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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 구원 교리의 근거요 최고의 재판정이다.

작성자
현종서
작성일
2023-04-29 17:29
조회
538
“역사적 비평적 신학의 이성적 기초의 극복”
이 제목은 세계적 선교신학자(Dr. Peter.Beyerhaus): 독일 튀빙겐대 명예교수, 루터교 목사, 당시 93세 노구를 이끌고 그런데도 영어로 강의, 몰트만은 영어로 강의 못한다. 2003전 연세대 용재기념 특별 초청교수로 오시어 1년간 강의한 내용중 한 강좌의 제목이다.

대강 건너뛰며 중요한 내용들만을 소개할 까 한다.

1.개혁사상의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
교황주의자들과 말틴 루터의 논쟁에서 한 구체적인 질문은 이것이었다. 무엇을 일반 그리스도인들, 더욱 전문화된 교회 교사들은 그들의 교리적 진술을 위한 원천과 자막대기로 여겨야 하는가?
루터의 반대자들은 신부들과 회의들의 전승으로부터 취한 논의로서 그를 논박하려고 애를 썼다. 루터는 성경만이 모든 설교와 가르침의 규범적 근본이라는 원리를 확고하게 주장하였다. 그래서 “오직성경”만이라는 슬로건은 복음적 신앙과 행동의 기반암(견고한 근거)이 되었다. 성경의 권위에 관한 탁월한 강조는 1577년의 콩코드 신앙고백(신경)에 이르는 안내서를 이끌어 내었다.
구약과 신약의 예언적 사도적 기록들만이 유일한 규범이고 자 막대기이다. (그에 따라 모든 교리들과 교사들이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믿고 가르치고 고백한다.그러나 고대와 현대 교사들이 다른 기록들은 그것들이 비록 유명할지라도 성경과 동등한 것으로 주장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전적으로 성경에 종속되어야 하고 증언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는 유사한 주장들이 개혁시대에 모든 다른 고백적 진술들 속에서 만들어 졌다. 나는 단지 칼빈 주의자 ”헬베틱 고백“(Helvetic confession)(1566), ”영국교회의 39개조“(1571)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고백“(1647)을 언급한다.
우리의 세대속에 이 전승은 복음적 운동이 선교선언에서 갱신되었으니, 즉 휘튼(wheaton)(1966)“프랑크프르트”(1970),“로잔”(1974),“서울”(1975) 이다.
개혁은 성경을 교리의 유일한 기반이라고 믿었다. 그 성경은 교회내에서 최고의 가르치는 역할을 견지하였다.
정통 루터교인들은 결론적으로 그 성경을 입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내재적인 품질 때문에 그것의 사역을 충분히 실천할 수 있었다. 성경은 평신도들에게 혼란스러운 모호성이 가득한 것이었다하는 로마 캐톨릭의 논증을 논파하여 루터교 신학자들은 성령의 영감에 대한 매우 짧은 교리를 발전시켰다. 인간의 결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인간기록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그것이 나타났을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완전한 무오류의 본질을 가졌으니 성령께서 절대 무오류의 분이기 때문이다. 그 교리는 믿음과 윤리에 대한 질문뿐만이 아니라 또한 구원에 필수적으로 모든 지식에 분명하고 충분한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그래서 성경의 명백성과 명쾌성은 신학적인 인식론에 있어서 중심적인 개신교 교리라고 불리울 수 있었다. 성경은 이해하기 위해 믿는 것이며, 해석의 보충적 수단이 외부로부터 요구되지 않는다. 설사 성경의 내적인 증거는 어디서나 동일하지 않을지라도 성경은 성경자체의 그리고 유일한 해석자이며,이해 안되고 어려운 구절은 명백하고 분명한 다른 성경구절들의 빛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절차는 변함없이 성경의 다른 진술들에 나타날 수 있는 어떠한 가시적 대조까지 변함없이 해결해 주었다.

