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58강: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심(9:14-29) <a>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2-03-22 13:14
조회
1055
4.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심[9:14-29]

<비교: 마 17:14-20, 눅 9:37-43>

이 이적에 대한 마태복음과 본서의 기사는 서로 유사한 점들보다는 오히려 상이한 점들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에 할애된 본서의 열여섯 절 중에 문헌상의 연관성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오직 18절 후반과 19, 28절밖에 없다. 물론, 나머지 부분에서도 그러한 연관성을 보여 주는 것이 여기저기에 나타나기는 한다. 또한, 본서와 누가복음의 기사를 비교해 보아도 결과는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세 복음서의 기사 중 본서가 가장 생생하고 자세하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짧은 기사가 본서에는 없는 중요한 항목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튼, “본서의 기사의 특성을 보아 베드로의 추억에 기초한 것이 아닌가 싶다”(山口 昇).

불트만(R. Bultmann)1)과 슈바이처(E. Schweizer)는 이 기사가 두 이적 사화의 결합이라고 하는데,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마가는 이 기사를【14】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로 시작한다.

예수님 및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에서 내려와서 나머지 아홉 제자들을 본 때를 가리켜, 누가는 변형의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이라고 한다(눅 9:37). 그들이 내려왔을 때, 남아 있던 제자들은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라파엘(Raphael)은 이 대조적인 사실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예수님은 산 위에 계시고, 제자들은 우울한 골짜기에 있는 것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다.2)

서기관들(1:22의 주석을 보라.)이 가이사랴 빌립보 부근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 있을 수 없으므로, 이 구성은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견해(존손)가 있으나, 이에 대해서 이 경우의 서기관들이라고 하는 말은 마가복음 중 유일한 예외로서 관사가 붙어 있지 않으므로, 정식 서기관들이 아니라 지방의 교사들을 가리킨다고 하는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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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 263.
2) in A. E. Sa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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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다나)이 있다.1) 그러나 위의 견해들보다는 예수님의 활동을 염탐할 목적으로 예루살렘의 산헤드린(공회)에서 파견한 서기관들로 보는 견해(W. L. Lane, E. Bickersteth)가 더욱 그럴듯하다.

그 서기관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해 변론하고 힐난하며 군중의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무리의 반대와 불신을 조장하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대적들의 지칠 줄 모르는 끈질긴 악의를 볼 수 있다. “그들은 그 날의 승리가 자기들의 것인 양 기고만장하였다”(M. Henry).

米田豊은 “산 위에서는 주의 영광이 눈부시게까지 나타나 있었는데, 산 아래서는 천진한 어린이가 벙어리 귀신들려 고생하고 있었으며, 그 아버지는 비탄에 잠겨 있었고, 제자들은 자기들의 무력으로 곤혹 중에 있었으며, 율법학자(서기관)들만이 이것을 힐난하면서 의기양양해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산상에 있기를 원했으나(5절 이하), 주님은 그들을 이 장면 한가운데로 데리고 내려오신 것이다. 종교는 사람을 떠난 산상에서 묵상에 잠기거나, 기도만으로써 만족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민중 속에 진출하여 번민하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역사)에 있어서도 주의 뜻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님과의 은밀한 만남은 이웃 사랑의 활력소가 되어야 한다.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님을 본 모든 무리에 대해, 마가는【15】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이라고 하였다.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한 이유에 대해 (1) 예수님의 언행에 앞서 그분에게서 발산되는 권위, 즉 서기관들과는 전혀 다른 권위를 지니고 오셨기 때문이라는 설(E. Schweizer, J. Gnilka, 하권, p. 66), (2) 예수님의 예상 밖의 출현과 얼굴의 광채 때문이라는 설(J. Wesley), (3) 모세의 경우처럼(출 34:29-30), 산상에서의 변화의 영광이 아직 예수님의 얼굴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2) (4) 예수님이 가장 적절한 때에 갑작스럽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라는 설3)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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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山口 昇.
2) H. Alford, E. Bickersteth, A. E. Sanner, “다나”(in 山口 昇).
3) E. P. Gould, W. L. Lane, D. W. Burdick, W. Hendriksen, W. Barclay, W. W. Wessel, “데라”(in 山口 昇), 山口 昇, 이상근,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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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예수님이 자신의 변형을 자신의 부활 때까지는 비밀로 하라고 하신 점으로 미루어 (4)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곤혹을 치르고 있었던 아홉 제자들이 가장 놀라며 기뻐했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군중일 것이다. 그러나 통쾌해하던 서기관들은 오히려 당황하며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온 무리의 인사를 받으신 예수님에 대해, 마가는【16】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라고 하였다.

