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61강: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9:33-50]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2-04-12 21:52
조회
882
6.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9:33-50]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및 부활 예고에 대해 기록해 온 마가는, 여기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9:33-50)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진짜 큰 자(9:33-37),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 자(9:38-40), 그리고 실족케 하는 자(9:41-50)로 구성되어 있다.

가. 진짜 큰 자<9:33-37>

<비교: 마 18:1-5, 눅 9:46-48>

이 단화는 장소를 확실하게 진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뒤따르는 내용은 장소에 관한 진술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어디서나 말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77)는 “따라서, 이 장소에 관한 진술은 예수가 마지막으로 갈릴리아를 지나면서 가장 잘 알려진 장소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해 놓으려는 마르코가 첨가한 것이다.”라고 하나,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누가는 자주 그러하듯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마태는 방금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도착하셨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단화를 구성하고 있는 전승에 대해, 山口 昇은 “가버나움의 집에서의 사건이므로 베드로의 추억에 기초한 것일 가능성이 많다(데라, 크란필드). 이 전승과 다음에 이어지는 각각의 전승(38-50)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상태, 혹은 제자란 누구를 이름인가가 변론되어지고 있으므로 마가가 전승에 기초하여 구성한 것이라고 생각된다(데라, 크란필드, 슈바이쳐. 존손은 48절까지로 본다).”라고 하였다.
마가는 이 기사를【33】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로 시작한다.
가버나움(1:21의 주석을 보라.)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에 들른 곳이다.1)
집은 예수님의 집이라는 추측(F. C. Grant)과 베드로의 집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많은 학자들2)의 추측인 후자가 더욱 그럴듯하다.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토론 내용을 아시고 질문하신 것이다(눅 9:47). 그 의도는 “그들로 스스로 어리석은 잘못을 고백하게 하시려는 것이며”(M. Henry), 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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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 R. Erdman, W. Barclay, J. Gnilka, 하권, p. 78, 黑崎幸吉.
2) W. W. Wessel, A. E. Sanner, D. W. Burdick, J. Gnilka, 하권, p. 78, 山口 昇,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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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해 수치심을 느껴 그와 같은 잘못을 고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또한, 제자들에게 새 교훈을 주시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일단 쩔쩔맸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견해와 태도가 예수님의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쩔쩔맬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고할 수 있어야 한다.
제자들이 대답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마가는【34】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대답을 못하고 잠잠한 것은 부끄러움 때문이었다.1) 그들의 쟁론의 주제는 누가 크냐이었다.
그러한 논쟁은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던 일(9:2, 마 17:1, 눅 9:28)2)과 전도 실습의 결과(6:30, 눅 9:10)의 차이 때문에 비롯된 것 같다. 그러나 깊은 신앙심이 없었던 제자들에게는 그러한 동기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가장 위대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그때는 그러한 논쟁을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임박한 고난을 예고하셨고(8:31, 9:31, 마 17:22-23, 눅 9:44-45. 참조: 눅 9:22), 그 고난의 길인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제자들은 스승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상에 올 임박한 메시아 왕국(9:1)의 영광스런 지위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제자들은 예수님의 인격과 교훈에 대해서는 여전히 어두웠고, 오히려 “우위와 지위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안고 있는 당시의 문화적 기질에 물들어 있었다”(W. L. Lane, W. W. Wessel). 이러한 문제는 그때의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때 모든 사람들의 문제이다. “후대의 라삐 신학은 천상에 있는 낙원의 주민들을 일곱 등급으로 나누었으며, 누가 가장 높은 등급에 속하는가에 대해 논란을 벌였다. 에쎄네파의 쿰란 공동체도 피안의 세계에 대해 확고한 서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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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 P. Gould, W. W. Wessel, W. Barclay, 黑崎幸吉, 마경일.
2) 참조: A. E. Sanner, 이상근,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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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정하였으며, 공동체에서 엄격히 준수되는 상하의 질서는 이에 대한 선취의 모형이었다(참조: 마 5:19, 11:11)”(J. Gnilka, 하권, p. 78).