II. 오늘날 변화된 해석학적 정황

성경권위의 교리는 현대신학의 지적 지도자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질문되었다.1960후기 1970초기에 그들의 관심은 사회적인 정치적인 성격에게 두었고 그들의 사고위에 격렬한 맑시스트의 영향을 들어내었다. 성경의 권위,신빙성,그리고 내적인 통일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무너지는 것이 학문적 주석과 학파들의 연속되는 비판적 접근과 자의적인 해석에 의해 야기 되었다.

III. 문학역사의 일부로 보는 성경
성서해석에 순수한 이성적 접근을 발전시킨 첫 개신교 신학자는 죤 살로모 셈러(Salomo Semler, 1725-71)였다. 그는 경건주의적 교육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며 게몽주의의 이신론적 철학의 영향에 자신을 개방하였다. 그에게 인간이성은 모든 영역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였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하였다.
1. 성경의 신적인 영감은 근본적으로 논파되었다. 성경경전의 비평주의 즉 인증된 문서들의 수집은 역사과학의 수단들에 의해 시행된다.
2.각기 박식한 그리스도인 개인은 어느 성경기록들이 그의 개인의 신앙에 중요한지 결정한다.
3.구약성경은 유대민족에게만 중요하다. 보편적인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신약성경안에 담겨있다.
4.과학적 해석의 과제는 그들시대의 상황들에 의해 조건지워진 성경의 기록들안에 그런 요소들을 식별하여 버리는 것이다.
5.성경속에 “유일한” 종교윤리적 진리가 신적 근원을 갖는다.
6.학문적 신학은 그것이 과학적 연구와 가르치 때문에 완전한 자유가 부여되어야 만 한다.
7.모든 신학적 진술은 역사적으로 그들의 시대에 조건지워지고 따라서 단지 진리에 대한 상대적인 표현이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그들에게는 구속하는 힘이 없다.결론적으로 샘러는 기독교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기술하기를 거절한다.
8. 기독교와 비기독교 종교들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세계계획‘의 요소들이다. - 그들 사이의 거리는 심각하게 축소된다.19세기 말에 이성적인 사상들은 실천적으로 신학자들과 교회 생활까지 지배하였다.이 방법은 지적으로 정직하고 수락할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이 가치판단은 대학교, 신학교에서 오늘날 까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것의 목표는 한 성경본문위에 자신을 기반으로 하는 어떤 신학적 서술의 지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에벨링(Gerhard Ebeling)은 이방법을 종교개혁이래 개신교신학의 가장 중요한 성취라고 보았다. 한편 성경을 중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방법은 그들의 신앙에 깊은 해를 끼치고 있는 것을 두려워 한다.그리고 그것을 모든 악의 뿌리라고 여겼다.

IV. 역사 비평적 방법

1. 용어의 의미
“역사적-비평적 방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성경의 과학적 연구에 사용된 도구들의 전 복합체를 말한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두가지 다른 관심,
한 역사적인 관심은 성경책들의 복잡한 근원을 추적한다. 그것은 어떤 상황들과 전승들이 성경저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는가를 질문한다. 그리고 다른 비판적인 관심은 그것의 형식과 내용에 관하여 특수 본문의 신빙성과 타당성을 탐색한다. 역사적 비판적 방법은 보통 세가지 주요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본문 비평,문학비평,고등비평, 본문비평은 고대 성경사본들과 비교하고 그 본문의 본래의 단어배열을 수립하고져 한다. 문헌비평은 성경책의 자귀의 성실성을 수립하고져 한다. : 그것은 내적인 통일성이 있는가? 그것은 한 저자에 의해서만 기록되었는가? 그것은 실제로 누구를 대상으로 하여 기록되었는가? 우리는 역사 또는 구전과 수정을 추적할 수 있는가? 그렇게 역사적인 충돌속에서 무슨관심이 발견될 수 있는가? 문헌비판의 중요한 부분은 양식비판이다.그것은 질문하기를 무슨 성질이 하나의 특수한 성경책을 만드는 다른 문학단위들인가? 그것들은 역사적인 설명,찬송,법적인 문서,신경, 신학적 講話일 수 있다.

