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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5회 B. 감사와 기도(1:4-7) ; 감사, 삶의 기도, 사랑, 믿음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5-11-04 10:34
조회
761
B. 감사와 기도[1:4-7]

대개의 바울 서신들에는 보내는 자와 받는 대상을 밝힌 후에 축도를 하고, 감사와 기도를 기록하고 있다(롬 1:8-9, 고전 1:4, 엡 1:16, 빌 1:3, 골 1:3, 살전 1:2, 딤후 1:3).
본서에서도 바울은 【4】[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이라고 하였다.
[감사하고]는 유카리스토(εὐχαριστώ)로서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 현재 누리고 있는 은혜와 복 그리고 장차 받게 될 은혜와 복에 대한 감사를 지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한 바울의 감사에 있어서 빌레몬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기도할 때에]는 프로슈콘(προσευχών)으로서 간구를 포함하여 피조물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모든 태도와 말과 행동을 포괄하는 말이다(딤전 5:5, 엡 6:18, 빌 4:16).
감사는 기도의 날개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의 보좌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감사와 기도의 결합이란 하늘 창고를 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너를 말함은](μνείαν σου ποιούμενος)이란 ‘너를 기억하게 되는 것은’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앞 구절의 이유에 대해 【5】[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성도](하기우스, ἁγίους)는 디모데전서 5:10의 주석을 보라.
[사랑]은 아가펜(ἀγάπην)으로서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자연적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하나님의 본질적 사랑을 의미한다(사랑의 본질 및 속성에 관한 구체적인 주석은 저자의 고린도전서 13장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와 관련된 인간의 사랑을 논해야 할 것이다.
요한일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사랑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즉, 사랑이란 받을 자격이 없는 상대에게 상대의 요구대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상대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공로나 선행의 대가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형벌이 마땅한 대가일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화목제로 그 아들을 주신 것이 곧 사랑이다.
화목제로 주셨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참된 사랑이란 진리와 정의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고전 13:6)과, 또한 사랑은 상대의 조건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분출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놀라운 사랑은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을, 더욱이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인간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어져야만 하는 것이다(롬 5:5, 15:30).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것이다(딤전 1:5).
믿는 자가 수행해야 할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막 12:28-3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요(요일 5:3), 나아가 전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실상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시금석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요일 4:12, 20, 21, 5:2).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이 느끼고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영적인 면에나 정신적인 면, 또는 육체적인 면에나 물질적인 면에서 결핍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그들의 결핍을 채워 줌으로써 사랑을 실현해야 한다.
사랑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줄 것이 있느냐 함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은사와 복을 받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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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이유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와 복을 주시는 목적이다.
사랑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은, 남을 사랑할 조건이 완벽하게 구비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며, 또한 남을 사랑할 조건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가 오는 대로 현재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이란 영생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하는 것이다(행 3:1-10).
하나님 또는 인간을 사랑할 때, 우리의 사랑의 행위를 자기 의나 공로로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고, 또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소유와 지체 그리고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부터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참조: 갈 6:10).
사랑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요(마 22:40), 율법의 성취요(롬 13:8), 율법의 완성이요(롬 13:10), 최고한 법이요(약 2:8), 예수님의 새 계명(요 13:34)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 놀라운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것이다(딤전 1:5).
[믿음](피스틴, πίστιν)에 대해 홍현설 박사는 “신조나 신앙 고백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간적 행위에 대한 신뢰와 확고 또는 심리학적 의미의 내적 신념이 아니다.”①라고 말한 다음에, “새로운 창조의 주도자이시며, 세계의 화해자이시며, 모든 정의의 근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행위를 의미한다.……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성실하시기 때문에 결코 인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즉 신의 믿음직함(信實性)에 대한 우리의 신뢰, 이것이 바로 구원의 방편이 되는 신앙이다.”②라고 하였다.
