 법이 없었고, 구더기도 죽는 법이 없었다(사 66:24을 인용한 9:48). 죽지 않는 구더기는 지옥에 들어가는 자의 부패의 상징이며, 꺼지지 않는 불은 지옥에 들어가는 자가 받을 영원한 형벌을 상징하는 것이다(계 14:9-11, 19:3, 20:10). 결국 게엔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는 곳이 되었다. 이러한 용법은 중간사 시대에 와서 훨씬 더 분명하게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에녹서의 경우에, “이 저주받은 골짜기는 영원토록 저주받은 자들을 벌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이곳에 꼴사납게도 하나님을 거슬러 말하던 자들이 모일 것이니, 이곳은 그들이 벌받는 곳이기 때문이다(27:2).”라고 했으며, 또한 “땅 한가운데가 열리고 깊은 구덩이 같은 것이 나타났는데, 이곳에는 불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심판을 받아 죄 있는 자들이 그 불타는 구덩이에 던져져 불태워졌다”(90:26, 48:9, 4 Ezra 7:36, M Pirke Aboth 1:5, 5:19-20)라고 하였다.1)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49】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 듯함을 받으리라라고 하였다.

본서에서 매우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중 하나이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수없이 많은데,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지옥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소금이 보존되듯 영원한 고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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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W. W. Wessel, W. Hendriksen, E. Schweizer, W. Barclay, J. Gnilka, 하권, p.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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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D. W. Burdick).

(2) 사람은 심판의 불로 마음속에 소금을 쳐야 한다. 즉, 심판의 불로 자기의 모든 불의를 태워 버림으로써 자기를 부패에서 건져내고 소금 맛을 간직해야 한다(黑崎幸吉).

(3) 자기 훈련의 불로 소금을 치듯 하는 것, 즉 부패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다.

(4) 지상 생활에서 제자들에게 부과된 시련과 희생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시련과 희생이 제자들을 순화시키고, 그의 제자로서의 실존을 굳게 할 것이다(J. Gnilka, 하권, p. 92).

(5) 연단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격렬한 시험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 시험은 악한 사람들에게서 선한 사람들을 분리시키고, 불신자들에게서 신자들을 분리시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자들의 마음과 삶 속에서 악한 요소를 없애고, 선한 요소를 나타내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환경 속에서 보존력을 가지도록, 즉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해 줄 것이다(W. Hendriksen).

(6) 불은 사람들 속에 있는 불순한 것을 태워 버려 보존하는 소금처럼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레 2:13)은 모든 희생 제물과 섞이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다(H. Alford).

(7) 모든 사람들은 마음속의 죄악을 불로 태워 소금을 치듯이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이상근).

(8) 불은 시련이나 박해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 구는 하나님에 의한 시련이란 영의 부패와 타락을 막는다고 하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데라, 존손).1)

(9)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똑같이 불로 소금 치게 될 것이다. 악한 자의 경우에는 형벌이고, 신자에게는 정결케 하는 연단이다(E. Bickersteth).

(10) 불은 정결과 파멸을 상징한다. 그리고 율법에 의하면, 모든 제물은 하나님께 바쳐지기 전에 소금을 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레 2:13), 그 소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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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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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소금이라고 일컬었다(민 18:19, 대하 13:5). 이 소금 때문에 제물은 하나님께서 용납하는 물건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한 연단과 그에 대한 충성으로 인한 핍박과 박해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1)

그 어느 설도 확실하다고 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그 중에 가장 그럴듯한 것은 (10)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어떤 사본들(A, K)에 “그리고 모든 희생 제물은 소금으로 뿌려져야 되리라”(καὶ πάσα θυσία ἁλι ἁλισθήσεται)2)가 추가되어 있는 것으로도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된다.

예수님이 49절의 소금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에 대해, 마가는【50】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제의적 교훈이 아니라 일반적인 교훈을 말씀하신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는 부패를 방지하고, 보존하며, 맛을 내주는 유용하고, 유익한 기능을 의미하는 것이다. 랍비들도 이것을 생활필수품으로 간주하여, “소금 없이는 세상이 살아남을 수 없다.”(Sopherim 15, 8)3)라고 하였다.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은 소금은 스스로 녹아 없어짐으로써만 제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소금은 소금 그대로 있을 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다른 것 속에 녹아 들어갈 때에만 소금이 소금 되는 것이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는, 맛을 잃은 소금은 그 좋은 기능들을 다 상실했으므로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맛을 잃은 소금에 대해, 반즈(A. Barnes)가 잘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소금은 염화탄산(muriate of soda)으로서 화학 합성물이다. 따라서, 소금의 독특한 짠맛(saltness or savour)을 잃어버리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근동 지방에서 사용되던 소금은 야채 부스러기나 다른 광물이 섞여 있는, 즉 불순물이 섞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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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 E. Sanner, W. L. Lane, W. Barclay, A. Barnes, 마경일.
2) in K. Aland, et al., ed.
3) in W. W. We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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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 많았다. 그래서 소금 덩어리가 본래의 소금기를 다 잃어버리고 상당량의 이물질 덩어리로 남게 마련이었다. 이처럼 본래의 소금기를 다 잃어버린 소금 덩어리는 더 이상 아무 소용없는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도로나 거리에 자갈을 까는 것처럼, 소금 덩어리를 길거리에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소금과는 다른 이런 종류의 소금을 지금도 근동 지방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소금 덩어리는 지하 광맥이나 지층에 분포되어 있는데, 햇빛을 쬐거나 비에 젖으면 소금기를 금방 잃어버린다.