너희는 아홉 제자들을 가리키고, 저희는 서기관들을 포함한 군중을 가리키는 것 같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충분히 알고 계셨다(28, 29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사 곤혹스러워하는 그들을 도우러 오셨다. 이제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기를 펴게 되고, 오히려 서기관들이 곤혹스러워졌다. 아홉 제자들과 변론하며 비아냥거리던 서기관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침묵 상태가 오래가지 못한 것에 대해, 마가는【17】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라고 하였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에,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외아들(눅 9:38)을 가진 한 아버지가 공론이 아닌, 절실한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의 말 중에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은 벙어리인 악령이 그 사람의 아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벙어리가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악령이 그 사람의 아들을 벙어리로 만든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후자가 더욱 그럴듯하다.

선생님(누가복음도 같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주’로 되어 있다.)께 데려왔나이다는. 그 사람이 외아들을 예수께 데려와 고쳐 주실 것을 바랐으나, 계시지 않아서 제자들에게 부탁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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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실패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사명을 받았다는 점(6:7, 마 10:1)과 한때는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도 했다(6:13, 40, 눅 9:6-10)는 점 때문이다. 실상, 그들조차도 자기들의 실패의 원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28절). 그 원인은 나중에 예수님에 의해 밝혀지게 된다(29절).

외아들의 증세에 관한 아버지의 설명에 대해, 마가는【18】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라고 하였다.

외아들의 증세에 대한 아버지의 설명은 간질을 연상하게 한다. 붙들림, 경련, 거꾸러짐, 거품을 흘림, 이를 갊, 수척하고 여위어 가는 것 등은 일반적으로 간질과 관련되는 증세이다. 더욱이, 이 아이의 증세는 매우 심하였다(마 17:15).

“고대의 민중들은 간질을 거룩한 질병이라고 했는데, 그 까닭은 아마 이 병에 따르는 고통이 크기 때문이거나, 간질을 신이 내린 고통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이 병은 달의 여신과 결부되었다(참조: 마 17:15). 그리스도교 영역에서 간질을 거룩한 병으로 보는 일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J. Gnilka, 하권, p. 66).

그 아버지의 외아들은 의학적인 원인에 의한 간질병자가 아니라, 그를 지배하는 귀신에 의해서 발생된 간질병자이었고(18절), 또한 벙어리(9:17)이었다. 헨드릭슨(W. Hendriksen)도 “사실, 그가 겪었던 모든 육체적인 고통은 모두 그 더러운 귀신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한 간질병의 경우가 아니었다. 이것은 매우 복잡한 상태였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병은 의학적인 원인에 의한 것과 ‘귀신들림’(1:23의 주석을 보라.)에 의한 것과 그 두 가지가 겹쳐서 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아이를 사로잡고 있는 더러운 귀신은 그 당시의 제자들의 능력으로는 벅찬 상대였다. 이 점은 아이의 아버지가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라고 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기적 행위자의 능력과 그 제자의 무능이 대조되는 것은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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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 기적 설화들에서 자주 나오는 동기이다”(“Weinreich”,1) J. Gnilka, 하권, p. 67).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호소를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19】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 오라 하시매라고 하였다.

