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54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2-02-19 18:54
조회
986
Ⅳ. 예루살렘 방문 길의 선교(8:31-9:50)

앞서 예수께서 갈릴리에 이어 기타 지역에서 선교하신 일들에 관해 기록해 온 마가는, 여기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 길의 선교(8:31-9:50)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첫 번째 수난 예고 및 제자의 도(8:31-9:1), 예수님의 변화(9:2-8), 엘리야에 관한 논의(9:9-13), 고침 받은 귀신들린 아이(9:14-29), 두 번째 수난 및 부활 예고(9:30-32),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9:33-50)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첫 번째 수난 예고 및 제자의 도[8:31-9:1]

<비교: 마 16:21-28, 눅 9:22-27>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 길의 선교에 관한 첫 번째 내용인 수난 예고 및 제자의 도(8:31-9:1)는 예수님의 수난 및 부활 예고(8:31-33)와 제자의 도(8:34-9:1)로 구분된다.

가. 수난 및 부활 예고<8:31-33>

이것은 소위 인자의 고난의 예고이다. 본서에는 이 밖에도 9:30-32과 10:32-34에 고난의 예고가 있다. 불트만(R. Bultmann)은 이 고난의 예고들은 사후 예언이었다고 말한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속죄를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 것은 초대 교회의 신학에 기초한 해석이며, 예수님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견해는 현대의 성서학에 있어서 상당히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1)
그러나 쿨만과 예레미아스 등은 불트만(R. Bultmann)의 견해와 반대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2) 그란트(F. C. Grant)는 “세 번의 고난 예고는 마가의 특징이다. 그 목적은 예수께서 자신의 고난을 미리 알고 받아들이셨다는 것, 또한 자신의 부활을 미리 아셨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가는 이 기사를【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로 시작한다.
인자(2:10의 주석을 보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라고 하는 설명은, “제자들에게 믿어지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W. Barclay). 32-33절을 보게 되면, “그 모든 정설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고백(29절)은 귀신들의 예수 이해(3:11, 5:7)보다 더 나은 이해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 Schweizer). 그러므로 예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직후에,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긴급한 일이라고 여기셨던 것이다”(W. Hendriksen, W. L. Lane). 예수께서는 “지금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침으로써 제자들 또한 그들 자신의 십자가를 지도록 준비시키려고 하신 것 같다”(J. Calvin).
그러한 의미에서 “특별한 관심은 베드로의 열렬한 고백과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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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동.
2)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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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직접적 선언 사이의 예리한 대조에 집중되어야만 한다”(D. W. Burdick).
고울드(E. P. Gould)는 “인자가 고난받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은 (1) 예수께 대한 사람들의 적개심에 기인하고, (2) 예수님의 사역이 가진 영적 본질, 즉 예수님의 사역은 힘에 힘으로 대항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에 기인하며, (3)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인간을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기인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셔야만 한다는 필연성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라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는다면,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묘사한 52:13-53:12이 가장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웨셀(W. W. Wessel)은 “그러나 이사야서에 대한 탈굼 역을 볼 때, 우리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가 고난받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알 수 있다. 탈굼 역을 보면, 고난받는 것은 일반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 있고, 메시아에 관해서는 다른 말이 언급되어 있다. 그렇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처음으로 메시아가 고난을 받게 된다는 사상이 발전되었다는 견해는 별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라고 하였다. 크랜필드(Cranfield, Gospel of Mark, p. 277)는 예수님 이전에도 고난받는 메시아 사상이 유대주의 안에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으나, 희귀한 이유는 당시의 반 기독교적 논쟁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였다.1)
예수님이 예고한 가해자들 중 장로들(7:3의 주석을 보라.)은 지역을 다스리는 책임자인 일반인, 즉 평민 출신으로서 산헤드린(공회)의 일원이었고, 대제사장들이란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명예 대제사장인 안나스를 비롯하여 대제사장의 가족까지 포함되는 것이었다.
서기관들은 1:22의 주석을 보라.
바로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유대의 대법정인 산헤드린(공회)을 구성하고 있었다(14:53의 주석을 보라).
