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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는 신앙의 사람

작성자
원학수
작성일
2015-07-02 10:22
조회
1008
드리는 신앙의 사람
시편 50:7-15. 로마서 12:1-2.



사람의 성격과 생활방법이 다양하듯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의 영적 요구도 다양하게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 따라 신앙의 형태를 말할 때 여러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주십시오! 주십시오!” 하고 달라고만 조르며 받으려고만 하는 신앙!
자신의 부족함을 보충하려고 배우려는 신앙!
자기 연단과 수련을 위한 신앙!
자신의 죄를 깨닫고 사죄를 받으려고 하는 신앙!
십자가의 구원을 믿고 의지하려는 신앙!
등 여러 가지의 신앙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신앙 중에도 “드리는 신앙”이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느 곳에서나 받으려고 욕심 부리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보다 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더 아름다운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인류가 시작되면서 아름다운 신앙의 모범적 자취를 남긴 사람도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아브라함을 가장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까지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고 한 신앙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우리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본받고 따르려고 하면서도 드리려고 하기보다는 받으려고만 하는 쪽에 너무 민감하고 드리려고 하는 면에서는 많이 미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에게 무엇이나 요구하는 대로 모두 주셨습니다.

어느 부모님이든 자녀들을 극진히 사랑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자녀들이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주려고 노력을 합니다.
자식을 가진 부모들은 아무리 다른 집의 자녀들이 똑똑하고 잘생겼어도 못나고 우둔한 자기 자녀들을 더 사랑하고 관심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피와 살이 섞여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자녀들이 요구하는 것을 가진 것이 없어서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럴 때는 마음이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옛말에도 “한 부모는 열 아들을 거느려도 열 아들은 한 부모를 섬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은 많은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요구하는 대로 주려고 노력하지만 많은 자녀들은 한 부모에게 계속하여 달라고만 요구합니다.
돈을 달라! 밥을 달라! 옷을 달라! 신을 달라! 그러다가 만약 부모가 없어서 주지 못하면 자녀들은 섭섭해 하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합니다.
그래도 부모님은 자식을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또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자녀들이 성장해서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가지고 가정을 이루고 사회로 진출하고도 여전히 부모를 의지하며 달라고만 요구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를 가진 자녀입니다.
어린 아이 때에는 달라는 것이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다 성장한 자녀들이 여전히 늙은 부모에게 달라고만 하면 아무리 사랑하고 이해심이 많은 부모라도 귀찮고 미운감정이 일어날 것입니다.

동물의 왕국에서도 새끼를 기르는 동물들이 어린 새끼에게는 극진히 사랑을 하고 돌보아주지만 새끼들이 성장하면 가혹하게 대하며 정을 떼어놓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스스로 독립하여 살아가기도 하며 종족을 번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어렸을 때에는 부모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살지만 다 성장을 하고서도 여전히 부모님을 의지하며 받으려고만 한다면 잘못되어도 너무 잘못된 자녀일 것입니다.
적어도 성장한 자녀라고 하면 자기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부모님에게 은혜를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명절이 아니라도 때때로 부모님을 생각하고 맛있는 음식이라든지 보약이라든지 옷이라든지 사다 드리면서 기쁘게 해 드리려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살아갈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 달라! 달라! 요구하면 정상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누구든지 “받으시오!”하면 좋아하는데 “드리시오!”하면 듣기를 싫어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평생 받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살지만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영 육 간의 평안함과 여유를 누리며 삽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도 성숙한 모습을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직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초 신자들은 하나님께 달라고 요구를 많이 합니다.
허지만 신앙의 연륜이 오래되어 성숙한 성도들을 요구하는 것도 무엇인가 다릅니다.

초신자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필요한 것들을 “주시오! 주시오!”라고 요구하지만 신앙의 연수가 있고 성숙해진 성도들은 “받으시오! 받으시오!” 하는 요구의 단계로 보다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믿음에도 두 가지의 손이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시오! 주시오!”하는 믿음으로 받겠다는 손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불평불만을 하면서 내미는 손이라는 것입니다.
10년 20년을 믿어도 기도의 내용이 언제나 “건강한 몸을 주시옵소서. 좋은 직장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업이 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정이 행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자녀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똑똑하고 훌륭한 사위를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얼굴 예쁘고 영리하고 돈 많은 며느리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하는 주문이 항상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성숙한 인격의 신앙인이라면 적은 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리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드릴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첫째는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 중에 시간을 드린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며 귀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시간을 성별 하여 드릴 수 있다면 참으로 값지고 멋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도들에게 어떤 보상을 하십니까?
은혜를 주십니다.
평안을 주십니다.
기쁨을 주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장수하는 축복과 건강을 주십니다.
영생까지 주십니다.