바르트(K. Barth)는 “신앙은 우리가 그 위에 서 있는 근거지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삶, 사고, 의지, 감정 등의 전체에 관계되는 것이다. 신앙은 우리가 거기에 매어달리는 한 가닥의 끈이며, 그것으로 우리가 영양을 받는 유일한 음식이다.”③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믿음 곧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행위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요(엡 2:8, 마 16:17) 성령의 은사(고전 12:9)로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인간의 전 인격적인 응답이다.
전 인격적인 응답이란 인간의 삶, 즉 사고와 의지와 감정 및 행위의 전체가 하나님께 대해 복종적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연합하며 사는 생활이다. 이러한 관계를 맺는 “믿음의 결단은 이미 인간이 태어날 때, 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선재 은혜에 근거된 것이므로”(J. Wesley)④ 인간이 믿는 것은 인간의 공로일 수 없고, 반면에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믿음은 우리가 완전한 구원을 얻기까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방편이기도 하다(벧전 1:5).
아마도 바울은 빌레몬에 대한 소식을 에바브라(골 1:7-8, 4:12)나 오네시모(골 4:9)를 통해서 들었을 것이다.
이 구절과 병행되는 에베소서 1:15과 골로새서 1:4에는 믿음은 그리스도께, 사랑은 성도들에게 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또한 바울의 일반적인 사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이어(H. A. W. Meyer)와 비트(Beet)와 위너(Winer) 등은 이 구절의 믿음을 ‘신실’이나 ‘충실’ 또는 ‘성실’로 해석한다.⑤ 그러나 이 해석은 신약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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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에서 인용할 경우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홍현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서울: 기독교대한감리회 총리원, 1968), pp. 20-26.
2) Ibid., p. 130.
3) K. Barth, op. cit., p. 31.
4) 박장균, “웨슬레의 恩寵論” in 神學과 宣敎(서울신학대학, 1972), p. 73.
5) in M. R. Vin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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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용법과 부합하지 않으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이 구절은 전술한 바와 같이 주 예수께 대한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으로 해석되고 있다. 룸비(Lumby)는 “사랑은 교인들을 위해 나타나며, 믿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타난다. 그러나 그 둘은 그들이 참되게 존재하는 곳에서 굳게 결합하므로 바울은 그 둘을 가리켜,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들을 향해 똑같이 드러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⑥라고 풀이하고 있다.
앞 구절에서 항상 감사하고 기도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한 바울은, 이제는 기도의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6】[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교제]는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로서 {“파피루스에 쓴 고문서에는 ‘동업자’, ‘생의 동반자’, ‘결혼 계약’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A. T. Robertson). 또, 이 말은 “공통적인 목적에 있어서 공통적인 관심과 참여가 내포된 개인들 사이의 관계, 노동과 고통에 동정심을 가지고 동참하는 것, 복음의 확장에 있어서의 밀접한 연합”(M. R. Vincent)}(빌 1:5의 주석), ‘헌금 또는 동정’(롬 15:26), ‘기독교인간의 교제’(행 2:42, 갈 2:9, 빌 1:5), ‘그리스도 또는 성령과의 교통’(고후 13:13), ‘주님 또는 성령과의 교제’(고전 1:9, 빌 2:1), ‘소유의 나눔 또는 공유’(롬 12:13), ‘협력’(고전 10:16), ‘동참’(빌 3:10) 등을 의미한다.
[우리 가운데 있는]의 [우리](헤민, ἡμίν)는 A, C, D, K, L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א, F, G, P, 17, 31, 37, 80, 137 사본 등에는 “너희”(휘민, ὑμίν)로 되어 있다.⑦ 전후 문맥상 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
[선을 알게 하고]의 [알게](명사형인 에피그노세이, ἐπιγνώσει)는 디모데전서 2:4의 주석을 보라.
[역사하느니라]는 에네르게스(ἐνεργὴς)로서 ‘행하다’, ‘작용하다’, ‘능력을 주다’, ‘효과적으로 행하다’ 등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빌레몬의 믿음의 교제가 바울 일행 가운데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선을 아는 체험적 지식에 있어서 효과적이 되어 그리스도께 이르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마도 바울은 이 기도를 말함으로써, 빌레몬이 자신과 디모데가 오네시모를 위해 베풀고 있는 선을 충분히 알아서, 그 역시 오네시모를 형제로 영접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 같다.
끝으로, 바울은 빌레몬에게, 【7】[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라고 칭찬하였다.
[형제여](아델페, ἀδελφέ)는 1:1의 주석을 보라. 원문에는 문장 맨 뒤에 있어서 강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성도들](하기온, ἁγίων)은 디모데전서 5:10의 주석을 보라.
[마음]은 스플랑크나(σπλάγχνα)인데, {고전 헬라어에서는 원래 짐승이나 제물의 내장을 의미하였다. 특히, 장(엔테라, ἔντερα)과는 구별되는바 ‘심장’, ‘간’, ‘허파’, 콩팥을 의미하였다. 신약성경에서는 창자라는 물질적인 의미로 한 번 사용되었고(행 1:18), 그 외에는 사랑과 자비의 소재로 사용되었다(골 3:12, 요일 3:17, A. M. Hunter, R. H. Mounce)}(빌 1:8의 주석).
결국 성도들의 사랑과 자비의 소재인 마음이 빌레몬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평안함을 얻었으니]란 아나페파위타이(ἀναπέπαυται)로서, 원래 슬픔이나 고통을 그치게 하는 것을 뜻했으며, 여기서 참신해졌다거나 원기를 회복하였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마 11:28, 26:45, 막 6:31, 고전 16:18, 고후 7:13).
성도들이 원기를 회복하게 되었고, 따라서 옥중에 있는 바울에게까지 [많은 ‘기쁨’](카란, χαρὰν: 딤후 1:4의 주석을 보라.)과 [‘위로]’(파라클레신, παράκλησιν: 딤전 4:13의 “권하는 것”의 주석을 보라.)가 된 이유는, 빌레몬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아가페, ἀγάπῃ: 딤전 1:5의 주석을 보라.) 곧 구제와 자기 집을 교회로 사용하게 하는 등의 선교적 봉사이었다.
바울은 그러한 칭찬을 들려줌으로써 빌레몬으로 하여금 그의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까지도 그처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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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상동.
7) in M. R. Vincent.

