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32 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07-02-26 10:16
조회
1180
풍성감리교회. 훼이스신학대학(원) 교수. 426-3051)
(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난해 성구 해설/ 형통의 기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영문, 한글/ 설교집 17권)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32 강>>

나. 거라사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심<5:1-20>
    <비교 : 마 8:28-34, 눅 8:26-39>

그닐카(J. Gnilka, p. 255.)는 “공관복음서 가운데 가장 방대한 설화에 속하는 이 기적 설화는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아주 다양하게 분석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마르코복음 이전에 속한 여러 전승 단계를 고려하는데, 쉥케(Schenke)와 케르텔케(Kertelge)는 세 단계, 페쉬(Pesch )는 네 단계를 고려한다. 이 때 케르텔케와 페쉬는 마르코가 다양하게 형성된 설화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그의 복음서에 받아들였다고 가정하려 한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양자의 견해는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고 하는 가정은(어떤 구절들을) 삭제하는 분석적인 방식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가정은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즉, 한 전승이 개정되고 확대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전승이 거의 구전 전승의 마지막 단계에 속하기 때문에, 상세한 진술이 이루어졌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라고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귀신 쫓음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 주면서 다소 특유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ㅡ① 귀신과 만남. ② 이런 병의 특이한 위험성에 대한 서술. ③ 귀신은 귀신 쫓는 자를 알아채고, ④ 쫓겨나는데 ⑤ 시위를 하며 나간다. ⑥ 이것을 본 자들의 인상ㅡ이 이야기(R. Bultmann)가 몇 단계의 전승을 거쳤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귀신 들린 자의 모습과 생활 태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광경과 치유된 후의 변화된 모습, 방관자들의 태도와 고쳐 주신 예수님의 분부 등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목격자인 베드로에 기초된 것으로 생각된다”(“데라, 크랜필드”, 山口 昇).
“이 이야기의 서두는 전승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마르코적인 것이지만, 원래는 서두에 장소에 대한 진술만이 있었다”(J. Gnilka, p. 256). 그리고 20절은 본 내용에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가는 이 이야기를 【1】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로 시작하여 4:35과 관련짓고 있다.
바다 건너편은 갈릴리 바다 동쪽 해안을 가리킨다.
거라사인의(Γερασήνων)는 א*, B, D 사본 등을 따른 것이며, 누가복음 8:26과 같다. 그러나, A, C, K, Π 사본 등에는 가다레논(Γαδαρηνών)으로 되어 있으며, 마태복음 8:28과 같다. 그리고 אc, L, Δ, Θ, ƒ1 사본 등에는 게르게세논(Γεργεσηνών)으로 되어 있고, W 사본에는 게르귀스테논(Γεργυστήνων)으로 되어 있다.
거라사는 갈릴리 바다에서 30마일 이상 떨어진 곳으로, 가다라는 6마일 이상 떨어진 곳으로 짐작하는 학자들이 있으나(E. Schweizer, 黑崎幸吉), “두 지역 다 갈릴리 바다의 동쪽과 동남쪽에 걸친 지역에 있는 헬라풍의 도시들이다. 이 [부근의] 열 지역을 합하여 데가볼리라고 일컬었다는 것과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것 외에는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黑崎幸吉). 아마도 예수님은 그 두 도시의 접경 지역으로 가신 것 같다. 아무튼,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이방인의 지역에 가셨다는 것이다.

마가는 예수께서 문제를 만나신 것에 대해, 【2】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라고 하였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의 더러운 귀신은 1:23의 주석을 보라.
마가와 누가는 더러운 귀신들이 들린 사람을 한 명만 언급하는데, 마태는 두 명을 언급하였다. 이 차이점에 대해서, {반즈(A. Barnes)는 “마가나 누가가 한 사람 이상은 없었다고 말하지 않고 있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어떤 특별한 이유 때문에, 마가와 누가는 귀신 들린 두 사람 중에서 더욱 악명 높고 사납고 다루기 어려운 한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했을 것이다.......마태와 누가가 세상을 속이려고 했다면, 이렇게 간단한 문제에 있어서는 한 치의 차이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사건의 배경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묘사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 8:28의 주석).
무덤은 “바윗돌 사이에 옆으로 뚫려 있는 자연적 동혈이나 인위적 동혈이었다”(E. P. Gould). “이러한 무덤은 고대 설화에서 귀신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고, 또한 미친 사람들도 자주 찾는 곳이다”(F. C. Grant). 사실상, “고대 사회에는 무덤이 귀신들이 자주 나타나는 곳이라는 대중 신앙이 있었다”(W. W. Wessel).

