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17 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06-10-16 22:34
조회
1459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풍성감리교회 목사. 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설교집 16권. 426-3051)

<<제 17 강>>

다. 금식 문제<2:18-22>
    <비교 : 마 9:14-17, 눅 5:33-39>

불트만(R. Bultmann)에 의하면, 이 단화는 19절 전반이 출발점을 이룬다고 한다. “교회 공동체와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 현실화되었을 때 18절b가 아포프테그마적으로 확대되었을 것이다”(J. Gnilka, p. 148). 18절a는 마가의 편집이다.
“19절 전반과 21절 이하는 예수의 말씀일 것이다. 그리고 소개는 교회에 의해서 공식화되었다. 이것은 그 문제가 예수께서 금식하지 않으시는 것에 관련되지 않고,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에 관련되는지를 설명해 준다”(E. Schweizer).
19절 후반과 20절의 제자들이 금식해야 할 때에 대한 전망이 나오는 것은 갑작스런 것이므로, 후대의 첨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절 후반을 마가 이후의 주해로 주장하거나ㅡ여러 사본들에 이 문구가 빠진 것은 복잡한 마가 본문을 간편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ㅡ“20절을 교회 공동체의 오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E. Schweizer). “오히려 마르코 이전 전승 단계의 이러한 전망 때문에 이 단화는 전승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J. Gnilka, p. 140).
마가도 “이 전승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두에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 사이의 대결이 있다. 한쪽은 금욕적으로 살고, 다른 쪽은 구원의 때의 기쁨 안에서 산다. 좀 후대에 교회 공동체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대결이 뒤따른다. 지금은 상이한 금식의 관행이 문제된다. 그 밖에 예수의 공동체는 금식해야 할 새로운 동기를 지니고 있다”(J. Gnilka, p. 141).
이 단화는 논쟁의 성격을 지닌 아포프테그마로 보아야 한다. 마가는 이 기사를 【18】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로 시작한다.
요한의 제자들 곧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2:15의 주석을 보라.)이 금식하고 있는지라의 시제는, 미완료 과거형인 에산......네스튜온스()ἦσαννηστεύοντες)이므로, ‘금식하고 있었다’(RSV)로도, ‘금식하곤 하였다’(AV)로도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는 후자가 더 적합하다.
금식의 기원은 모호하지만, 엄격한 유대인들에게 금식은 규칙적인 습관이었다. 유대인들은 일 년에 단 한 번, 즉 속죄일(유대의 7월 10일)에 의무적으로 금식하며 자신을 괴롭혀야만 하였다(레 16:1-34, 23:26 -32, 민 29:7, 9-11, 사 58:5). 바로 이 날에 온 민족이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았다.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후, 즉 예언 시대의 말기에는 해마다 네 가지의 다른 금식을 행하였으며(슥 7:5, 8:19- : 4월, 5월, 7월, 10월의 금식), 이러한 전통은 1세기에도 계속되었다.
그런데 엄격한 유대인들 곧 바리새인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의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W. Barclay) 금식하였다(참조 : 눅 18:12).
“금식을 하는 일반적인 동기는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과 속죄와 간구이었다”(J. Gnilka, p. 143). “금식은 경건과 헌신과 비탄의 표현이었으므로(삼상 31:13), 하나님의 자비와 호의를 얻는 수단으로 생각되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좋은 준비로 간주되었다”(C. F. D. Moule).
이러한 금식은 “종교적 실행의 표준이라 자처하던 바리새인들”(M. Henry)에게서 지극히 의식적이며,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말았고, 또한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 되고 말았다”(E. P. Gould). 그 자연스런 결과로 그들은 자기들처럼 금식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였다.
그란트(F. C. Grant)는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 동기를 스승의 죽음 때문인 것 같다고 하지만, 본문에는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보다 더 그럴듯한 것은 “스승의 금욕주의와 고행을 따른 것이라는 추측”(E. P. Gould)과 “메시아 시대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라는 추측”(W. W. Wessel)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스승에게서 배운 “왕국의 도래ㅡ특히 심판의 국면에서ㅡ를 재촉하기 위해 계획된 회개의 표현으로서 금식했을 것이다”(W. L. Lane).