어떤 중병에 걸린 성도가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정밀진단을 하였더니 6개월밖에는 살지 못한다는 사형 선고였습니다.
이 성도는 깊이 자기를 반성하며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 받을 것을 생각하자 부끄럽고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왕 죽을 몸 죽으면 썩을 몸 이왕이면 심판대 앞에 설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남은 생애를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시간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전도하는데 시간을 바쳐 정신없이 힘써 일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힘이 나고 지혜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가는 것도 모르고 힘쓰다보니 6개월이 언제 지난지도 모르게 지나갔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 갔더랍니다.
결국 하나님께 시간을 바쳤더니 자신의 생명이 연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마침내 그에게는 영생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오락과 쾌락과 향락을 찾는 사람들은 내심으로부터 일어나는 영적 기쁨과 감사와 만족이 없습니다.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고 근심과 걱정과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일주일에 하루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며 예배드리고 은혜를 사모하는 삶은 가장 가치 있는 날이 됩니다.
하루를 하나님께 바치고 일주일을 하나님의 보호가운데 사는 것이 복된 삶이 아니겠습니까?
침상에서 일어나 눈을 뜨면서 기도로 시작하고 창조주 하나님께 문안드리며 하나님의 보호를 의지하면 영적기쁨도 누리고 하루를 지내는 삶이 평안이 넘치는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믿지 않는 친구나 친척을 찾아 전도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도 가장 보람된 일이 될 것입니다.
전도하기위해 기도 제목을 삼고 간절히 기도하며 시간을 가지는 것과 전도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시간을 바치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고 전도에 열심히 하면 “저 사람들은 책가방 들고 교회를 다니면서 시간을 보내는 구나 차라리 저런 시간에 돈이나 벌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돈을 버는 것보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시간을 바치는 것이 더욱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성도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바쳐져야 합니다.
몸만 교회에 나와 있고 마음은 처가 집이나 관광지에 가 있으면 안 됩니다.
마음만 교회에 나가고 몸은 집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안 됩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는 성도들이 TV를 보는 데는 시간이 아까운 줄 모르고 열심히 보면서도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시간은 형식적이고 마지못해서 앉아있는 태도라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겠습니까?

TV를 여러 시간 보았으면 성경도 읽고 기도하는 시간도 가져야죠.
TV보는 것에 절반 정도만이라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죠.
요즈음은 성인병에 대한 불안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경제적인 불안이 높아 긴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 앞에 나아와 마음속에 쌓인 걱정과 근심을 기도로 아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안과 용기를 얻고 찬송으로 힘 있게 부르며 마음을 쏟으면 자신도 모르게 스트레스도 풀리고 상쾌한 마음과 기분으로 다시 일할 수 있으니 이것도 감사한 일이 아닙니까?

성경은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시 84:10) 말했습니다.
“만 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 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 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84:1-4)하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시간을 드리는 것이 이렇게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물질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과목은 처음 열매를 드리고 곡식은 처음 익은 곡식으로 드리고 짐승은 처음 난 수컷으로 드리되 흠이 없어야하고 자녀를 드릴 때는 맏아들을 바쳐서 구별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드리는 분량은 얼마가 되어야 할까요? 10에 1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최대의 것이 아니라 최저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것이 걸림돌이 되고 부담이 되어 염려와 고민으로 영생 길을 포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와 같은 일은 성경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9:16-22절에 보면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 나아와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어떤 계명입니까? 라고 다시 묻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다.” 하시자 그 청년은 “그런 계명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근심하면서 되돌아갔습니다.
이 청년이 아무리 계명들을 잘 지켰다 할지라도 영생보다 물질에 더 마음을 두었기 때문에 영생을 포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심지 않고 어떻게 열매를 거둘 수 있으며, 뿌리지 않고 어떻게 추수를 하겠습니까?
물질을 심지 않고야 어떻게 물질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겠으며 은행에 저축하지 않고야 어떻게 돈을 찾겠습니까?