아무튼, 제자들의 몸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마음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슈바이쳐(E. Schweizer)는 “열등 의식을 표현하는 위대함에 대한 인간의 강렬한 욕망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보여 준다. 이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낮춤을 주장하셨고, 또한 스스로도 낮게 존재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예수님이 천국 시민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말씀하실 순간이 온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35】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앉으사는 유대의 랍비들이 가르치는 자세를 취하신 것으로, 자신이 스승임을 다시금 부각시켜서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교훈을 명심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열두 제자를 불러서는 매우 중대한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열두 제자 모두를 불러 더 가까이 오게 하신 것을 의미한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는, 우위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권위 있는 대답이다. 위대함과 지위에 관한 모든 인간의 견해에 대한 놀랄 만한 역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전제 조건인 자기 부정을 위한 부름의 재확인이며(8:34),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큰 계명의 실제적 적용이다(12:31, 레 19:18). 예수님 자신도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라고 밝히셨고, 또한 그대로 실천하셨다(참조: 요 13:5). 특히, 예수님의 지극한 겸손에 대해서는 빌립보서 2:5-8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1)
한 마디로 말해,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뭇사람을 섬기는바 사랑의 종노릇을 하는 것이다. 지위의 높낮이는 섬김의 다소와 비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공동체에서든지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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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빌립보서 2:5-8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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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아니라, 섬길 능력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며, 장이 아니라 일꾼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또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3)를 명심해야 한다.
겸손과 섬김에 대한 교훈이 매우 친숙하게 받아들여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께서 가장 멋지고 인상깊은 산 어린이를 통하여 듣는 자들의 정신과 마음속에 그 교훈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새겨 주셨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36】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라고 하였다.
어린아이를 가리켜 안티오케이아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von Antiocheia)와 동일시하는 후대의 전승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또, 시몬의 아들로 추측하는 학자들(R. A. Cole. E. Bickersteth)이 있으나 역시 확실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문자적 의미의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미약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소자란 세상의 멸시의 대상이요 희생물이지만, 예수님의 가장 우선적인 사랑의 대상이다.
예수님이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신 이유에 대해, 마태는 낮춤 곧 겸손의 본보기로 삼기 위한 것(18:4)과 영접해야 할 대상의 본보기(18:5)로 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마가(37절)와 누가(눅 9:48)는 영접해야 할 대상의 본보기로만 삼으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어린이의 특성인 겸손, 단순함, 순진, 소박함, 온유 등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우리의 동정과 보호와 지도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의 안으시며는 “때로는 축복의 동작이기도 한데(Baur), 여기서는 애정의 표현이다”(J. Gnilka, 하권, p. 79).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에 대해, 마가는【37】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라고 하였다.
내 이름으로의 이름은 오노마티(ὀνόματί)이며, 성경에서는 그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내 이름으로는 ‘예수와 관련하여’, ‘예수를 믿음으로’를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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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덱세타이, δέξηται: ‘받아들이다’, ‘맞아들이다’, ‘환영하다’)는, 예수님이 안고 계신 아이와 같은 미약한 사람, 즉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 영접은 자기 과시나 우월 의식 또는 명예욕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 곧 말씀과 행위로 친히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사랑과 사려 깊은 배려로 미약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는, 위와 같은 식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한다기보다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12:6, 요 3:16, 5:36, 6:39, 8:29 등)을 영접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참조: 요 10:30, 14:9-11, 21, 24, 빌 2:5, 6).
결국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어린아이와 같은 미약한 사람을 섬기는 것과 예수님을 섬기는 것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동일한 선상의 일로 여기신다는 것이다(참조: 마 10:40). 이와 관련하여 모울(C. F. D. Moule)은 “예수께서는 어느 사람이든지, 특히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라도 본질적으로는 귀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밝히신 최초의 인물이었다. 어린아이에 대한 관심은 복지 국가에 의해 창안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은 지위가 아니라 섬김이며, 또한 믿는 사람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네가 나를 믿기 때문에 얼마나 유익을 얻고 있는가’가 아니라, ‘네가 나를 믿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유익을 얻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의 속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절기 설교집 외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T. 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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