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14 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06-10-02 10:14
조회
1329
최세창:풍성감리교회, 훼이스신학대학원 객원 교수. 저서:신약 27권 주석 외 다수. 426-3051)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2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2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14 강>>

마. 나환자를 고치심<1:40-45>
    <비교 : 마 8:2-4, 눅 5:12-16>

불트만(R. Bultmann)은 “43절의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와 44절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와 45절에서 마가의 첨가문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고, 그닐카(J. Gnilka, p. 113.)는 “그 자체로 보아서 행위의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시간이 나타나 있지 않고, 제자들에 대한 언급도 없는 이 설화의 모순적으로 보이는 구조로 인해 설화자들이 다양한 개정 작업을 했다는 점은 당연하다.”라고 하였다. 또, 로마이어(Lohmeyer)는 “혹은 하나는 침묵 명령에, 또 하나는 사제에게 가라는 당부와 결부되어 있는 두 개의 설화가 40-45절에 결합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위의 견해 중 어느 것도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아무튼, 초기의 전승에 속한 것은 틀림없으나, 하나의 전승인지, 전승들의 결합인지, 베드로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기사는 【40】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로 시작된다.
문둥병 곧 나병은 성경과 유대교에서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아주 불행한 재액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었다. 레위기 13-14장과 미쉬나 단편 네가임(Negaim)은 나병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자로 간주되었다(민 12:12). 실상 이 병의 치유는 죽은 자의 소생과 같이 어려운 것이었다.
나환자는 부정한 자로 규정되었으며, 따라서 사회에서 격리되었다. 레위기 13:45-46에 의하면, 나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서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아야만 하였다. 예수님의 시대에 나환자는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예로부터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도시들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격리 규정이 있었다. 그들은 다른 지역들에 머물 수는 있었지만, 거주지 밖에서 홀로 살아야만 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과의 접촉은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랍비 신학은 나병을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간주했으므로, 나환자는 저주받은 죄인으로 취급되었다. 여기에 나환자의 또 다른 고뇌, 즉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었다는 고통스런 자의식이 있었다.
나병에서 완쾌된 사람은 그 사실에 대해 제사장에게서 확증을 받아야만 일반인과 같이 생활할 수 있었다. 제사장의 확증을 받는 데는 제물이 결부되므로, 확증을 받는 곳은 예루살렘 성전 외에는 없었다.
특기할 사실은 성경에서 말하는 나병에는 진성 나병이 아닌 경미한 피부병도 포함되었다는 점이다(레 13:47, 14:34).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는 그가 예수께서 만져 주실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 사실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는 율법(레 13:45-46)을 어긴 것이다. 이 점에 대해, 고울드(E. P. Gould)는 “그는 율법이 보다 높은 것에 장해가 될 때에 망설임이 없었다.”라고 하였고, 슈바이처(E. Schweizer)는 “이 문둥병자는 장벽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권위에 모든 것을 맡겼다.”라고 하였다. 예수님 또한 율법에 얽매여 그의 접근을 막는 일은 하시지 않았다.
참으로 예수님을 만나려면, 어떤 이유나 조건이나 장벽 등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신뢰하는 절대적 믿음이 앞서야 한다.
꿇어 엎드리어는 본서의 독특한 사실적 표현이다. 이에 비해 마태복음에는 “나아와 절하고”(마 8:2)로, 누가복음에는 “엎드려”(눅 5:12)로 되어 있다. 아마 꿇어 엎드려 경배한 것을 각자가 부분적으로 묘사한 것 같다. 아무튼, 나환자의 태도는 가장 겸손한 태도와 지극한 존경의 태도와 애절한 간청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는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꺼워하는 마음을 의심하는 것이다(E. P. Gould, W. W. Wessel). 그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랑과 능력을 절대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자신의 소원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대신에 그 자신의 소원에 대한 처리를 예수님께 전적으로 맡긴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훌륭한 의사 또는 선지자로서가 아니라, 신적 존재로 믿고 존경하였다. 이 점은 ‘당신이 하나님께 구하시면......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하지 않고,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는 누구도 고칠 수 없는 자신의 나병을 예수님만은 고치실 수 있다고 믿었다. “때로 신체의 병은 영혼의 건강에 필수적이다”(E. Bickersteth).

