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57강: 엘리야에 관한 논의(9:9-13)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2-03-16 12:04
조회
999
3. 엘리야에 관한 논의[9:9-13]

<비교: 마 17:9-13>

山口 昇은 “9, 10절은 앞의 기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앞의 구분에 넣을 수도 있다.”라고 하였다. 불트만(R. Bultmann)은 “이 말(12-13절)은 마가 자료에서 원래 이 말과 연결되어 있었던 11절의 제자들의 질문과 함께 1절의 계속이었는데, 마가는 그 사이에 변모 사화(2-10절)를 삽입함으로써 1절에서 이 말을 갈라놓았다.”1)라고 하였다. 라이트후트(Rightfoot)도 9:11-13을 9:1에 연결시켰다.2)

이미 불트만(R. Bultmann)은 자기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말(12-13절)이 교회의 신학적 토론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하나님 나라의 선구자에 대한 유대적 이론과 모순되는 1절의 옛 말이, 그 선구자는 이미 왔다고 말해짐으로 유대적 이론과 조정되어야 했던 것이다. 마가는 물론 세례 요한을 그런 선구자로 생각했는데, 마태는 이 점을 17:13에서 분명히 첨가했다. 또, 마태는 유대적 선구자 대망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을 함에 있어서 메시아 사상의 기독교적 수정을 본받았다(17:12 후반). 마가 본문은 이에 따라 변조된 것이다. 왜냐하면, 인자에 대한, 연관성 없이 차단된 막 12절 후반을 단지 삽입문으로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3)

그러나 불트만(R. Bultmann)의 이론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결정적인 근거가 없다. 오히려 엘리야의 문제가 변형 기사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아(4-5절) 현재대로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가는 이 기사를【9】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로 시작한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이 변형되셨던 산(헐몬 산으로 추정)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은 ‘인자’(2:10의 주석을 보라.)가 죽은 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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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cit., p. 155.
2) Ibid., 주 59.
3)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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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 즉 ‘예수의 영광스런 변형’(9:2, 3의 주석을 보라.)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라고 경계하셨다. 잠시 인자의 영광을 드러내셨던 예수님이 그 사실을 공표하지 못하게 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웨셀(W. W. Wessel)은 “예수께서 변화되신 것 같은 신비는 당시의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 사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라고 하였고,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예수께서는 자신의 영광, 즉 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나며, 또한 지금 변형으로써 예시된 영광이 공중 앞에 드러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둘째, 바클레이(W. Barclay)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에 아직도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여 지배할 힘과 권력의 메시아의 개념이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아셨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참 메시아성을 깨닫지 못했으며, 따라서 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 이상근 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양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다지 중요한 이유는 아니다.
넷째, 레인(W. L. Lane)은 “예수님의 금령은 실제로 그의 역사적 선교의 상황―고난과 거절에 의해 특징지어지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절정에 달한―속에서 높여진 인자를 지각하고 선포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금령(마 8:4, 9:30, 12:16)은 마가복음의 특징이기도 한 메시아 비밀(1:34, 43-44, 3:11-12, 5:43, 7:36, 8:30)에 속하는 것이다(1:34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금령이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레인(W. L. Lane)은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전제는 그 모든 차원에서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는 신학적 필수성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는 고난받으며 거절된 인자로서만(9:12 후반) 높여지고, 부활한 인자가 될 수 있다. 이 변형의 사건은 재림 시의 인자의 존엄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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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첫 인식이기 때문에 그의 부활에 대한 언급은 적절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의 변형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으며, 그 때에 그 본 것을 널리 전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가 잘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십자가와 그 뒤에 따르는 부활이었다. 그들이 십자가에서 메시아의 참 뜻을 알게 되고, 또 부활이 그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신시켜 주었을 때, 비로소 그들은 산상의 영광에 대해 말할 수 있었고, 그들은 이 사건의 본래의 모습, 즉 하나님의 힘의 발산의 서막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십자가의 죽음의 서막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결과적으로 기적들과 환상적 경험들 속에 있는 예수님의 모든 천적 영광은 부활절 후에 시작된 공적 선포의 중심임을 예시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제자들은 후에 이 사실을 공표하였다(벧후 1:17-18).1)

그러나 그 당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금령을 이해할 만한 영적 지각을 갖추지 못하였다. 이 사실에 대해, 마가는【10】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라고 하였다.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의 마음에 두며는 크라테오(κρατέω: ‘무엇인가를 자기의 소유로 취하다’, ‘집착하다’, ‘명심하다’)의 부정 과거 직설법 삼인칭 복수 동사인 에크라테산(ἐκράτησαν)이다. 즉, 예수님의 금령을 마음속에 잘 새겼다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금령의 속뜻을 깨달은 것은 아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완전히 순종하였다(눅 9:36).

세상 끝에 있을 일반적 부활은 제자들이 잘 알고 있던 믿음의 한 조항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2)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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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베드로후서 1:17-18의 주석을 보라.
2) E. Bickersteth, W. Hendriksen, W. W. Wessel, C. R. Erdman, W. Ba rclay, 黑崎幸吉,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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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전에도 예수께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배웠음에도 불구하고(8:31) 여전히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다. 여기서도 제자들의 몰이해가 나타난다.

그런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마가는【11】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말라기 4:5-6에 기초한 것으로,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그 길을 예비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즉, 질문의 요지는,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이실 수가 있는가, 혹은 메시아는 이미 와 계시는데 왜 ‘서기관들’(1:22의 주석을 보라.)은 여전히 엘리야가 와야 한다고 하면서 기다리고 있는가 하는 의미일 것이다”(山口 昇). 아마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은 변화산에서의 엘리야의 출현을 염두에 두고 질문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마가는【12】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일단 서기관들의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주장만은 옳다고 인정하셨다. 그러나 엘리야의 역할에 대한 예수님의 기본적인 이해는 말라기 4:6에 약속된바 회개를 통한 회복이었다(W. L. Lane, W. W. Wessel, 이상근).

다음으로,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들어(시 22:1-18, 69:8, 9, 11, 20, 21, 118:22. 특히, 사 53:3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메시아가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고 한 것은 무엇이냐고 반문하셨다. “그렇다. 매우 분명히 예언되었는데도, 그들과 서기관들은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W. Hendriksen).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 예언 곧 그 자신의 고난을 중시하셨다.

예수님은 더욱 확실하게 단언하셨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13】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마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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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마 17:12-13)라고 주석을 덧붙이고 있다.

엘리야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은 세례 요한이야말로 자신의 선구자인 엘리야로서 세상에 온 예언자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 특히 유대교 지도층이 그를 제멋대로 배척하였고(마 21:25), 사악한 헤로디아의 간계에 말려든 헤롯 안디바(안티파스)는 그를 죽이고 말았다(6:14-29, 마 14:1-12). 그들은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배척과 사악한 죄악은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기록해 놓도록 하셨다(9:13). 기록된 바는 열왕기상 19:2, 10을 가리키는 것 같다.1)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어떠한 면에서도 인간적인 책임과 죄성을 지워 버림이 없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그 뜻에 따른 생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한다.

아무튼, 예수님은 선구자인 엘리야 역할을 한 세례 요한의 운명처럼, 메시아인 자신도 그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결국엔 살해당할 때가 멀지 않았다고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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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 P. Gould, W. Hendriksen, W. L. Lane, 山口 昇.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절기 설교집 외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T. 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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