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31 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07-02-11 21:54
조회
1287
풍성감리교회. 훼이스신학대학(원) 교수. 426-3051)
(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난해 성구 해설/ 형통의 기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영문, 한글/ 설교집 17권)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31 강>>

8. 여러 가지 이적[4:35-5:43]

성경에는 표적(세메이온, σημείον)과 기사(테라스, τέρας)가 흔히 같이 나타나는데(출 7:3, 9, 신 4:43, 사 8:18, 단 6:27, 마 24:4, 요 4:48, 행 2:19, 4:30, 5:12, 고후 5:12), 거의 같은 의미의 말이다.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으로 생기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의미한다.

표적과 기사의 차이점은, 전자가 인간계에 나타나는 이적임에 비해, 후자는 주로 자연계에 보여지는 이적이다. 전자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진리의 상징 등의 영적 면에 치우치는 반면에, 후자는 인간의 눈길을 끄는 외적 면에 치우친다.
아무튼, 표적이든 기적이든 간에 최대의 것은 타락한 인간과 세계가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마태는 주제별로 전승을 정리하여 모아 기술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마가도 4:1-34에서는 비유를 모았고, 여기서는 이적의 기사들을 모아 놓고 있다. 첫째는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4:35-41), 둘째는 거라사인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내신 것(5:1-20), 셋째와 넷째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혈루증의 여인을 고치신 것(5:21-43)이다. 이 기사들은 자연과 악귀와 인간의 병과 죽음에 관한 대표적인 이적들을 소개하는 것이다.

가. 바람과 바다를 지배하심<4:35-41>
    <비교 : 마 8:23-27, 눅 8:22-25>

山口 昇은 “이것은 소위 자연계에 대하여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자연 기적’이다. 랍비의 가르침에서는 모세를 메시아의 모형으로 보고 있으므로, 예수의 이적 설화를 모세의 생애에 있어서의 이적적 사건에서 만들어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스트라우스). 그는 시편 106편 9절의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라고 하는 표현의 영향이 이 예수의 이적 설화에서 보여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측은 불트만까지도 부정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불트만(R. Bultmann)은 “피비히(a. a. O. S. 61)가 재수록한 랍비 탄후마(주후 약 350년경)의 이야기(jer. Berach XI, 1)는 유사형일 수도 있다. 즉, 어떤 유대 소년이 이방인의 배로 여행을 떠났다. 광풍이 일어나 배가 뒤집히게 되자 이방인들은 제각기 그들의 신을 불러 도와 줄 것을 호소했지만 허사여서, 결국 유대 소년을 불러 그 소년의 신을 부르도록 해야 했다. 이 소년의 기도로 광풍이 조용해지자 이방인들은 모두 경탄하여 소년의 신을 경배했다. 여기에는 고래와 요나의 이야기가 연결된 욘 1장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볼 수 있는 옛 사화가 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 텍스트는 순수한 것은 아니지만, 3b(‘여호와의 낯을 피하여’라는 끝 대목을 제외)과 4aa 5aa. 6. 8.(‘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나’라는 말은 제외) 등의 구절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10aa. 15b. 16절에는 어떤 유대인이 광풍 중에 이방인의 배에서 잠자다가 그의 신을 불러 광풍을 잠잠하게 한 설화가 있다. 그래서 막 4:35-41은 분명히 이 설화와 저 랍비 설화의 중간일 것이다. 공관서의 것과 구약의 변형이 일치함은 요나 및 예수가 잠잔 장소 묘사의 세부적 부분에서 특히 드러난다. 그 밖에 이방인 선원과 유대인 선객과의 대조는 기독교 전승에서 제자들과 예수의 대조로 바뀌었다. ■여기서 이방의 이적 설화가 예수에게 전용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설화와 다른 설화 사이에 약간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점만을 들어서, 한 설화가 다른 설화의 도용 내지는 전용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 있는 견해라 할 수 없다. 동양과 서양, 그리고 이 종교와 저 종교, 이 문화와 저 문화 사이에 유사한 설화나 교훈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더욱이, 불트만(R. Bultmann)이 언급한 설화들과 본문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점들이 있다. 그닐카(J. Gnilka, p. 249.)와 山口 昇도 같은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는 마태나 누가에게서 볼 수 없는바 생생한 묘사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아, 마가가 목격자인 베드로에게서 들은 것을 기록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헨드릭슨(W. Hendriksen), “데라, 크랜필드”, 山口 昇 등이다.

마가는 이 기사를 【35】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로 시작한다.