2. 역사적 조망의 올바른 사용
우리는 한 학문적 방식에서 성경본문에 바람직한 접근방식을 발견해야만 한다. 기독교공동체의 신앙은 항상 심각한 연구에 의해서 부요해져 왔다. 창조, 십자가, 그리고 부활에 대한 성경적 설명은 밀접히 결합시킨 교의학적 체계에도 놓여지지 않고 역사적인 사건들의 끊어지지 않는 사슬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그들의 원초적인 의도는 철학적 사유나 역사적인 관심의 욕망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에 대한 그의 주권적인 계획에 따라 그의 백성들을 옛 그리고 새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신비한 방법을 증언한다.

3. 비판과 역사적 관점들의 비합리적 적용
우리는 성경에 대한 역사적 비평적 점검이 엄청난 위험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것들은 한가지 사실로부터 일어난다. 그것에 대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유의하지 않고 있다. 과학이나 에술은 어떤 전제 없이 절대적 객관적으로 작업을 할 수 없고 역으로 연구방법들의 선택과 평가- 그리고 다음 그것의 결과- 관찰과 자신이 선택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이 미리 정해 진다. 이 원리는 인문학과 과학의 다양한 지체들에게 다른 수준으로 적용된다. 오랜기간동안 역사적 비평적 연구로 작업하는 방법들은 비판적 신학자 자신에 의해 은밀하게 미리 결정하여 왔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의 실제개념의 절대성과 그것의 지식을 아는 방법에 경솔하고 부당한 신앙을 주장하였다.아마도 그것은 이성주의,이념주의나 또는 최근에 변증법적 유물론일지언정 그 외 아무것도 아닌 것을 구성하였다.그것에 의하여 신학자들은 신적인 통찰을 얻는 참된 방법을 자주 운명적으로 차단하였던 것이다.

4. 세가지 숙명적인 전제들
(1). 데카르트(1536-1650) 와 칸트(1782-1804) 철학자들에 의해 인식론적 이론에 통찰력을 얻는 선험적인 방법에 연결된다.그것들은 에른스트 트롤취(1865-1923)에 의한 신학에 분명히 적용되어 왔다. 이 지식을 얻는 이론은 그것의 중심에 그가 자기의 대상으로서 얻기 원하는 것을 대면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놓는다. 그러나 인간이 그가 얻기 원하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통찰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그의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는 지식을 얻는 범주에 의해 제한된다. 그래서 그는 그것들이 그에게 나타나는 대로 의 물건들에 통찰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루돌프 불트만의 실존주의 학파의 경우, 우리의 지식이라는 것이 경험적 한계아래 있다고 주장하다보니 천국이나 죽음이후의 생명과 같은 형이상학적 대상들에 대해 객관적인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주장된다. 그리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이비 과학적 세계관에 자발적 종속행위에 의해 현대신학자들은 모든 성경의 기적들을 자연의 닫혀진 체계이해에 따라 판단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1941년 불트만은 그 유명한 비신화화 프로그램속에서 성경의 기적사건들에 “ 폐기 되다”는 꼬리표들을 붙여 놓았다. “그리스도가 음부에 들어가심과 천국에 올리우심에 대한 이야기”는 폐기되었다. 하늘의 구름속에 오시는 “인자”의 대망과 공중에서 그와 만나는 신앙인의 휴거“는 폐기되었다. ”영들과 귀신들에 대한 신앙“ ”신비적인 종말론“은 폐기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이성적인 관점의 지속적인 적용은 기독교의 신조의 중심적 주장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음을 본다.