인자의 고난과 죽음의 예언은,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는 예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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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W. W. We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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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하고 있다.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은 예수님 자신의 부활이 완전한 죽음과 장사지낸 후의 사건이라는 점을 나타내 준다. 칼빈(J. Calvin)은 “십자가에 대한 단순한 언급이 제자들의 약한 마음을 무섭게 뒤흔들었으므로, 예수께서 곧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여 삼 일 후에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후에 그들이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은 것(16:10-11, 눅 24:11)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본서에는 사흘 만에(μετὰ τρείς ἡμέρας)라고 표현되었으나(9:31, 10:34), 마태복음(16:21, 17:23, 20:19)과 누가복음(9:22, 18:33)에는 “제 삼 일에”로 표현되어 있다. 전자는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고, 후자는 정해진 시점을 나타낸다. 그러나 사실상 이 두 표현 모두 의미상으로는 동일하다(W. W. Wessel, 山口 昇). 테일러(Taylor, p. 378)는 영어의 어법과는 달리, 유대인에게 있어서 사흘 만에는 72시간보다 적은 기간을 의미하는 말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그 말이 꼭 사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짧은 기간 내에’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1)
그러므로 “제 삼 일에를 만 삼 일로 취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날을 목요일, 혹은 수요일로 삼으려고 하는 시도는 당찮은 것이다”(山口 昇). “이 사흘이라는 글자의 중요성은 어떤 일정한 시간적 거리를 표시하려는 것보다 차라리 예수의 부활이 그의 완전한 죽으심과 장사지낸 바 된 후의 부활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즉, 그의 부활이 단순한 질식 상태에서 깨어난 것이거나, 지상적 생명의 재현이 아니라는 것을 표시하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매우 빠른 시일 안에 부활하실 것을 표시하기도 한다”(마경일).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메시아관과 상반된 예수님의 메시아성의 비밀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셨다는 뜻이다.
가르치신 태도와 베드로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32】드러내놓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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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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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전에는 다가올 자신의 고난과 승리에 대해 감추는 형식으로 말씀하셨으나(참조: 2:20, 마 12:39, 40, 16:4), 이제는 조금도 감추지 않고 솔직히 예고하신다. 이 예고는 제자들, 특히 베드로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매우 거리끼는 것이었다(고전 1:23).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한 것이다.
간하매는 에피티만(ἐπιτιμάν)이며 ‘논박뿐만 아니라 무가치한 자라고 책망하거나 비난하다’를 의미한다. 이 베드로의 망발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대단히 큰 충격을 받은 결과이다.
베드로의 만류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단호하며, 힘 있는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33】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라고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에 대해, 헨리(M. Henry)는 “제자들을 보신 것은 그들도 베드로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것처럼 여기신 것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신 것은 동시에 베드로의 잘못된 생각을 틈타 그를 교묘하게 이용한 사단을 꾸짖으신 것이다. 이 점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휴파게, Ὕπαγε)라고 하신 명령이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받으셨을 때, 사단에게 명하셨던 말씀과 같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예수께서 고난의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셔야만 하는 것을 의미하고, 사람의 일은 예수께서 그 고난의 길을 피하고 유대의 왕이 되어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따라서 제자들은 그를 보좌하는 대신들이 되어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사람이 일만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자신도 모르게 사단에게 이용된 주된 원인이고, 책망을 받은 주된 이유이다.
얼른 생각하면, 예수께 대한 베드로의 논박이 인정이나 의리 또는 존경하는 이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 같으나, 실은 이기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기적 욕망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교인들이 적지 않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유혹자가 때로 우리에게 호의를 가진 친구의 목소리로 말한다는 것은 기이하고도 무서운 일이다.······사랑의 탄원조차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중대한 소리를 막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 천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본받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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