그 날 저물 때에를 마가의 도입구로 보는 이(다가와)도 있으나, 38절에 “주무시더니”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아, 본래의 전승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R. Bultmann, 山口 昇). 이는 예수님이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던 날의 저녁을 가리키는 것이다. “마가가 저녁을 날이 저무는 것으로 본 것은 그리스적인 하루의 과정을 전제한 것인데, 유다인들에 의하면 저녁에서부터 하루가 시작되었다”(J. Gnilka, p. 249).

예수께서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라고 하신 것은 군중을 피해 피곤한 몸을 쉬는 동시에 새로운 선교지를 찾으시기 위한 것이다, 여기의 저편은 갈릴리 호수의 동부 지역이나 거라사 지방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시를 따른 제자들에 대해, 마가는 【36】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하더니라고 하였다.

마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다른 배들도 함께하더니는 이야기의 줄거리에는 불필요한 부분이므로, 목격자(베드로)에게서 들은 설명인 것 같다( A. E. Sanner, “데라”, 山口 昇).

배(플로이오, πλοίῳ)는 보통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데 사용되는, 노를 젓는 작은 배였을 것이다. 관사(토, τῷ)가 있는 것을 보면, 베드로의 조그만 어선이었던 것 같다.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발생한 위기에 대해, 마가는 【37】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과 동행하는 제자들의 뱃길에 큰 광풍이 일어나면서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어서 침몰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갈릴리 호수는 지중해의 해면보다 212m 가량 낮고, 사위에는 그와 반대로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기상이 돌변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나서, 이른바 일진 광풍이 몰아쳐 작은 어선에 탄 어부들을 당황하게 하는 일이 흔했다. 이 사건은 주님과 동행하거나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인생 길에도 환난과 핍박의 거센 풍랑이 일 수 있다는 교훈이 되기도 한다.

위기에 처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상반된 태도에 대해, 마가는 【38】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는 극적 효과를 드러내는 매우 놀라운 대조를 나타내는 것이다.

거센 바람과 거센 파도의 부딪침과 철썩거림도 예수님을 깨울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그 날의 선교 활동으로 몹시 지치셨기 때문이며, 또한 성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화로운 잠이란 신뢰의 상징이다(사 43:2, 시 46:27, 65:7, 107:23-32).

베개와 관련하여 “라그레인지(Lagrange, p. 231)는 ‘이런 배들에는 틀림없이 어떤 특별한 손님을 위한 장소가 고물에 위치한 작은 자리 위에 있었다. 그 곳에는 양탄자나 방석이 정돈되어 있었다.’라고 하였다. 그 방석은 분명히 갑판 위에 있는 유일한 것이며, 예수께서 그것을 베개로 사용하신 것이다”(W. W. Wessel).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는, 위기에 처한 제자들의 불안과 두려움으로 인한 소동을 나타낸 것이다. 이런 태도는 같은 위기의 상황에서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아무튼, 주로 어부 출신인 제자들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한 것을 보면, 그 광풍과 풍랑이 매우 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처음 사용된 선생님(디다스칼레, διδάσκαλε)이란 그들의 제자 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 말은 제자가 아닌 사람들도 사용하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말하기를,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부르짖었다. 예수께 대한 제자들의 비난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죽음에 직면해 있는데, 어떻게 당신은 잠만 잘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당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가?”(W. Hendriksen).

사람들은 자신의 위기나 불행을 과장하는 나쁜 습성이 있다. 그래서, 위기나 불행 그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 과장한 위기나 불행에 짓눌려 좌절하는 것이다. 사실상, 위기나 불행의 때야말로 창조주요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정말 필요한 때이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는 오히려 믿음이 움츠러들거나 사라지고 만다. 이러한 사실은 제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죽게 되었다고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생각일 뿐이지, 아직은 실제로 죽게 된 것은 아니다. 배에 물이 덮이게 되었을 뿐이지, 배가 난파된 것은 아니다. 설령 난파됐다 하더라도 헤엄칠 힘이 있는 한 아직도 죽기까지는 분명히 여유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그들의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정말 어려운 인생 문제는 인생의 풍랑을 풍랑 그 자체로 직시하지 못하고 과장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비난의 성격을 지닌 것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에게 도움을 구한 것을 보면 그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 헨드릭슨(W. Hendriksen)은 “그들의 비난은 어느 정도의 신뢰와 뒤섞인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경험 있는 항해자들인 그들 중 어떤 사람도 일종의 목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그들의 믿음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거의 없는 믿음이기는 하나 믿음이 있기는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바라시는 만큼의 믿음은 없었다.