(2) 어떤 성경저자나 본문을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슨 다른 저자들과 전승들을 대하여 개별적인 명백성을 가운데 있다고 항상 추정한다. 그러다 보니 모든 성격 본문들의 내적 일관성이 자주 간과된다. 많은 역사비평학자들이 양식비평과 고등비평의 철저한 방법들을 적용하여 연구하다보니 구약과 신약을 더 적은 단위로 쪼개고 외견상 모순된 요소들도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구약과 신약의 공통신학이나 전체의 성경신학을 말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대신 “성경적 신학”은 많은 수의 신학들,인간의 개념들,의견들,개별 저자들의 재해석들로 무너져 왔다.그러한 신학자들을 따르는 성경독자들은 성경의 권위와 규범적 표준 감각을 상실하였다.
(3) 성경본문의 의도를 그 본문에서 찾기보다 다른 철학의 원리로부터 찾으려할 때 참신한듯하나 본문과 상관없는 해석을 하게 된다. 그 예로 불트만의 하이덱거의 실존 철학의 원리로 성경을 해석할 때, 원래의 뜻에서 한참 벗어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5. 사회정치적인 개입의 신학
몰트만과 같은 전위신학자들-그들은 인류가 전체적으로 사회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세계질서의 구조를 고쳐 만드는 강력한 수고로 끌어들여 새 기원으로 확신을 가지고 진입하였으니,“역사”,“사회구조” 또는 “유토피아 비젼”같은 것이다.-혁명, 자유화, 여성주의로 가는 길을 열었다.

실존주의자, 그리고 정치 신학자들은 성경의 실제 메시지를 침묵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계속으로 안내하고 있다.

V. 영적인 해석- 성경에 갱신된 영적인 접근

1.성경적 권위의 재확인
오늘날 서구신학에서 발견하는 황폐한 신학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나의 의도가 아니다.
나의 오늘의 도전은 성경을 1). 구원의 역사속에 있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행위와 계시된 말씀의 규범적인 구체화로서 재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사회-종교적으로 연구하려고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통해 직접 우리에게 산 말씀을 하시는 주님께 물어보려고 성경을 읽도록 불리우고 있다. 동일한 방식으로 그는 한 때 예언자들, 복음 전도자들,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듯이 그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그는 여전히 우리 현대세대에도 목자되시기를 원하고 달래고 권고하고 경고하기를 원하고 여전히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신뢰에 빠진 학자들의 독재성으로부터 우리자신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가장 필수적인 일이다. 특별히 그들이 주장하는 바, "과학적인 접근"이 성경의 참된 이해를 얻는 유일하게 가능한 것이라고 선전하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해방되는 일이다.
나는 성경을 중시하는 동료 학자들과 더불어 우리 학생들에게 “과학적으로 수립된 다른 신학적 허구를 선언하는 것보다 비 과학적인 없다고 설명하는데 힘든 줄 몰랐다. 나는 그러한 설명이 거의 일종의 제마행위(Exorcism)와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놀랍게도 학생들을 자유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최근에 설득력있는 해석학적 체계에 의해 낙심하였던 저 젊은 신학자들은 유모어 감각을 거의 잃었었는데, 지금, 그들은 다시 열린 성경이 그들에게 준 영적 삶의 기쁨으로 넘치게 되었다. 그들은 다시 기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성경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들은 주님과 인격적인 삶을 경험하였다. 주님은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그의 무덤이 그를 지킬 수 없었던 것과 꼭같이 시대에 뒤 떨어진 과학적 이론이 그들을 희미한 철학적 이념으로 증발시킬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그것은 찬사를 위해 근사한 모델- 예수”타자를 위한 사람“, ”혁명가“, ”슈퍼 스타“로 변화시킬 수 없었다.

