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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를 통해 만난 세 분

작성자
함창석
작성일
2023-05-02 09:45
조회
426
전기를 통해 만난 세 분

안창호, 이승만, 윤치호 세 분은 중학교 시절에 접한 전기를 통해 나에게 영향을 끼쳤던 분들이다. 먼 훗날 알게 되었지만 공통점은 감리교회와 관련이 있었다. 안창호는 흥사단을 통하여 교육대학 시절 안병욱 교수의 강연을 통해 새롭게 되었고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어린 시절 선거벽보에서 보았고 정동감리교회 명예장로로 알고 있다. 윤치호는 친일파 관료출신으로 우리 조부와 관련이 있어 우리 아버지께서 자주 말씀을 하셨다. 윤치호는 남감리회를 통하여 원주지역에 관련이 있는 것을 훗날 알게 되었다. 처절하였던 그 시대 순교자도 있었지만 친일 부역자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윤치호다. 윤치호는 경기 고양지역에 남감리교회를 개척하여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 윤치호도 천수를 다하고 해방전에 소천 하였다. 도산 안창호는 해방 전에 출옥 후 후유증으로 소천 하였다. 이승만은 초대대통령으로 하야를 통해 하와이로 망명생활을 하다가 천수를 다하였다. 나는 교육자로서, 기독교인으로서, 시인으로서, 예술, 스포츠를 즐기는 보통 시민에 지나지 않았지만 과거를 거울삼아 저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흥사단 아카데미 단원이었던 나는 도산 안창호의 무실, 역행, 충의, 용감 정신이 가장 큰 행동지침이 되었다. 1973년 22살에 교회 원입으로 오직 성경이 나의 인도자가 되었으니......교원으로, 감리교인으로, 시인으로, 탐구자로 살게 된다.

도산 안창호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설하여 본국에서 이루지 못한 대성학교·신민회·청년학우회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1914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15년 6월 23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장에 취임하며 동포의 단결을 강조했다. 안창호의 교육사상은 교육을 통하여 민족혁신을 이룩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민족혁신은 자아혁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자아혁신은 바로 인격혁신이라 보았다. 따라서 그는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면서 인격의 혁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자아혁신은 곧 자기개조로 연결되며, 자기개조는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무실역행을 강조하였는데, ‘무실’이란 참되기를 힘쓰자는 것이며 ‘역행’이란 힘써 행하자는 것이다. 무실은 개조의 내용이고 역행은 그것의 행동으로, 무실과 역행이 없이는 자기개조가 불가능함을 주장하였다. 개개인의 인격혁명으로서의 자아혁신은 곧 자기개조이며 자기개조가 곧 민족개조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는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는 주인정신(主人精神)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보았다. 대성학교의 교훈을 주인정신으로 설정한 것도, 주체·독립·책임을 의미하는 주인정신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자기개조와 민족개조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교육사상은 학교건설과 흥사단운동을 통해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안창호는 점진학교·대성학교·동명학원 등 3개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이 가운데 대성학교의 건학정신은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에 있었다. 이것은 곧 설립자인 안창호의 교육이념이었다. 또한, 흥사단 창립 당시의 약법(約法)에 표시된 단(團)의 설립목적 조문을 보면 “본단의 목적은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층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情誼)를 돈수(敦修)하고 덕·체·지 삼육(三育)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육성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성하여 우리 민족 전도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에 있음이라.”고 하여, 정의돈수를 통하여 인격을 육성한다는 교육목적이 제시되고 있다. 한편, 교육방법상의 원리로는 성실성과 점진성을 강조하였다. 인생관과 세계관의 근본원리 및 인간이 믿고 의지해야 할 진리의 등불은 곧 성실이라 하였으며, 거짓없고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모든 일에 정성과 진실을 다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성실이야말로 자아혁신과 민족개조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적 원리라 보았다. 또한, 그는 공부하는 정신과 태도로 점진성을 강조하였다. 점진공부는 학문과 실천의 기본적인 태도로서, 자신의 생활은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개척하여 향상을 기하자는 것으로 이는 성실성과 함께 주요한 교육방법의 원리가 된다. 그의 이러한 짐진주의적 사고는 학교설립의 순서에도 나타나는데, 점진학교 설립 이후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점진적으로 대성하는 인물을 기른다는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안창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우남 이승만