성경의 지혜 자는 “네 식물을 물에 뿌리라” 했습니다.
물에 뿌리라는 말은 세상을 향해 선한 일 행하라는 것입니다.
소유 중에서 얼마를 드려야 한다는 기준은 그 량에 있다기보다는 자신의 정성의 기준이라는 것을 성경은 보여 줍니다.
객관적인 기준은 하나님이 주신 것 중에서 10분의 1이지만 자신의 기준은 정성입니다.
물질은 청지기 같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잠시 맡겨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내 것이라는 소유욕에 너무 집착하는 생각보다 물질을 지혜롭게 관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 소유하는 욕심만 갖지 말고 수입된 것 중에서 소중한 것을 구분하여 하나님께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캐나다의 토론토시에 있는 인민의 교회를 시무 하시는 O. J 스미스 목사님은 350명이나 되는 선교사들을 파송 하였습니다.
한 번은 스미스 목사님이 미네아 폴리스에 있는 교회에 특별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입니다.
찬란한 옷을 입은 실업가가 밤 집회 후 강단 앞으로 나아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는 입을 열자마자 “이전에 나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졌었습니다.
실직을 하자 아내와 두 딸은 나가버리고 저는 누더기 옷차림의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의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마침 선교대회가 열렸고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주시오! 주시오! 하고 무리하게 부탁하지 마시고 먼저 드리시오! 그러면 얻습니다.”
나는 숙연히 앉아서 들었습니다. 나는 목사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시험하기 위해 예약헌금 카드에 이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액수 중에서 어떤 일정액을 드리도록 하는 약속을 기입하여 드렸습니다. 나는 그때 1센트도 없었습니다. 예약헌금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후 두 시간 후에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나는 최초의 급료 중에서 약속의 액수를 바쳤습니다. 오래지 않아서 승급했습니다. 이제는 더 많이 바쳤습니다. 그리고 새 양복을 샀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내와 두 딸도 돌아왔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바쳤습니다. 모든 부채도 다 갚았습니다. 그는 더 큰 소리로 “목사님! 지금 나는 미네아 폴리스에 내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행에는 예금액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목사님의 덕분입니다. 나는 목사님이 하시던 말씀대로 선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은 지금 나를 축복하셨습니다.” 하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번영하고 축복 받는 단계까지 오르는 사람은 지금 말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비결대로 먼저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받은 단계에 오르는 사람은 아무리 IMF라 할지라도 염려가 없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전도 사업을 위하고 교육사업 구제사업 봉사사업을 위해서 드려보십시오! 그러면 넘치도록 받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몸까지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마음만 바치거나 물질만 바치거나 부분만 바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성도들의 몸까지 산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은 박해자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죽음의 길을 택하고 나아갔습니다.
박해자들은 폴리갑에게 “한번만 예수를 모른다고 하면 살려 주겠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으면 장작더미 위에서 불에 태워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폴리갑은 “내가 86년을 주님을 섬겼는데 주님은 한 번도 나를 부인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주님을 부인하겠는가?”라고 하며 자신의 몸과 생명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림으로 장작더미 불 속에 타져 죽는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초대교회시절 순교자들이 많이 발생되었든 데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구차하게 육신의 삶을 바라지 않고 영혼이 구원받는 영생의 길을 택하여 자신들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예배에는 대개 시간의 여유가 있고 매이지 않은 성도들이 출석하는 성적이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기뻐 받으시는 것은 바쁜 몸 귀한 몸 신분이 높은 분들이 그 몸을 하나님께 바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물질이 궁핍할 때, 물질을 드리고 시간이 없을 때, 시간을 바치고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중에 몸을 드려서 주님을 섬길 때, 이 보다 귀한 정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쁘고 힘든 시간을 쪼개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려는 신앙으로 성장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죽기를 결심하고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로마에서 도망을 나올 때 이였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향하여 가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쿼바디스 도미네”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나는 네가 버린 로마에 가서 다시 십자가를 지려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쿼바디스 도미네”라고 한 질문이 유명한 말로 남겨지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다시 로마에 돌아가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몸을 주님께 드려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바울도 그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린 분입니다.
그는 로마 교인들에게 그 몸을 드리라고 하기 전에 이미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렸습니다(행 20:2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몸 전체를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그는 온 몸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33년의 짧은 생애를 살다가 죽으셨으나 주님이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 죽으심으로 그의 이름과 그의 삶은 인류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는 이름으로 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순교자들의 이름도 성도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거룩한 제물로 드리시오.......”

소는 사람이 평생을 일하도록 부려먹고 끝내는 잡아 죽여서 뿔로는 장식품을 만들고 고기는 부위별로 잘라서 곰탕으로 끓여먹고 불고기로 구워먹고 볶아먹고 장조림해서 먹습니다.
가죽으로는 옷을 만들고 신을 만들고 북을 만들어 두들기며 춤을 춥니다.
그래도 소들은 아무 불평도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쓰임을 받는 것일까요?

마태복음을 황소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도 주님이 죽기까지 말없이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도 황소처럼 몸과 생명과 살과 가죽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설교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필자는 설교집 5권을 출판하엿습니다.
필요하신분은 인쇠비만 주시면 보내 드리겟습니다.
cd도 2장있습니다.
아래로 연락주십시요.
010-8875-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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