2. 성령과 해석학

나는 이미 현대 학문적 해석에 철학적 필수 조건적 해석학적 접근의 분파를 따라야만 하는 적극적인 단계를 예상하였다. 우리는 부적절한 첫 번째 단계를 “비신화화의 비신화화”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들의 해석 방법을 이해하는 그들 자신의 철학적 원리를 소개한 현대신학자들은 하나의 정확한 진실을 소개하였다. 전제조건 없는 성경이해는 없다.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시종일관한 이해로 이끄는 해석학적인 열쇄가 필요하다. 성경원문들에 대한 참되고 역사적인 접근들은 어느 수준까지 성경책이 기록되어온 외적인 상황을 명백히 해준다. 그러므로 이미 프랑케(August Hermann Franke)가 문법적인 방법이라고 부른 것을 실천하였다.
그리고 최근에 복음주의적 학자들은 그들의 모범적 역사적 방법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주어진 기존 성경본문의 단어나열과 그것의 본래적 역사적 상황모드를 예리하게 분석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없어서는 안될 연습은 우리에게 성문서의 내적 이해에 접근하게 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견과 껍질을 깨뜨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프랑케가 표현하였듯이 그러나 지금 여러분은 그 책의 단 맛을 맛보는 데로 나아가야 만 한다. 누구도 문자적 종류룰 일체화 또는 성경본문의 역사적 자리매김을 함으로서 접하거나 압도될 수 없다. 그래서 설교자는 그의 설교를 위한 이목을 끄는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히려 이해의 결정적인 행위는 그 본문안에 그리고 그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권위가 이미 이 권위에 대하여 말씀되도록 기울어진 내 안에 어떤 것과 만나는 순간에 일어난다.
같은 방식으로 비 음악적인 학자는 음악의 역사로부터 몇가지 서지학적 또는 통계학적 데이터를 편집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하나의 오라토리오(성담곡)를 즐길 수가 없고 그것을 이해할 수 조차 없을 것이다. 이것 역시 왜 참된 신자들이 자주 현대주의자(자유주의 신학자)의 설교를 들을 때 감동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아무래도 설교자 자신은 저 본질적인 내적 이해를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회중이 가락을 맞출 수 있는 길이의 파장으로 전이시키지 못한다.
요한 복음 10장의 말씀을 들으라 “ 나의 양은 나의 음성을 듣고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그들은 낯선 자를 따르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그들을 피해 도망할 것이다.왜냐 하면 그 낯선 자들의 음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사전달의 틈바구니는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양들이 아니라면 그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자들로 말미암을 수 있다는 것을 첨언한다.
성경과 회중 사이의 의사소통은 양편이 같은 신적인 힘,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가능해 질 수 있었다. 그는 하나의 살아있는 신의 인격으로 그들안에 머무신다. 회중이 성령의 전인 것 과 꼭같이 (딤후 3:16절에 따라)성령은 “ theopneutos” 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감동된 것이라는 뜻과 꼭같은 것이다.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미래의 전진이나 우리교회의 쇠퇴가 성령의 영감에 분명한 “예”를 말하는 우리의 읽기에 달려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방식(성령의 감동하에 읽기)으로만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오도된 해석학적인 접근들에 의해서 상실된 (성경의) 통일성과 권위를 다시 찾게 할 것이다.