1905년 4월 세례를 받았고, 8월에는 태프트(William H. Taft) 국무장관의 주선으로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만났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 보존을 청원하였지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어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다. 1907년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사,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 하의 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재학 시 미국의 대외정책이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활동하였던 스티븐슨(Stevens, D.W.)을 암살한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의 재판에 통역요청을 받았으나, 미국 사회 내의 부정적 여론을 이유로 거부하였다. 1910년 3월 재미동포 조직이었던 국민회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8월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청년부 간사이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압박을 받자, 같은 해 4월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미국 미네소타에서 열린 국제감리교대회 참석을 빌미로 도미하였다. 이후 1945년 10월 귀국 때까지 계속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국제감리교대회 참석 후 네브라스카(Nebraska)에 갔다가 1900년대 초 옥중에서 만났던 박용만(朴容萬)의 도움으로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같은 해 8월부터 호놀룰루에서 한인감리교회의 한인기독학원을 운영하였으며, 『태평양잡지』를 발간하였다. 이승만은 이 시기 ‘105인 사건’의 실상을 다룬 『한국교회핍박』을 저술하였고, 옥중 저서인 『독립정신』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또한 ‘한인기독학원’을 ‘한인중앙학원’으로 개명하고 민족교육과 선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하와이에서 활동한 지 1년이 지날 무렵 박용만이 무력투쟁을 위해 국민군단을 창설하자, 이에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하였다. 이승만은 재미동포의 가장 큰 조직이었던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국민군단의 일본군 선박 폭파미수사건을 계기로 박용만이 하와이를 떠난 후 국민회를 주도적으로 운영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구상하였고,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1919년 2월 25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여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 하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승전국이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 문제는 국제연맹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1919년 3·1운동 직후 노령(露領) 임시정부(1919년 3월 21일 수립)에 의해 국무 급(及) 외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4월 10일 구성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로, 4월 23일 선포된 한성 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에 임명되었다. 1919년 6월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의로 각국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한편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 임시정부 규정에 없는 대통령 직책을 사용한 것에 대해 안창호와 갈등을 빚었지만,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9월 6일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1921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될 군축회의(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에 참석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미국으로 갔다.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권 대사로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군축회의 의제로 상정시키고자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 하였고, 1922년 9월 하와이로 돌아갔다. 교육과 종교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1924년 11월 호놀루루에서 조직된 대한인동지회 종신 총재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해 대통령직을 박탈하였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이 주장한 국제연맹 위임통치안을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로 오해하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직접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의 결의를 무시하였다는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조소앙은 이 탄핵안을 반대하였지만, 대다수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도한 탄핵안은 통과되었다. 의정원의 폐지령에도 불구하고 구미위원부의 활동은 1929년까지 계속되었고, 이승만은 여기에서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조병옥, 허정, 장택상 등이 당시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도왔던 유학생들이었다.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을 도맡았던 이승만은 1932년 11월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임무를 받고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1933년 1월과 2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때 제네바의 호텔 드뤼시에서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를 만났고, 1934년 10월 뉴욕에서 결혼하였다. 국제연맹에서의 활동이 인정받으면서 1933년 11월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외무위원회 외교위원, 1940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곧 다가올 태평양 전쟁을 예상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간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를 한국의 대표로 승인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그리고 미국 정부에 로비를 하기 위해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재미동포 단체들의 분열로 인해 미국 정부는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이승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좌옹 윤치호