마가는 귀신들이 들린 사람의 거처와 힘에 대해서, 【3】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더러운 귀신들에게 붙들려 있으면서, 그 때문에 무덤에 거주해야 했으므로 이중으로 저주받은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를 통해 나타나는 힘은 대단해서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붙잡아 맬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도울 방도를 찾는 노력을 하는 대신에, 자기들에게 미칠 피해를 막는 데만 급급하였다.

“마가는 귀신의 악의의 희생이 된 사람을 인간의 무관심과 무능과 짝지어진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W. Hendriksen). 【4】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더러운 귀신 들린 자의 초인적 힘을 볼 수 있다. 이 힘은 그의 힘이 아니라, 그를 통해 나타나는 더러운 귀신들의 힘이다(9절). 이 사실은 그 귀신 들린 자의 행동으로도 뒷받침된다. 【5】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는 쓸데없는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남들에게 피해를 주고, 또한 자신의 몸을 스스로 해치고 있었다. 그리고 옷도 입지 않았다(15절, 눅 8:27). “이것은 죄인의 영적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죄인은 정상적인 주거보다 무덤과 산과 같은 음침한 곳을 좋아하며,......비정상적인 소리를 지르고, 스스로 자신을 해치는 사망의 길을 걸으며, 벌거벗은 추태를 깨닫지 못하고 다닌다”(이상근).
사람에게는 얼마나 강한 힘이 있는가 함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형상이 있는가 함이다. 더러운 귀신이 들린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후예였지만, 그 형상을 다 잃어버리고 더러운 귀신들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되고 말았다. 이 “3-5절의 모습은 사단에게 지배되는 죄인의 모습이다”(黑崎幸吉).

그 불쌍한 사람에게 바야흐로 구원의 손길이 임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마가는 【6】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라고 하였다.
귀신들은 멀리서도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신 예수님(요일 3:8)을 알아보았다. 영의 존재인 귀신들은 단순히 예수님의 정체를 아는 문제에서는 사람들보다 뛰어나다. 그러나, 그 지식은 믿음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영적 지식이 믿음으로 이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가 절한 것은 예배가 아닌 두려움에서 나온 행동이었다(참조 : 약 2:19). 여기에 사용된 프로세퀴네샌(προσεκύνησεν)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뜻과 무릎을 꿇고 절한다는 뜻이 있다.

그가 달려와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한 말에 대해, 마가는 【7】큰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라고 하였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고대 수리아와 팔레스틴에서 발견된 신의 칭호이다. 그리고 1세기에 디아스포라 유대에서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F. C. Grant).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는 1:1의 주석을 보라.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는 알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방어적 질문이다(1:24의 주석을 보라).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의 원문(ὁρκίζω σε τὸν θεόν, μή με βασανίσης)의 정확한 번역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간청(원)하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이다. 그가 두려워하는 괴로움은 그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산너(A. E. Sanner)는 “남을 괴롭히는 자가 괴롭힘을 받지 않으려고 애원하는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잔뜩 겁에 질린 귀신의 간청의 동기에 대해, 마가는 【8】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묵인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미 더러운 귀신에게 나오라고 명령하셨다. “그 명령이 즉시 시행되지 않았음은 그 악귀의 완강함에 기인된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후에 일어날 계시적인 의미를 보이기 위함에서이다”(마경일).