제자들의 소동에 잠을 깨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아직 제자들의 비난에 대해 반응을 보이시지 않고, 기적을 일으키는 말씀을 하신다.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구약성경(사 50:2, 나 1:4, 시 106:9)에는 하나님이 바다를 꾸짖으신다고 하는 표현이 있다. 따라서, 마가의 의도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자연을 명하여 복종케 하시는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의 명령이, 당시의 사람들이 믿은바 해로운 자연의 세력 안에서 활동하는 악한 귀신들에 대한 것인지(J. Gnilka, p. 250, W. Barclay),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고, 또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곤경에 처한 제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광풍을 꾸짖으셨고, 바다에게 잠잠하고 고요하라고 명령하셨고, 그 결과로 즉시 아주 잔잔해졌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환자들을 고치시는 메시아적 권능을 행하시는 분으로 알려지셨던 예수님은, 이제 대자연까지 지배하시는 분이심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창조주로서의 예수님은 또한 만물을 통제하신다(골 1:16-18).

신적 권능을 가진 분으로서의 예수님은 어떤 상황이나 어떤 처지에 있는 인간이라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때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관심 없이 주무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분명히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시기도 하신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사람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 그를 구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자신이 메시아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확실히 드러내기 위한 일시적 숨김’이라는 예수님의 취지가 여기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궁극적 관심은 치유도 아니고, 귀신 쫓음도 아니고, 재물의 복도 아니라, 영원한 구원이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신 기적을 보이신 예수님이 겁에 질려 자신을 비난하면서 깨우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서, 마가는 【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라고 하였다.

이성적 사고로는 제자들의 불안과 두려움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나, 오히려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라고 그 제자들을 나무라셨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제자들의 불안과 두려움이 예수께 대한 믿음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연이어서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나무라신 것이다. 이 나무람(πώς οὐκ ἔκετε πίστιν)은 A, C, K 사본 등을 따른 것인데, 보다 권위 있는 א, B, D, L 사본 등에는 “어찌하여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ούπω?)로 되어 있다. 아무튼, 이 책망 조의 질문은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가 설화자의 목적이 발견되는 곳이다”(E. Schweizer).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동안 많은 메시아적 교훈과 메시아적 권능을 듣고 받았으므로, 이 때쯤에는 성숙한 믿음을 보여 주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거의 없었다”(W. Hendriksen). 여기서 두려움과 대조시킨 믿음이란 예수님 안에 계셔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 신뢰로서의 믿음은 어떤 진술에 대한 일시적 동의가 아니라, 전 생애를 하나님에게 내맡기는 것이다. 黑崎幸吉은 “절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공포는 없다. 생사간에 서서 태연히 이에 처할 수 있다.......어떠한 위험 속에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태연한 것이 참 신앙이다.”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을 겪은 제자들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41】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라고 하였다.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의 원문(ἐφοβηθσαν φόβον μέγαν)을 직역하면, ‘저희가 큰 두려움으로 두려워하였다’이다. 이것은 히브리식 표현법이다. 이 ‘두려움’(포본, φόβον)은 4:40의 “무서워하느냐”(데이로이, δειλοί )와는 다른 것으로, ‘삼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공경하며 두려워하는 것’(사 66:2, 5, 렘 44:10, 잠 28:14, 빌 2:12)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근본이다(욥 28:28). 이 두려움에 대해, 슈바이쳐(E. Schweizer)는 “이 두려움은 폭풍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이다. 그것은 불안과 뒤섞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결합될 수 있는 것이다(시 33:18). 그 까닭은 사람이 두려워해야 할 단 한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론적 영역이 아니라, 실제로 사는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두려움 등이 있다.”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제자들은 주의 능력과 존엄성과 영광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다”(W. Hendriksen).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대자연마저 순종케 하시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체성에 대한 놀라운 인식을 나타낸 것이다. 교회나 교인들이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본질적 정체를 더욱더 깊이 인식하는 데에는 인생의 풍랑보다 더 좋은 계기가 없다.



전체 0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공지사항 관리자 2012.05.23 3750
32 최세창 2007.02.26 1179
30 최세창 2007.02.05 1264
29 최세창 2007.01.29 1162
28 최세창 2007.01.22 1083
27 최세창 2007.01.15 1280
26 최세창 2007.01.08 1293
25 최세창 2007.01.03 1311
24 최세창 2006.12.18 1250
23 최세창 2006.11.27 1257
22 최세창 2006.11.19 1160
21 최세창 2006.11.13 1379
20 최세창 2006.11.06 1343
19 최세창 2006.10.30 1482
18 최세창 2006.10.28 1459
17 최세창 2006.10.16 1458
16 최세창 2006.10.08 1405
15 최세창 2006.10.08 1339
14 최세창 2006.10.02 1328
13 최세창 2006.10.02 1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