1908년 9월 안창호(安昌浩) 등이 주도하는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에 교장으로 취임했다. 1909년 2월 안창호 등이 결성한 청년학우회 회장에 추대되었으며, 11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장례식에 맞춰 장충단에서 개최한 관민추도회 준비위원을 맡았다. 1910년 1월 도미해서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남감리교 평신도대회, 6월 스코틀랜드로 가서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12월 워싱톤 DC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하고 귀국했다. 1911년 9월 아버지 윤웅렬이 사망하자 12월 남작 작위를 습작했다. 1912년 2월 일제가 날조한 이른바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1913년 10월 징역 6년형이 확정됨에 따라 1913년 11월 남작 작위를 박탈당하고 옥고를 치르다가 1915년 2월 ‘일본천황’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출옥 이후 1916년 4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총무에 선출되었다. 1916년 11월 대정(大正)친목회 평의원, 1917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이사, 1918년 연희전문학교 이사로 위촉되었다. 1919년 1월 최남선이 3·1운동 참여를 권유했으나 침묵으로 거부했고, 7월 친일단체 경성교풍회(京城矯風會) 회장에 추대되었다. 1920년 1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총무를 사퇴하였지만 6월에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7월 임시조선인산업대회 발기인 및 위원, 9월 범태평양협회 조선지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22년 11월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해 1925년 11월까지 재임했다. 1923년 1월 기독교서적 출판사인 조선기독교창문사를 창립하고 취체역을 맡았다. 1924년 4월 일선융화를 표방하는 동민회(同民會)에 가입했다. 1925년 3월 이상재(李商在), 신흥우(申興雨) 등과 함께 비밀결사 흥업구락부를 조직하고 회계를 맡았다. 7월 조선체육회 위원, 11월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를 창립하고 위원장에 위촉되었다. 1927년 3월 이상재 선생 사회장 장의위원장, 10월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 총재가 되었다. 1928년 8월 조선체육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1937년 7월까지 재임하고, 이후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0년 12월 기독교 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 겸 재무국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에모리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1년 5월 이충무공유적보존회 결성에 참여했고, 10월 토요회에 가입하는 한편 만주동포문제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2년 7월 안창호 석방을 위해 조선총독부 경무국 담당자와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1933년 6월 중앙진흥회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1934년 3월 31일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직 제의를 거절했다. 같은 해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직 제의와 1935년 보성전문학교 교장직 제의 또한 거절했다. 193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이사로 위촉되었고, 같은 해 10월 조선총독부 어용단체인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이사를 맡았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7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에서 주최한 시국대응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하고 황군위문금 1,000원과 국방헌금 4,000원을 냈다. 이 무렵 ‘애국경기호’ 비행기 구입비 500원도 헌납했다. 8월에는 「내선인(內鮮人)은 동일운명-거선(巨船)의 항해에 임하라」(『매일신보』1937.8.15.)라는 글을 발표했고 조선신궁에서 지내는 기원제거행준비회 발기인 겸 위원으로 참여해서 9월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중일전쟁 정당성을 홍보하는 시국강연 연사로 평안남도 일대에서 강연했다. 12월 일본군의 난징 함락을 기념하여 조선신궁에서 거행한 난징함락전첩봉고제 위원장을 맡았다. 1938년 2월 조선지원병제도 제정 축하회 발기인 겸 실행위원으로 참여해 회장에 추대되어 조선신궁에서 봉고제를 지냈고, 4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주식회사로 전환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5월 일본군의 쉬저우 함락을 기념해 조선군사령부에 1만원의 국방헌금을 기탁하는 한편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을 만나 중추원 참의 제의를 거절했다. 같은 해 5월 기독교계의 친일협력을 위해 조직된 조선기독교연합회에서 평의원, 7월 평의원회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가 되었다. 8월 흥업구락부 사건에 대한 취조를 받았고, 9월 조선방공협회 경기도 연합지부 평의원, 10월 일본기청조선연합회(日本基靑朝鮮聯合會) 회장을 맡았으며, 12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순회강연반의 전라남도 지역연사로 참여했다. 1939년 2월 동양지광사(東洋之光社) 고문과 조선지원병후원회 회장을 맡았다. 6월에는 조선군 제20사단 사령부에 ‘일선장병 휼병금’ 2,000원을 헌금했으며, 7월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40년 6월 이토 지코(伊東致昊)로 창씨개명을 하였으며, 8월 재만조선인교육후원회 위원장, 9월 총독부 교육심의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0월에는 조선총독부 시정 30주년 기념식에서 민간공로자 표창을, 다음달인 11월에는 기원 2600년 축전기념장을 수여받았다. 1941년 2월 연희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41년 3월 국민총력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에서 주최한 시국대응신도대회에서 ‘내선일체의 완벽’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5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칙임관 대우 고문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매년 3,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9월 흥아보국단 중앙위원회 위원장 겸 상임위원에 위촉되었다. 같은 달 임전대책협력회가 주최한 대연설회에서 ‘극동의 결전과 오인(吾人)의 각오’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고 채권가두유격대(債券街頭遊擊隊)에 참여하여 종로에서 채권을 팔았다. 10월 조선임전보국단 고문, 11월 조선언론보국회 고문으로 참여했으며, 12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이 경성부민관에서 주최한 결전보국(決戰報國)대강연회에서 ‘결전체제와 국민의 시련’이라는 연제로 강연했다.(윤치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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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02 11:02