ㅡ최세창, 목회서신, 빌레몬서(서울: 글벗사, 2002년 2판 2쇄), pp. 392-398.ㅡ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2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전체 4

  • 2015-11-04 20:28

    요한일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사랑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지난 주일 오후 예배에 아프리카 말라위 에서 선교사로 수고하는 김수지 선교사를 모시고 선교 보고 와 \'선교는 사명입니다\' 라는 말씀을 듣고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김수지 선교사는 이화여대 간호대학 학장을 은퇴하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열악한 빈국 말라위의 선교상황을 보고 하면서 말라위 사람들은 zikomo (감사)를 입에 달고 산다, 어떤 경우에도 남의욕을 하지 않는다,무엇이 든지 이웃과 나눈다 고 합니다. 최목사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 2015-11-04 21:20

    김정효 장로님, 필자의 설교를 귀한 말씀으로 여기시고, 관련하여 김수지 선교사 님의 선교 이야기를 소개하셔서 감사합니다.


  • 2015-11-05 09:56

    아마도 말라위는 아프리카의 처음 사람들의 땅일것입니다. 맏알움잇.
    첫 생명을 잉태하고 자라나게 한 땅이 제일 빈국으로 됨은 아이러니지만 말라위라는 국명을 바궈야할지 모릅니다.
    말라도 너무 말라잇어.

    그리고 아멘,


  • 2015-11-05 15:15

    필자의 주석에 대한 관심과 댓글에 관련된 언어 분석과 유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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