3. 결정적인 과제

나는 성령의 영감의 새로운 수락을 위한 요구는 가까운 장래에 신학의 중요한 장 앞에 결정적인 과제로 놓여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 과제는 성령의 권위있는 주장에 문학적인 연구의 순수한 결과가 역사안에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본질적인 문자의 구체화가 되도록 관련시키는 것이다.
성경의 역사적 근원속으로 과학적 문법적 연구는 선하고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본문의 본 저자는 성령이라는 것을 유의하는 한에서 만 그러한 것이다. 그는 초대교회에 의해 이해되고 받아들인 구약과 신약의 척도(canon)속에 그것의 최종적인 규범적 꼴 속에 이 본문을 우리에게 준 분이다. 성령은 성경본문들을 이해하고 보존하고 편집하고 교정해 온 모든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기록된 세계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을 만나듯 듣는다. 직접적으로 가끔은 우리의 혀대적 이해에 다소 모호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문화적 변화에 다시 기록되거나 다시 형성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어느 철학적인 원리들에 의해 재해석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했듯이 그리고 이세기초에 석기시대 문화속에 있는 파푸아 인들에게 말씀했듯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우리의 시간과 공간속에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변화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 본문이 아니다.오히려 이해에 있어서 그들의 어려움을 야기시키는 인간들의 내적인 태도인 것이다. 그것은 성령 자신이 내부로부터 우리를 사로 잡을 때 일어날 수 있고 우리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고 우리의 왜곡된 이성을 재생시키고 조명한다. 그리고 우리를 그의 아들의 형상으로 전이시킨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은 믿음과 세계에 의해 또한 아들됨의 영을 받아 들였다. 그것이 성경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의 자신의 음성을 듣고 인식하는 것은 우리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인 것이다.
아들됨의 영을 받지 못한 사람은 바울의 말씀을 따라 여전히 “자연인”에 불과한 것이다. 그에게 심판이 적용된다. :“ 비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것들이 그에게 어리석은 것이고 그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적으로 식별되기 때문이다.”(고전2:14)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고백하도록 칭호를 받았다. :“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로이 주신 것들을 우리가 알 수 있기 위해 하나님게로부터 온 영을 받아들였다.”(5:12)
지금 영적인 인간과 자연적인 인간사이의 관계성은 사회학적으로분리된 그룹들의 하나가 아니다. 그들 자신의 자연적 이성에 상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영역을 떠나고 있고 다시 자연적인 인간들이 된다. 기독교 신학자는 그가 성령안에서 그리고 믿음의 순종안에서 성경에 접근하는 정도만큼 성경속에서 순수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유럽, 미국에서 그리고 부분적으로 아시아에서도 역시 우리의 신학과 우리의 교회들의 치료는 만일 우리가 회개하며 성령의 인도를 믿는 가운데 우리의 이성을 종속시킨다면 일어날 수 있다. 이 인도는 성령안에서 개인적인 생활에 의해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제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계속적인 자기-해명에 귀를 귀울임으로서만 얻어질 수 있다. 신학자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방법들의 철저한 적용만을 존경하는 성경의 자의적인 해석자들로 행동하는 한 결코 교회의 스승이 되기를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성령께서 당신의 에너지를 펼치는 장에 들어가는 정도로만 교회의 확실한 교사들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역사적인 비평들보다는 오히려 겸손히 하나님의 신비들의 신실한 청지기로서 증인들의 사슬고리에 연결되어야 한다.
( 세계적인 복음주의자로 알려진 이분의 이 강의안은 목회하는목사, 교수,신학생들에게 값진 정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명도 성경속에 자세히 구분되어 나타난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이지 에로스, 스톨게, 필리아 또 이교의 "orgy"도 아니다.)



전체 10

  • 2023-05-07 22:38

    이 현석목사의 도전적 언사에 일일히 답변할 여유가 없습니다. "장로회는 말씀이요, 감리회는 사랑이라"는 말은 얼마나 단순화한 것입니까? 그리고 내가 근본주의자라 그런 글들을 올리나요?. 교회에서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라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오는 사랑이요, 성경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그런 사랑에 대해 침묵하나요? 루터만 성경을 표준으로 삼고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는 성경을 표준으로 삼지 않나요? 왜 자꾸 갈라치기를 하는 것이지요? 나 역시 감리교도로 웨슬리 신학으로 결론을 맺는 편이지만 타 교파에서도 장점이나 더 발전된 것은 배우고 바르게 이해 할 필요가 있다고 보지요. 방향을 바꾸라는 것도 내가 무엇을 지향하는 목사인지 알고나 하는 말인가요? 성경을 이해 해도 간략히 넘어 간 부분이 있는 가 하면, 심도있게 다룬 부분이 있지요. 신학들도 그러합니다. 장로회나 침례회에서 더 잘 그리고 심도 있게 가르치는 부분들이 있지요 감리회는 체험과 행위면에 강조가 있습니다.신학적적인 논쟁에서는 장로교회가 자기 교리를 지키려는 노력을 많이 한 편입니다. 우리 한기감의 신학적 정체성은 "열린 복음주의" 로서, 복음주의로 결론을 낼지라도 "열린"- 여러 관련학문에 대해 열려있는 자세입니다. 웨슬리만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장로교측은 교리에 대한 변증이 우리보다 많이 발전되어 있습니다. 우린 변증학을 아예 안 배우지요, 자기 좁은 신학세계로 타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신학세계"를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됩니다. 이 목사에게는 학문적인 겸손이 요청됩니다.