    결실結實

    함창석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아는 것처럼 그들의 행동을 보고 진짜 예언자인지 가짜 예언자인지 알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송이를 따거나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마 7:16-20)

    열매는 나무와 식물에 나는 먹을 수 있는 소산물이며, 일반적으로 씨를 둘러싸고 있는 과육을 말한다. 이러한 열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음식에 필수적인 것으로 그들은 싱싱한 날 것이나 건조한 열매를 먹기도 하고, 기름(감람유)∙포도주∙과자(무화과, 건포도)로 가공하기도 하였다. 가장 중요한 열매들은 감람 열매, 포도, 무화과였으며, 그밖에 대추야자, 멜론, 석류, 뽕나무 열매, 호두, 아몬드 등이 있었다. 8월에서 10월(히브리 달력으로는 압에서 티쉬리)까지의 기간은 과일들의 첫 수확기였다. 포도 수확은 대략 늦무화과와 같은 때인 8월에 시작되었다. 9월에는 석류, 아몬드, 첫 감람 열매가 남은 포도나 무화과와 함께 거두어졌다. 감람열매의 가장 중요한 수확은 10월에 이루어졌다. 각 추수기의 첫 열매는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께 드려졌다. 나아가 첫 3년 동안에 나온 모든 과일 나무의 열매는 부정하게 여겨졌으며 제4년에 생산된 열매는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졌다. 그리고 제5년에야 비로소 그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 열매에 대한 성경의 많은 언급은 은유적이다. 자녀들은 '태의 열매'로 생각되었다. 또한 '열매'는 보다 빈번히 사람이나 하나님의 활동의 결과나 귀결을 표현하고 있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의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서로 헐뜯고 해친다면 둘 다 멸망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입니다만 여러분은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사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과 성령님이 바라시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서로 대적하여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육체의 행위는 명백하게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는 것과 다툼과 시기와 화내는 것과 당파심과 분열과 이단과 질투와 술주정과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과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했지만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생활을 일삼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지배하는 생활에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인내와 친절과 선과 신실함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 이런 것을 막을 율법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산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난 체하지 말고 서로 다투거나 미워하지 맙시다.(갈 5:14-26)


  • 2023-05-06 08:15

    사람에게는 누구나 장점이나 강점, 단점이나 약점이 있겠습니다. 부족하고 미흡한 점이 많겠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은 장점, 강점 등 그 사람의 좋은 점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 22살부터는 이 소자에게 누구에게도 배울 점을 안내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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