그리고 예수께서 하신 질문과 귀신의 대답에 대해, 마가는 【9】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라고 하였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에 대해 (1) 귀신 들린 자로 하여금 귀신들과 다른 자신의 정체성을 갖도록 그에게 질문하신 것이라는 설(W. W. Wessel, E. P. Gould, C. R. Erdman), (2) 다른 귀신 쫓는 자들과 같이 귀신의 이름을 아는 것이 귀신을 쫓는 능력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으셨기 때문에 질문하신 것이라는 설, (3) 제자들 등에게 자신이 한 귀신이 아니라, 매우 많은 귀신들을 처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라는 설(R. C. H. Lenski) 등이 있다.
(1)설은, 예수님의 질문의 대상이 귀신 들린 자가 아니라, 그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들이라는 점을 보아 받아들이기 어렵다. (2)설은, 예수께서 다른 귀신 쫓는 자들의 방법을 따르셨을 리가 없고, 실제로 예수께서 귀신을 쫓으실 때마다 항상 그 이름을 질문하시지도 않았으므로 설득력이 없다. (3)설은 타당하나, 그 설명이 다소 미흡하다.
예수님이 귀신의 이름을 물으신 것은 제자들과 목격자들, 특히 귀신들린 자로 하여금 매우 많은 귀신들을 제압하고 축출하는 자신의 메시아적 권능을 확실히 알고 전하게 하시려는 의도 때문이었다(19-20절).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의 군대는 레기온(Λεγιών)이며, 로마 군대의 한 단위이다. 산너(A. E. Sanner)와 山口 昇은 4000~6000명, 그란트(F. C. Grant)는 5000~6000명, 헨드릭슨(W. Hendriksen)과 黑崎幸吉과 이상근 님과 마경일 님 등은 6000명 정도의 군인이 소속됐다고 한다. 그닐카(J. Gnilka, p. 262, 주 30)는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에 약 6000명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로마의 군대의 한 단위라는 것과 그 부대에 속한 군인의 수가 무척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람을 사로잡은 것은 마귀의 군대의 한 집합체이며, 그 수가 매우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귀신들린 자를 통해 나타났던 힘의 원천이다. 그들의 세계에도 어느 정도 질서와 서열이 있고, 뭉쳐진 강한 힘이 있다(참조 : 3:23-26, 마 12:24, 25, 26, 눅 11:15).

그 귀신의 간청에 대해, 마가는 【10】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라고 하였다.
자기는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8절)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들은 더러운 귀신들이다.
그러나 자기가 귀신 들린 자를 가리키는 것인지, 귀신 들린 자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들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귀신 들린 자는 완전히 귀신들의 부림꾼이기 때문이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귀신들은 무덤, 해골들, 유기, 죽음, 파멸의 지역이기 때문에 이 특별한 지역에 머물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여기를 집처럼 느꼈다. 만일 우리가 선한 천사를 질서, 아름다움, 생명의 풍부함의 장소와 연결짓는다면, 악한 천사들을 무질서, 황폐, 유기, 죽음이 지배하는 영역과 연결짓는 것이 성서와 관련하여 자연스럽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그 귀신들은 안전했던 그 사람 속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예수께 간청하였다. 실제로 성령이 거하시기에 적합한 사람들과 악령이 거하기에 적합한 사람들이 있다.

그 지역의 상황에 대해, 마가는 【11】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이 지역이 주로 이방인이 거주하던 이방 지역임을 나타내 준다. 그 까닭은 돼지가 유대인들에게는 부정한 짐승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산 곁에 있는 돼지 떼를 본 귀신들에 대해, 마가는 【12】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라고 하였다.
인간을 사로잡아 도구로 사용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 귀신들도, 막상 예수 그리스도와 마주치자 돼지 떼에조차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허락이 없이는 돼지 떼 속에 들어갈 수 없었다”(E. Bickersteth).

