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6강 아이들을 축복하심(10:13-16)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2-05-17 17:39
조회
940
2. 아이들을 축복하심[10:13-16]
<비교: 마 19:13-15, 눅 18:15-17>

불트만(R. Bultmann)은 이 이야기 속에서 15절을 삽입된 원래의 독립된 주의 말로 보아야 한다(Lohmeyer, Crum, Sundwall)1)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더욱 자세하게 “원래의 부분인 13, 14, 16절은 유대의 관습에 그 근거를 가진, 엘리야와 게하시 사화(왕하 4:27)에 어떤 본보기를 지닌, 그리고 랍비 사화에서도 한 유사형을 볼 수 있는(StrB. 808) 이상적 장면이라면, 15절의 첨가에 의해 이 장면의 이상적 성격은 전적으로 분명해지고 있다. 즉, 15절의 진리가 이 장면에서 상징적으로 묘사된 것이다.”2)라고 하였다. 그러나 15절이 삽입된 것이라고 할 만한 결정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대로 통일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부분의 기사도 자세한 시간이나 장소의 설명이 없다. 예수님의 결혼과 이혼에 관한 교훈에 이어서 아이들에 관한 내용을 쓰는 것이 적절하기 때문에, 마가가 여기에 배치한 것 같다.

마가는 이 기사를【13】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로 시작한다.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자기들의 어린아이들을 위인들에게 데리고 가서 축복을 받는 관습이 있었다(창 48:13-20. SBK 1:807-8).3) 이러한 일이 예수님 당시에도 행해진 것에 대해서, 카(Carr)는 “당시에 유대 아이들은 회당에서 랍비에게 축복을 받는 풍습이 있었다.”4)라고 하였다.

대개의 경우, 아이들을 축복할 때에는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창 48:11). 그러므로 사람들이, 손을 대어 병자를 고치시거나 죽은 사람을 살리신다고 소문난 예수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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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 37.
2) Ibid.
3) in W. W. Wessel.
4) in W. W. We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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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자연스런 일이다.

어린아이들은 파이디아(παιδία)이며 6-14살까지의 아동을 의미한다. 그런데 누가복음 18:15에는 \\'갓난아기\\'를 의미하는 브레페(βρέφη)로 되어 있다. 이런 차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욕심을 고려할 때, 갓난아기부터 14세 아동에 이르기까지 데려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근거로 누가복음 18:16절에는 ‘그 어린아이들’(파이디아, παιδία)로 되어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가장 큰 사랑은 자녀를 주님 예수께 인도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부모는 자녀와 예수님의 만남을 도모해 주는 중개 역할을 잘하는 부모이다. 다시 말하면, 자녀들이 부모의 인격과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꾸짖거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의사를 알아보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그들을 꾸중했다는 뜻이다. 제자들이 그들을 꾸중한 이유는 존경하는 위대한 예언자이신 예수님이 방해를 받거나 괴로움을 겪는 것을 막기 위한 것 같다. 즉, 제자들은 “그토록 위대한 예언자의 일은 어른들을 가르치는 것이므로, 아이들에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무가치한 일로 생각했으며”(E. Bickersteth),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이들과 상대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J. Calvin)는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태도는 고대 사회의 아이들에 대한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상당히 낮은 신분에 속했으며, 개체 인격이라기보다는 부모의 소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아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14】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스승을 위한답시고 하는 일을 보신 예수님은 오히려 분개하셨다. 예수님의 분노는 제자들의 영적 우둔과 “아이들과 아이들을 데려온 자들에 대한 깊고도 부드러운 사랑 때문이었다”(W. Hendriksen).

우리가 생각하는 주님의 뜻과 주님 자신의 뜻이 다를 때가 많으므로, 기도와 말씀을 통해 신령한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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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적으로 주님의 뜻은 ‘우선적으로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것인가’에 집중되었고, 반면에 제자들의 뜻은 ‘우선적으로 어떻게 자신들의 이기적 욕심이나 이성적 판단을 실천할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예수님이 분개하여 하신 말씀, 즉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는 제자들의 당치 않은 짓을 강력히 제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1:15의 주석을 보라.)가 이런 자 곧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니라고 하신 예수님이, 어린아이의 어떤 요소들을 염두에 두셨는가에 대해 (1) 천진 난만, 솔직, 단순, 자연스러움이라는 설(黑崎幸吉), (2) 순결, 겸손, 신뢰 또는 신앙이라는 설(이상근), (3) 천진성, 단순성, 솔직, 겸허, 허약성, 신뢰성이라는 설(마경일), (4) 힘이 약하거나 없는 것이라는 설(山口 昇), (5) 겸손, 순종, 신뢰, 악의와 원한을 오래 기억하지 않는 것이라는 설(W. Barclay), (6) 받아들임, 신뢰, 실행력이라는 설(A. E. Sanner), (7) 받드는 것, 의지하는 것이라는 설(W. W. Wessel), (8) 단순하게 신앙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설(米田豊), (9) 낮춤이라기보다 신뢰라는 설(R. A. Cole), (10) 온순, 겸손, 의존, 종속이라는 설(E. P. Gould), (11) 의존, 받아들임이라는 설(F. C. Grant), (12) 받아들임, 신뢰, 낮춤이라는 설(J. Gnilka, 하권, p. 111)이 있다.