아무튼,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금식 행위는 같았으나, 그 정신은 달랐다는 점이다. 전자가 후자보다 구약성경의 교훈에 더 가깝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사야와 스가랴와 같은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의와 사랑이 없는 금식은 참된 금식이 아니라고 선언했다는 점이다(사 58:6-7, 슥 7:1-10).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의 혹이는 막연한 질문자들을 가리키는데, 이에 대해 누가는 바리새인들이라고 암시하고(눅 9:33), 마태는 분명하게 요한의 제자들이라고 밝히고 있다(마 9:14).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가 단순히 궁금증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및 제자들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을 미루어 양자를 포함해야 할 것이다.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이상야릇한 표현이다. 마치 플라톤 학파 사람의 제자들이라는 표현과 같은 것이다. 바리새인들 자신이 서기관 또는 랍비들의 제자들이었다(E. P. Gould).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바리새인이었던 서기관들을 염두에 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W. Hendriksen).
“위의 질문 내용은 가치 있는 종교 행위들을 수행하기 원하는 자들의 전형이다”(E. Schweizer). 그들의 도전적 질문의 요지는 예수님이나 제자들이나 다 율법 위반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도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던 40일 동안 금식하셨고, 최후의 만찬에서도 금식하겠다고 맹세하셨다(눅 22:16, 18). 그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금식하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라고 가르치셨다(마 6:16-18. 참조 : 행 13:2-3, 14:23).
그 도전적인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19】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옛 종교와 새 종교에 관한 첫째 비유이다. “이 비유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유대의 혼인은 랍비가 자신의 성경 교육에 지장을 초래하면서까지 참석할 만큼 중요한 의식이었다”(E. Schweizer).
{블룸(E. A. Blum)은 “그 축제는 혼인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신랑이 신부를 그 자신의 집이나, 혹은 부모의 집으로 동반하고 들어오는 순서로 이어졌다.”라고 하였다. 바클레이(W. Barclay)는 “결혼식은 축제 후 저녁 늦게 거행되었다. 결혼식이 끝난 후에 신혼 부부는 자신들의 새 가정으로 안내되었다. 그때까지에는 날이 어두워지고, 신혼 부부는 머리에 닫집을 얹고 불이 켜진 등불들에 의해 마을길로 안내되었다. 신혼 부부에게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잘 살기를 빌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한 먼 길이 택해졌다. 그러나, 신혼 부부는 신혼 여행을 가지 않고 가정에 머물렀고, 일주일 동안 집을 개방하였다. 신혼 부부는 관을 썼고 결혼 예복을 입었다. 마치 왕과 왕비처럼 대접받는 신혼 부부는 실제로 왕과 왕비처럼 옷을 입었으며, 그들의 말은 법이었다. 극심한 결핍과 끊임없이 힘든 일이 있는 한평생에 이 축제와 기쁨의 주간은 대단한 경사 중 하나이었다.”라고 하였다.}(요 2:3의 주석). 그때는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과 축제의 때로서 음악과 흥겨운 잔치가 대개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의 지상에의 복된 현존을 바로 이 혼인 잔치로 비유하신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자신을 신랑으로,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로 비유하신 것이다.
손님들은 휘오이(υἱοὶ)이며 문자적으로는 ‘아들들’이라는 뜻인데, 친밀한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결혼식 준비의 책임을 지고 있는 신랑의 친구들을 가키는 것이다”(A. E. Sanner).
요는 기쁘고 즐겁고 복된 혼인 잔치의 상황에서 금식하며 슬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오신 주님 예수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율법의 규례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그 까닭은 예수님의 강림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본격적으로 도래했고, 어둠의 권세가 물러가고 있으므로, 금식과 탄식의 때가 아니라 기쁘고 즐겁고 복받을 때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율법의 위에 계신 자이시며 완성자이시기 때문이다(마 5:17).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에게 요구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이상의 기쁨에서 나오는 종류의 행동이며, 또 이것은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소홀함을 내포할 수도 있다(2:14)”(E. Schweizer).