마운드렐(Maundrell)은 이런 소금에 대한 자신의 체험담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나는 이런 돌소금 덩어리 하나를 둘로 쪼개 보았다. 그래서 그 중 한 덩어리는 본래 있던 대로 바위 덩어리와 연결된 채로 두었고, 또 한 덩어리는 따로 떼어 비와 공기와 햇빛에 노출시켰다. 그랬더니 전자는 계속 소금기를 갖고 있는 반면에, 후자는 드문드문 붙어 있는 하얀 소금 반점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짠맛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하여 나는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린다는 성경 구절을 실험을 통해 이해하게 되었다.”

톰슨 박사는 “나는 우리 주께서 언급하신 것과 같은 소금을 여러 번 보았다. 시돈의 한 상인은 소금을 수입하여 국가로부터 일정한 이익금을 배당받고 있었는데, 그가 구브로(Cyprus)의 습지로부터 들여오는 소금의 양은 엄청난 것으로 시돈의 전 주민이 최소한 20년 동안은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 중의 일부를 몰래 감추어 두기 위하여 산으로 운반했는데, 그 소금을 저장하기 위해 준 레디 스텐호프(June Lady Stanhope)에 있는 65채의 집을 빌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집들은 바닥이 흙으로 되어 있어서 땅바닥에 직접 닿았던 소금들이 모두 변질되어 버렸다. 나는 그 엄청난 양의 소금들이 문자 그대로 길에 버려져 사람들과 짐승들의 발에 짓밟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The Land and the Book, 제 2권, pp. 43-44)라고 하였다.

예블(Jebul)의 큰 호수를 방문했던 마운드렐(Maundrell)은, 그 곳에서 완전히 그 맛을 잃어버린 소금들을 볼 수가 있었으며, 그러한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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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사해의 남단 소금 바위 지역이나 우스둠(Usdum)에 있는 바위의 파편들 중에서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지역의 소금들은 땅에 닿거나 햇빛이나 비에 노출되면, 맛을 잃어 무용하게 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소금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많은 흙과 그 밖의 많은 불순물들이 따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중에는 순수하지 못하여 전혀 사용할 수 없는 것들도 많고, 곧 변질되어 흙이 되어 버리는 소금들도 많다. 이와 같이 맛을 잃고 변질된 소금은 비료로도 사용할 수 없으므로, 결국 길에 내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소금의 맛, 혹은 맛을 지닌 소금에 대해 (1) 심판의 불(黑崎幸吉), (2) 희생 정신(E. Schweizer), (3) 생명과 건강의 원천(크랜필드),1) (4) 형제들 및 세상 가운데서 진리와 우애와 평안과 기쁨 등을 증진시키는 성품들과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자 하는 의지(W. Hendriksen), (5) 기독교의 풍미와 순결(W. Barclay), (6) 예수님의 말씀 또는 이기주의로 인해 부패하지 않도록 제자를 보호할 희생의 각오(J. Gnilka, 하권, p. 92), (7) 기독교인의 특성인 사랑, 소망, 믿음, 자기 훈련(J. N. Davies), (8) 활기차게 하며 자극하는 기독교 신앙의 정신(E. Bickersteth), (9) 예수님과 복음에 대한 충성(W. L. Lane), (10)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향한 제자들의 헌신과 자기희생의 정신(W. W. Wessel), (11) 언약(H. Alford), (12) 이기성과 자기 추구(R. Earle) 등의 견해가 있다.

전후 문맥상 사는 맛을 내 주는 것과 정결케 하는 것과 보존하는 것과 희생하는 것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요소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심으로써 참된 성취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위의 요소들을 두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는 뜻이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길에서 서로 누가 큰 인물인가 하는 따위로 시기와 말다툼을 한 일(9:34)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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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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