학자들이 내세우는 요소들이 부분적으로 겹치는 것이 많으므로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단, 천국과 관련된 것이므로 아이들의 공로나 덕성 또는 장점으로 여겨지는 요소들은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특징 중에서 받아들임, 단순성, 허약성, 무력성, 신뢰(신앙)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111)는 그러한 요소들을 다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럴듯한 설명을 하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은총이며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시려는 선물이다. 당시의 일반적인 판단에 의하면, 율법을 모르는 어린이는 토라에 있어서나 하느님 앞에서 아무 공적도 세울 수 없었다(Billerbeck. I, 786; Jub. 23, 26). 하느님의 나라를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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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어린이들에게 약속함으로써 예수는 가부장적인 사회에 팽배해 있던 신학적 공적 사상을 공격하고, 하느님을 깊은 신뢰 가운데 아버지라 부르며 하느님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어린이의 능력을 중요한 것으로 선언한다.”

설사 그러한 요소마저 갖추지 못한 어린이의 경우도 별로 다를 바 없다. 이 점에 대해, 칼빈(J. Calvin)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욕망 때문에 자발적으로 오는 자들과 믿음에 의해 온 자들만 받아들이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인식할 만큼 충분한 나이가 안 된 자들도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이 아이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축복을 구해야만 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아 세례가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1) 칼빈(J. Calvin)은 주로 이 이야기를 재세례파의 견해에 반대하여, 유아 세례를 입증해 주는 논증으로 이용하였다. 벵겔(J. A. Bengel)도 “만일 그들이 세례받기를 원했다면, 그는 의심할 바 없이 그들에게 세례를 허락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14절을 받아, 이를 이중 부정법을 사용하여 반복 강조하신 것에 대해, 마가는【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라고 하였다.

진실로는 3:28의 주석을 보라.

받들지 않는은 메 덱세타이(μὴ δέξηται)이며, ‘받아들이지 않는’이라는 뜻이다.

이 구절은 문법적으로 보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뜻으로도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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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Gnilka, 하권, p. 111: Cullmann*, Jeremias*는 14절 후반의 “금하지 말라”의 동사(κωλύειν)가 행 8:36, 10:47, 11:17에서 세례 의식과 관련하여 나오고, 초기 교회에서는 세례 청원자가 세례받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사유가 있는지 검토되었으므로 전통이 확정된 무렵에 유아 세례가 현실적인 문제였다고 생각하나, 그처럼 이른 시기에 이런 문제가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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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수 있다. 그러나 전후 문맥상 그리고 그와 비슷한 마태복음 11:25, 18:13(참조: 요 3:3, 5)을 보아, 앞에서 밝힌 요소들을 지닌 어린아이가 자기에게 주어지는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자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이해는 “천국을 받아들이는 것과 들어가는 것에 관해 말하고, 천국을 세우거나 혹은 탈취하는 것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을 보아 더욱 확실해진다. 천국은 인간의 힘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간은 아무리 해도 천국을 받을 자격을 갖출 수 없기 때문에, 단순히 천국을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Rawlinson, p. 137).1)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거기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단순히 믿고 받아들임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마가는 말씀을 마치신 예수께 대해,【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이끌려 온 아이들을 한 명씩 한 팔로 안으시고, 다른 한 손은 머리 위에 얹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복을 빌어 주셨다. 아마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제자들은 아이들 모두를 귀찮게 여겼지만, 예수님은 자애로운 사랑으로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셨다. 벵겔(J. A. Bengel)은 “예수님은 부모들의 요구보다 훨씬 더 많이 하셨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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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W. W. Wessel.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절기 설교집 외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T. 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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