원문에는 호(ὁ)가 있어서 예수님의 깊은 탄식을 나타내고 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에 대해 (1) 적은 무리라는 설(J. D. Stevens), (2) 아이의 아버지라는 설(R. A. Cole), (3) 서기관들이라는 설(Whiby),2) (4) 아홉 제자들이라는 설(“Hammond”,3) W. W. Wessel, D. W. Burdick), (5) 제자들, 아이의 아버지, 서기관들 및 군중, 즉 이 세상이라는 설4) 등이 있다.
대다수 학자들의 견해인 (5)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黑崎幸吉은 “학자들의 불신은 물론, 제자들도 군중도 다 불신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특히 제자들의 무력함을 슬퍼하신 것은 물론이다. 예수는 이 기적을 군중 앞에서 행함으로써 그 능력을 보이시고, 그러한 능력을 가지신 그를 죽이려는 불신의 세대 앞에서 증거를 삼으려 하신 것이다. 그를 믿지 않는 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하물며 그를 죽이는 자들이야!”라고 잘 설명하고 있다.

디벨리우스(M. Dibelius)는 “예수님의 말씀들은 땅에 일시 거주하시는 신적 존재에 적합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헌터(A. M. Hunter)는 “그의 하늘 아버지께 대한 향수의 부르짖음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예수님은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탄식하셨다. 이 탄식은 예수께서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현세와 내세의 구원을 얻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역사하셨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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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하권, p. 67.
2) in M. Henry.
3) 상동.
4) H. Alford, E. P. Gould, E. Schweizer, E. Bickersteth, W. Hendriksen, A. E. Sanner, J. Gnilka, 하권, p. 67, 黑崎幸吉, 山口 昇, 이상근,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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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식하신 예수님은 이내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그를 내게로 데려 오라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어떤 종류의 구원이든 행해 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 구주이시다.

그 아버지의 즉각적인 순종의 결과에 대해, 마가는【20】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라고 하였다.
이에 데리고 오니는 예수님의 명령을 들은 아버지의 즉각적인 순종을 나타낸다. 이 순종은 예수께 대한 아버지의 믿음이 전제된 것이기는 하나, 충분한 믿음은 아니었다(22절 후반, 24절).

아이의 아버지가 진술한 바(18절)와 같은 증세는 귀신에 의해 야기된 발작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입증하기 위해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두 가지 사실을 들고 있다. 첫째, 귀신이 예수님을 보는 그 순간에 아이가 경련을 일으켰다. 둘째, 아이의 경련은 자체의 작용으로 근육의 경륜을 일으키는 대뇌 증상이 아니었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능력 행함의 은사를 받은 이들(고전 12:10)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을 때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여기서의 발작은 자신의 정복자를 예지한 귀신의 마지막 발악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웨셀(W. W. Wessel)도 “마가는 예수님과 사단의 세력 사이에 벌어지는 격렬한 싸움을 묘사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불쌍한 아이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의 질문과 그 아버지의 대답에 대해, 마가는【21】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1) 그에게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과 오직 예수님만이 가능하시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라는 설(R. A. Cole), (2) 아버지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설(H. Alford), (3) 예수님 자신의 정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아버지에게 소망과 확신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E. Bickersteth), (4) 예수께서 그 아이에게 깊은 동정과 깊은 관심을 보이신 것이라는 설(W. W. Wessel), (5) 그 병이 하루 이틀의 것이 아니라, 여러 해가 된 고질병으로서 사정이 매우 딱한 것임을 충분히 인식시켜, 하나님의 능력을 확실히 믿게 하려고 한 것이라는 설(마경일), (6) 그러한 사실이 그 아이를 고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이 고통을 당해 온 그 기나긴 세월들을 생각하도록 함으로써 이제 일어날 이적에 대하여 더욱 깊은 감사를 갖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W. Hendriksen) 등이 있다.

전후 문맥상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의 능력을 미루어 (5)설과 (6)설을 합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절기 설교집 외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T. 426-3051



전체 1

  • 2012-04-19 12:28

    믿음의 기도가

    잡귀을 쫓아 내리라 믿습니다.!!!

    말씀 내려 주심에 감사합니다.^^

    필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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