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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7회 B. a. 오네시모를 위한 바울의 부탁[1:15-19] cf. 신학교와 교단 문제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5-12-02 09:50
조회
750
현실을 현실 그대로가 아니라, 항상 신앙의 눈으로 파악하고 대처하는 바울은, 또한 빌레몬과 그의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의 문제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15】[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라고 설명하였다.
원문에는 문장 앞에 가르(γὰρ: 왜냐하면)가 있어서 앞 구절(1:14)과 연결되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즉, 빌레몬의 승락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단하게 된 부수적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잠시]와 [영원히]를 대조시킨 것은 하나님의 손이 그 전체 상황 속에서 역사하셨다는 바울의 확신을 보여 주고 있다”(A. A. Rupprecht, p. 497).
[떠나게 된 것은]이란 수동태인 에코리스테(ἐχωρίσθη)이다. 이 낱말은 진귀한 재치로 선택된 것이다. 바울은 빌레몬의 분노를 자극할지도 모를 ‘도망했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M. R. Vincent). 또한, 그는 빌레몬으로 하여금 책임을 추궁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지도 모를 ‘추방했다’는 표현도 쓰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표현은 요셉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5).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라고 한 바울은, 빌레몬에게도 오네시모의 문제 역시 그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일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뜻 또는 섭리를 해석하는 데 매우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단언하는 대신에 “아마“(원문에는 문장 맨 앞에 타카, τὰχα가 있다.) 그런 것 같다고 한다. 그는 신령한 체험을 한 성도들이, 마치 하나님의 뜻이나 섭리를 속속들이 다 아는 것처럼 자만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이나 섭리에 대해 늘 조심스런 태도를 견지하였다.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자신의 뜻이나 생각 그리고 그에 의한 성공이나 실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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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이라고 오판하는지 모른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떠나게 된 이유는 오네시모를 영원히 두게 함인 것 같다고 한다. 여기의 [두게 함이니]는 아페케스(ἀπέχῃς)로서 완전한 소유를 의미하고 있다. {이 말(아페코, ἀπέχω)은 완전히 받았다는 뜻이며, 상업용으로 사용된 파피루스와 패각 등에서 흔히 발견되는 말이다. 이것은 영수증에 사용되는 용어이다}(빌 4:18의 “있고”의 주석).
바울의 취지는, 이제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주종 관계는 인위적인 것이나 죽음에 의해 갈라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영원한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형제로서 ‘서로에게 소유 된 영원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16】[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성도가 된바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참조: 골 4:9의 주석.) [형제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전에 전혀 관계가 없었던 자신에게 있어서도 특별히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육신](사르키, σαρκὶ) 곧 육적(인간적)으로는 주종 관계이며, 또한 이제 [주 안에서](딤전 1:14의 “그리스도 안에”의 주석을 보라.) 영적 관계를 맺게 된 빌레몬에게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에게 복음의 신세를 진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가리켜 자기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고 높이 천거함으로써, 빌레몬으로 하여금 오네시모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은근히 유도하고 있다. 그의 놀라운 표현의 기교는 비천한 노예를 어떻게 해서든지 도우려고 하는 고귀한 정신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17】[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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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는 코이노논(κοινωνόν)으로서 단순히 동무나 친구를 뜻하는 필로스(φίλος)와 달리, ‘공동 경영자’, ‘협력자’, ‘동반자’를 의미한다. 즉, “네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네 것이다”(J. A. Bengel)라는 사이를 말한다. 이 낱말과 그 동족 동사는 신약성경에서는 거의 배타적으로 윤리적이며 영적인 관계로 사용되었다(M. R. Vincent).
바울은 제자인 빌레몬에게 자기를 신령한 일의 동역자로 여긴다면, 오네시모를 [영접하기](프로스라부, προσλαβού) 곧 호의로 받아들이기를 자기에게 하듯 하라고 요청하였다. 실로 바울은 자신과 빌레몬과 오네시모 모두를 신령한 일의 동업자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만 해 놓고 내버려두는 무관심이 아니라, 그의 믿음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는 사랑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바울의 사랑은 그로 인해 믿고 구원받은 오네시모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믿음의 형제로 영접해 주도록 간곡히 부탁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네시모의 빚을 대신 변상해 주겠다고 제안한다. 【18】[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여기서 바울은 오네시모에게서 들은 것으로 짐작되는 오네시모의 죄상을 언급하고 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끼친 [불의]는 도망친 것, 시킨 일을 성취하지 못한 것, 종살이 하는 동안 충실하지 못한 것, 돈을 훔친 것 등으로 추측할 수 있다.① 그가 비용이 많이 드는 로마까지 도망한 것을 미루어 빌레몬의 돈을 훔쳤다고 할 수 있다.