이와 같이 혼인이 메시아적인 구원의 때를 상징하는 것은 예언자들에게까지 소급된다. 일찍이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비유하였다(사 54:4, 62:4, 렘 31:32, 겔 16:8, 호 2:2, 7, 16 등). 때로 랍비들도 메시아 시대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혼인 잔치의 비유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구약성경이나 유대 문학에서 메시아가 신랑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W. L. Lane).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과 신자 사이를 부부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마 25:1-10, 고후 11:2, 엡 5:22, 계 19:7, 21:2, 22:17). 특이한 것은, 세례 요한이 자신을 신랑인 그리스도의 친구라고 했다는 점이다(요 3:29).
예수님은 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금식해야 할 때, 즉 자신이 대속의 죽음을 겪게 될 때에 대해, 【20】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일주일 동안 계속된 혼인 잔치가 끝나는 날, 신랑을 신부 방에 데려다 준 후에 친구들은 떠난다. 잔치하는 동안에는 금식일이 되어도 금식하지 않았다. 신랑과 헤어진 후에 비로소 금식하였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필요가 없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후에는 슬픔에 잠겨 금식할 것이다.
인류 최대의 비극은 바로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이다. 비탄과 동시에 우리는 그 죽음을 통해 성취되는 구원의 사랑을 감격적인 눈물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진정한 금식의 의미가 있다. 바로 이 예수님 안에서 율법주의 및 세상 모든 것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새 종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교회의 초기에서부터 내려온 “12사도 교훈(Didache) 8, 1에, 이미 공동체에서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는 것으로 전제되어 있다” (J. Gnilka, p. 145). 여기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금식의 중요한 의미가 예수님의 수난 및 죽음과 연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들에게 대답하신바 옛 종교와 새 종교에 관한 예수님의 두 번째 비유에 대해, 마가는 【21】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라고 하였다.
생베 조각은 예수님으로 인한 새 종교를, 낡은 옷은 옛 종교인 유대교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옛 종교에 새 종교를 결합하는 부적절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율법적인 규례와 의식 및 형식에 의한 행위를 규정하는 옛 종교에 복음적 원리와 동기에 의한 새 종교는 결합될 수 없다”(E. P. Gould). 율법 종교와 복음의 종교는 공존할 수 없는 다른 것이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지 율법과 동등한 것이 아니다. 복음의 새 종교는 그에 적합한 형식이 필요한 것이다.
저들에게 대답하신바 옛 종교와 새 종교에 관한 예수님의 세 번째 비유에 대해, 마가는 【22】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으로 인한 새 종교를 의미하고, 낡은 가죽 부대는 옛 종교인 유대교를 의미한다.
이 비유의 의미 역시 앞의 비유의 의미와 같다. 즉, “율법주의의 구조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 산출되는 새로운 경험의 생동성을 제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D. W. Burdick).
두 비유는 기독교가 단순한 유대교의 아류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으로, 유대의 율법들은 기독교인을 속박하지 못한다는 바울의 교훈의 예견이다. 율법의 속박은 복음의 자유를 감당할 수 없다.
米田豊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종교는 옛 의식이나 습관에 구애됨이 없고, 또 속박되지도 않는다. 구 종교를 수선하고 보충한 것이 아니라, 전적 새로운 혁명적 종교이며 구형을 타파하는 생명력 있는 종교, 거듭난 새 마음에만 간직될 종교(교훈)이다. 생명과 자유와 능력 있는 복음의 새 술은 의식과 율법의 낡은 부대에 넣을 것은 아니다. 복음의 은혜는 명실공히 새롭고 표지도 내용도 함께 새로움으로써만 의의가 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규례 또는 전승에 의한 금식 문제를 계기로 보다 더 근본적인 교훈을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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