  • 2023-04-29 18:05

    감리교회 목사가 개혁주의(장로교회) 신학을 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감리교회 목사들이, 개혁주의 신학을 배워와서, '너는 자유주의고, 나는 복음주의다'라고 말하니까, 우스운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너는 복음주의고, 나는 개혁주의다'라고 말해야죠. 그래야, 토론이 제대로 되죠.

    본래 감리교회는 신학이니, 교리니, 잘 안 따집니다. 은혜로운 교단이지요.
    요즘, 개혁주의 신학을 가지고 하도 따지니까, 제대로 따져보자는 겁니다.

    아브라함때 성경이 있었나요?
    '하나님의 사랑'과 '성경'중에, 하나님의 사랑이 더 본질적입니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8-9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2.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요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에 성경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셨고,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교황의 교서를 반박하기 위하여, 성경을 표준으로 제시했습니다,
    즉, 교황의 교서가 표준이 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은, 교황처럼, 자신들의 교서를 계속 강요하고 있습니다.

    현목사님께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신 분이시니, 지금이라도 그 방향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 2023-04-29 19:40

    참 길게 도 쓴다.
    개혁신학이란? 미국 매파 반공주의가 어용교회를 위한 어용이론으로 개발한 것.

    =. 난 안 믿는다. 개혁이나 혁신 등.
    = 정춘수의 혁신교단이나 전용* 감독회장 시절 박경*의 개혁특위 등


  • 2023-04-30 08:10

    웨슬리의 신학은 루터, 칼빈 성공회를 거치면서 종교개혁의 완성격으로 성경, 지성, 전통, 체험을 담아 형성된 신학이지요.
    이목사 덕분에 일찌기 사두고 읽지 못한 책들을 다시 들쳐 보게 되니 이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 2023-04-30 17:01

    게시하신 내용을 읽어 보았으며, 아래 인용은 제게 중요한 시사점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V. 영적인 해석- 성경에 갱신된 영적인 접근
    1. 성경적 권위의 재확인; 우리는 성경을 사회-종교적으로 연구하려고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통해 직접 우리에게 산 말씀을 하시는 주님께 물어보려고 성경을 읽도록 불리우고 있다. 동일한 방식으로 그는 한 때 예언자들, 복음 전도자들,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듯이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그는 여전히 우리 현대세대에도 목자되시기를 원하고 달래고 권고하고 경고하기를 원하고 여전히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신뢰에 빠진 학자들의 독재성으로부터 우리자신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가장 필수적인 일이다. 특별히 그들이 주장하는 바, 과학적인 접근이 성경의 참된 이해를 얻는 유일하게 가능한 것이라고 선전하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해방되는 일이다.

    2. 성령과 해석학; 성경과 회중 사이의 의사소통은 양편이 같은 신적인 힘,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가능해 질 수 있었다. 그는 하나의 살아있는 신의 인격으로 그들안에 머무신다. 회중이 성령의 전인 것 과 꼭같이 (딤후 3:16절에 따라)성령은 “ theopneutos” 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감동된 것이라는 뜻과 꼭같은 것이다.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미래의 전진이나 우리교회의 쇠퇴가 성령의 영감에 분명한 “예”를 말하는 우리의 읽기에 달려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방식으로만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오도된 해석학적인 접근들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상실된 통일성과 권위를 다시 얻게 될 것이다.

    3. 결정적인 과제; 유럽, 미국에서 그리고 부분적으로 아시아에서도 역시 우리의 신학과 우리의 교회들의 치료는 만일 우리가 회개하며 성령의 인도를 믿는 가운데 우리의 이성을 종속시킨다면 일어날 수 있다. 이 인도는 성령안에서 개인적인 생활에 의해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제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계속적인 자기-해명에 귀를 귀울임으로서만 얻어질 수 있다.