어떤 이유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예수께서 허락하신 결과에 대해, 마가는 【13】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이라고 하였다.
이 예수님의 처사는 매우 곤란한 문제를 안고 있다. 즉, 사랑의 예수님이 어떻게 남에게 재산상의 큰 피해를 주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1) 유대인들 사이에 유포되고 있던 민간 전승, 즉 악령이 그 힘을 빼앗기는 이야기를 예수께 적용시킨 것이라고 생각하는 설(E. Schweizer), (2) 더러운 귀신이 들린 자의 큰소리나 몸짓 때문에 놀란 돼지들이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을 본 사람들이, 더러운 귀신이 돼지 속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한 것이라는 설(존슨), (3) 더러운 귀신으로 하여금 돼지를 몰살시키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그들의 악의를 알 수 있도록 하려고 허용하신 것이라는 설(크랜필드), (4) 더러운 귀신 들린 자로 하여금 더러운 귀신들에게서 해방된 것을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허용하신 것이라는 설(山口 昇), (5) 예수께서 귀신들에게 들어가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단지 허용하셨을 뿐이므로 예수님의 책임이 없다고 하는 설(D. W. B- urdick) 등이 있다.
예수님의 ‘허용’을 변명하는 위의 견해들은 충분한 것이 되지 못한다. 요는,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들에게 지배당하는 버림받은 한 인간을 2000마리의 돼지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셨고, 또한 그러한 메시아임을 물욕에 사로잡혀 있는 그 지역 사람들에게 알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어드만(C. R. Erdman)은 “주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조차 위험을 경고해 주고 자기에게 가까이 끌기 위해서는 손해가 오게 하신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경건치 않은 거라사인들에게 위험을 알려 주고 자기의 구원의 능력을 알려 주기 위해 하신 일이라면 돼지 떼의 멸망쯤이야 얼마나 정당하랴.”라고 하였다. 인간의 가치가 천하보다 귀한 것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만물의 주이신 예수님의 ‘허용’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본 사람들과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14】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라고 하였다.
돼지를 치던 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놀라움과 돼지 떼의 죽음으로 인한 손실 때문에 당황하여 도망했고, 읍내와 촌으로 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본 것을 고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왔다. 그들은 혹은 호기심에서, 혹은 손해 배상을 청구하기 위해서 왔을 것이다.

몰려온 그들에 대해, 마가는 【15】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라고 하였다.
예수께 이른 그들은 귀신들에게 사로잡혀 벌거벗고 지내던 그가(눅 8:27)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테오루신, θεωρούσιν), 즉 자세히 주의하여 보고 두려워하였다. “그들의 두려움은 의심할 것 없이, 그런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의 현존 때문에 생긴 것이다”(W. W. Wessel).

처음 목격자들에 대해, 마가는 【16】이에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고하매라고 하였다.
돼지를 치던 자들이 아니라, 그 사건을 본 사람들이 몰려온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었다는 뜻이다.

설명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17】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라고 하였다.
그들은 귀신들려 버림받은 두 사람이 구원받은 것을 기뻐하지 않고, 물질적인 손해에 대해서만 속상해 하였다. 그들은 또 있을지도 모르는 물질적 손해 및 그 밖의 괴로움에만 신경을 쓸 뿐이었고, 초자연적 능력을 가진 예수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익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생을 얻을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구주 예수님을 배척할 기회로 삼고 말았다.
어드만(C. R. Erdman)은 “주님 앞에서 두려워하였으나 주님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나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느끼지 못했으며......이 비극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주님 앞에서는 두려움만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주님을 가까이 하다가는 사회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손실을 당할까, 친구를 잃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들은 하늘 나라보다도 그들이 감정의 노예라고 업신여기는 가련한 세상을 더 좋아한다. 그리고 재산을 건지려다가 영혼을 잃어버리고 만다.”라고 하였다.
자신의 안전과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고, 설령 인식하더라도 배척하게 마련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인간에게 자기 부정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마 16:24).
아무튼, 그들은 찾아오신 메시아를 내보내는 어리석은 짓을 하였다. 실제로 굴러 들어오는 복을 차 버리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에 응하셨다. 예수님은 원치 않는 곳에는 계시지 않으신다(참조 : 6:11, 마 10:14, 눅 10:11, 12).