[진 것]은 오페이레이(ὀφείλει)로서 ‘빛을 지는 것’(마 18:28, 30), ‘의무 아래 있는 것’(마 23:16), ‘죄를 범하는 것’(눅 11:4) 등을 의미한다. “당시의 세속 법정에서 노예는 주인에 대해 채무자나 채권자일 수가 없었으므로, 여기서는 변상해야 할 횡령금이나 훔친 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S. J. Eales).
오네시모 때문에 입은 빌레몬의 손해가 무엇이든 간에, 바울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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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에 대해 [내게로 회계하라](에모이 엘로게이, ἐμοὶ ἐλλόγει), 즉 자신에게로 셈하거나, 자신에게로 돌리라고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자기가 대신 변상해 주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의 사랑은 절정에 달한다. 이것은 곧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심으로써 그 대가를 치르신 그리스도의 속죄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비천한 노예, 그것도 도망친 노예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나 모든 사람 앞에서 자유롭게 온전히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바울의 끈질긴 사랑의 집념을 보라!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한 자신의 대리 변상이 해 보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19】[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하였다.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의 [쓰노니]는 에그라파(ἔγραψα)로서 서신체 부정 과거형이다. 즉, 편지를 받아 보는 시점에서 보는 시제를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은 보통 편지를 대필시키고 끝에 가서 “나 바울이 친필로 문안하노라”라고 서명하곤 하였다(롬 16:22, 고전 16:21, 골 4:18, 살후 3:17). “이것도 당시의 풍속으로서 지금 남아 있는 파피리(Papyri) 단편에는 편지 전체와 어울리지 않는 부자유스런 솜씨로 최후의 서명이 가해져 있는 것이 많다 한다”(이상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에 대해서는 다른 서신처럼 받아쓰게 한 후에 이 부분에 와서야 직접 쓴 것이라는 설②과 본서 전체를 직접 쓴 것이라는 설③이 있으나, 그 어느 설도 유력한 증거는 없다.
아무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라는 표현은 당시의 약속 어음의 형식이었다.④ “예컨대 이런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을 우리가 갚으리라. 내 파포스가 그를 위하여 쓰노니…’(Deisssmann). 그렇다면 본서는 이 부분에 와서 차용 문서로 화한 것이다. 전절에서 “내게로 회계하라”라고 한 바울은, 여기서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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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 차용 문서를 준 것이다. 그는 이론의 사람이 아니라 의로운 일에는 주저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었다”(이상근).
바울은 돌연히 논조를 바꾸어, 빌레몬이 자기에게 신세진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빛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하였다. 즉, 빌레몬이 바울의 전도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여 영생을 얻은 것은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무한한 은혜라는 것이다.
바울에 대한 빌레몬의 영적인 빚은 빌레몬에 대한 오네시모의 육적인 빚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빌레몬이 바울의 부탁을 들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빛을 탕감해 주고, 더 나아가 바울에게까지 돌려보낼 만도 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할 말을 다 하면서도 상대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게 하는 바울의 차원 높은 표현의 기교를 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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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해)서에서 인용할 경우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을 밝혔음.
1) 참조: A. A. Rupprecht, p. 407. 빌레몬의 손해라는 것은 빌레몬에게 많은 소득을 얻게 해 준 고도의 숙련된 노예가 도망감으로써 생겨난 결과일지도 모른다. 사실상, 그리스, 로마 시대의 노예 값은 그 노예의 기술과 경제적 가치에 직접 비례하였다. 단조롭고 기계적인 힘든 일을 하는 노예는 단지 500데나리온(1데나리온은 한 노동자의 일반적인 하루 급료이었다.)에 팔렸으나, 숙련된 선생들, 의사 그리고 배우들은 백 배나 비싼 값으로 매매되었다.
2) “Scott”(in 이상근), A. Barnes, G. H. P, Thompson, J. Knox, 이상근.
3) “Lightfoot, De Wette, Oltr.”(in M. R. Vincent), H. Alford, A. Barry, A. Clarke, W. Hendriksen.
4) “Deissmann, Milligan”(in 이상근), G. A. Buttrick, G. E. Failing, A. A. Rupprecht, p. 498, W. Hendriksen.

출처: 최세창, 목회서신, 빌레몬서(서울: 글벗사, 2002년 2판 2쇄), pp. 404-409.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3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전체 2

  • 2015-12-02 17:02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자신의 뜻이나 생각 그리고 그에 의한 성공이나 실패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오판하는지 모른다.
    그의(바울) 놀라운 표현의 기교는 비천한 노예를 어떻게 해서든지 도우려고 하는 고귀한 정신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만 해 놓고 내버려두는 무관심이 아니라, 그의 믿음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는 사랑을 보여 주었다.
    바울 그는 이론의 사람이 아니라 의로운 일에는 주저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었다”(이상근). 최세창 목사님 오늘도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 2015-12-03 08:32

    김정효 장로님, 필자의 주석을 애독하시고, 특비 더욱 공감되는 부분을 적시하셔서 감사합니다.
    신학교 문제와 교단의 문제가 심각한 이때에 주님을 본받은 바울과 같은 복음의 신학과 복음의 사랑을 하는 인물이 정말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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