  • 2023-04-30 18:51

    흥미롭군요..
    A- <한 때 예언자들, 복음 전도자들,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듯이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B- <자기 신뢰에 빠진 학자들의 독재성>

    A, B의 기준은?

    엄장로님은.. 장로님이신데, 이렇게 목사들의 신학논쟁에 끼어드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저와 신학 논쟁을 하기 원하세요?
    죄송하지만, 장로님은, 신학의 어떤 기초도 없으십니다.
    목사 까대는 재미, 편드는 재미에 빠지지 마시고, 본인의 자리를 지키세요.

    제가 원로목사님이라, 어느 정도 감안하고 글을 쓰는데, 제가 글 막 쓰기 시작하면, 장로님이 책임지시겠습니까?

    신학 수준이 되지 않는데, 왜 껴드십니까?
    글 안 쓰셔도, 현목사님 편드는 거 아니까, 잠자코 계세요.


    • 2023-04-30 20:44

      나는 신학 논쟁에 개입하지 않으며, 내 분야도 아닙니다.

      내가 보기엔 현대 기독교 혹은 우리나라의 교회들에서 드러난 혹은 풍문으로 여러 문제는 이 땅에 신학교가 없거나 신학이 없어서가 아니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들을 듣지 않아서이며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보이고, 폐해는 일반 성도들이 걸머집니다. 이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목회자에게 출발하는 게 스스로 자존심도 지키고 건강한 겁니다.


      • 2023-04-30 21:24

        근본주의 신학은 결국 그 바탕이 정통주의(스콜라신학)입니다.
        제가 정통주의를 배격하지는 않죠. 하지만, 문제점들은 상존합니다.
        성경무오설, 혹은 영감설은 맞지만, 문자주의 혹은 축자영감설은 글쎄요..
        근본주의의 근원에 대한 다른 시각도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상식실재론'이죠.. 이 이론은 자연유물론 정도로 이해됩니다.

        웨슬리의 전 신학방법을 관통하는 것이, 성서, 전통, 이성, 체험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신학 이론이 아닙니다.
        감리교회에서, 왜 자꾸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냐는 겁니다.


  • 2023-04-30 23:40

     Οὕτως ἠγάπ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κόσμον.   Thus God loved the world (요한 복음3:16 절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셨다 이고, 그 사랑의 구체화가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신 일입니다. 나는 철학의 전문용어를 사용아니해도 철학은 철학자 고유의 소유물이 아니라, 만인의 소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적인 논의도 신학적인 전문용어를 몰라도 신학자들만의 소유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소유입니다. 성경논의는 라틴어를 배운 신부들의 것만이 아니라, 그런 라틴어를 몰르고 독일어밖에 몰라도 성경을 직접 읽고 구원의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다고 말한 것이 말틴 루터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엄장로님의 이런 논의에 참여함은 바람직한 것이며, 이런 창을 통해 목회자와 평신도지도자가 대화나 토의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교단을 위해서 득이 되면 득이되었지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은 목회자에게만 지혜의 은사를 주시지 않으며, 칼빈은 목사안수를 받지 않은 평신도 교사였습니다. 말틴 루터의 깨달음이 당시 의 대주교들이나 교황보다 못한 것이었을까요?


  • 2023-05-01 10:00

    현목사님은, 딸랑딸랑 거리면, 깨달음이 떠오르나보죠?

    비겁하게, 주제를 요리 저리 피하지 말고, 딱부러지게 말하세요.

    Peter.Beyerhaus은 루터교 신학자입니다. 불트만도 루터교 신학자입니다.
    독일은 루터교회가 압도적 다수입니다.
    슐라이에르바허와 칼바르트는 개혁주의 소속입니다.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신학, 근본주의 신학, 신정통주의 신학..
    그 기반이, 개혁주의 신학입니까? 감리교회 신학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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