예수님의 은혜로 회복된 사람의 간구에 대해, 마가는 【18】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라고 하였다.
그들 곧 거라사 주민들 중에서 귀신 들렸다가 회복된 사람만이 예수님이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사랑의 존재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감사와 헌신의 마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였다.
그가 예수님과 같이 있고 싶어한 동기에 대해 (1) 예수님의 인격을 사모하는 마음이라는 설(마경일), (2) 다시 귀신들에게 사로잡힐까 염려하는 마음이라는 설(Theophylact, Grotius), (3) 은혜를 받은 자로서 예수께 헌신하려는 마음이라는 설(W. L. Lane), (4) 예수께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설(J. A. Bengel, “Alexander”, 黑崎幸吉) 등이 있다.
(1)설은, 그가 예수님을 깊이 알 만큼 충분한 교제의 기간을 가진 적이 없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2)설은, 그가 데가볼리에서 예수님에 관해서 열심히, 그리고 담대히 전한 점을 보아 받아들이기 어렵다. (3)설과 (4)설을 종합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그는 예수께 대해 감사하는 마음과 그에 따르는 헌신의 마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한 것이다.

그의 간구를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19】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그의 요구를 허락하시지 않았다. 귀신들의 요구도 허락하셨고, 주민들의 요구도 허락하셨는데, 아주 바람직한 요구인 귀신 들렸던 자의 요구는 허락하시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요구가 허용되는 것만을 기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때로는 허용이 오히려 큰 손해일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거절 속에 담긴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이유는, 회복된 사람을 오랫동안 떠나 있던 집으로 돌려보내서 그가 겪은 주님의 큰 역사인 놀라운 은혜를 ‘친속’(수스, σούς : ‘친한 벗들까지 포함’)들에게 전하게 하시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경우에 선전하는 것을 막으시곤 하셨던 예수께서(1:25, 44, 3:12, 5:43, 7:36, 8:26), 이 사건의 경우에는 도리어 선전하도록 명하신 점이다. 이 점에 대해, 고울드(E. P. Gould)는 “그 곳에는 예수께 악의를 품은 원수도, 몰지각한 친구도 없었고, 신령한 은혜보다 이적에 치중하는 맹목적인 군중도 없었다. 그 곳은 예수께서 좀처럼 방문하시지 않는 곳이고, 또 방금 쫓겨 나오는 곳이므로 이 사람의 간증은 그 지방 사람들에게는 유일의 복음 전도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웨셀(W. W. Wessel)은 “위험이 거의 없는 이방 지역이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이 사람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인격과 선교의 참 성격이 지각됐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웨셀(W. W. Wessel)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그 자신만 누리도록 속박에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증거하도록 구원받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귀신 들렸다가 회복된 자의 순종에 대해, 마가는 【20】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서는 앞 구절의 “주”가 예수로 바뀌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이적을 행해 주신 것이므로, 더러운 귀신이 들렸던 사람에게는 예수께서 행해 주신 일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증거보다 더 효과적인 전도는 없을 것이다.
데가볼리(Δεκαπόλει)는 ‘열 도시’라는 뜻으로, 헬라의 열 개의 자유 도시인 거라사, 가다라, 다메섹, 빌라델피아, 스쿠도폴리스, 히포스, 펠라, 라파나, 디오스, 카다나 등의 연맹을 가리키는 것이다(도시들의 명칭은 학자들에 따라 약간 다르다).
이 도시들은 갈릴리 동해안에서 요단강의 동쪽 강변에 걸쳐 있었다. 주전 3세기경에는 수리아에게 정복되어 헬레니즘을 받아들였고, 마카비 시대에는 유대의 지배 하에 있다가, 폼페이에게 정복되어 로마의 행정구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 즈음에는 로마의 수리아 총독의 통치 아래 있었고, 주된 거주민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었다.
이 지역들은 귀신 들렸던 자에 의해서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쓸모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아주 쓸모 있는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비방이나 비난보다는 복음을 들려주기를 힘써야 한다. 복음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위력이 있는 것이다.
기이히 여기더라는 미완료 과거인 에타위마존(ἐθαύμαζον)이며, ‘경탄과 놀라움의 상태가 계속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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