나병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한 환자의 겸손한 믿음과 애절한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41】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께끗함을 받으라 하신대라고 하였다.
민망히 여기사(스플랑크니스테이스, σπλαγχνιςθείς)는 א, A, B, C, K, L, W, Δ, Θ, Π 사본 등을 따른 것이나, D 사본에는 “노여움에 불타사”(오르기스테이스, ὀργισθείς)로 되어 있다. 사본들의 가치상, 또 이 경우에 예수님이 노여움에 불타실 이유가 없으시다는 점을 보아 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
민망히 여기사는 사랑과 자비에 의해 마음이 움직인 것을 뜻한다. 이는 본서에서만 밝히고 있는 이적의 동기이다.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는 예수께서 나환자와의 접촉을 금하는 율법을 무시한 행동이며, “동정심을 표시하는 것이다”(J. Calvin, H. Alford). “예수님에게 있어서 나환자는 부정한 자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필사적인 요구를 가진 영혼이었다”(W. Barclay).
또한, 예수께서 나환자에게 손을 대신 것은 “사랑과 동정을 종교적 의식과 규정보다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W. W. Wessel)과 “의식적 율법과 사랑의 법이 충돌될 때에는 후자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C. H. van der Loos). 한마디로 말해,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보다 우월함을 보여 주신 것이다”(E. Bickersteth).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는 나환자의 믿음에서 비롯된 간청에 대한 예수님의 온전한 응답이다. 예수님의 의지 곧 기꺼워하는 마음과 명령의 말씀과 역사(役事) 사이에 간격은 없다. 벵겔(J. A. Bengel)은 “그 나환자의 성숙한 믿음에 대한 합당한 응답이었다.”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명령하신 말씀의 결과에 대해, 마가는 【42】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나병이 완전히 치유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의사의 병고침과 같은 것이 아니라, 신적 능력에 의한 치유이다.
복음서들에는 예수님이 환자에게 손을 대어 고치시는 것에 대해 자주 언급되어 있다(막 1:41, 7:33. cf. 마 8:3, 15, 9:29, 17:7, 20:34, 눅 5:13, 7:14, 22:51). 어떤 때는 환자가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옷을 만져 병고침을 받았다(3:10, 5:27-31, 6:56). 예수님과의 접촉과 관련하여 분명한 것은 병을 고치는 능력이 그분에게서 나와 환자에게 전해진다는 것이다(5:30, 눅 8:46).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요술이 아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은 예수님의 손가락이나 겉옷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인 예수께로부터, 그리고 그분의 전능한 의지와 무한한 동정심으로부터 곧바로 나오는 것이다”(W. Hendriksen). 대개 예수님의 이적은 예수님의 말씀 또는 명령에 동반된다. 시편 33:9에는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라고 하였다.
나환자를 고치신 예수께서 하신 일에 대해, 마가는 【43】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라고 하였다.
엄히 경계하사는 매우 강한 동사인 엠브리메사메노스(ἐμβριμησάμενος)이며, 원래 말이 화가 나서 콧김을 내뿜는 것, 또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거나 떠드는 것(W. Hendriksen, D. W. Burdick)을 의미하였고, 여기서 ‘분노하는 것’, ‘호통치는 것’, ‘아주 거칠게 말하는 것’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신 이유에 대해 바이스(Weiss)는 나환자가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금하는 건전한 율법을 위반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율법 위반과 관련하여 그는 치료가 점진적이어서 그 나환자가 예수님을 떠났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시키기 쉽다고 추측하였다. 그러나, 이 견해는 예수님도 나환자에게 손을 대셨다는 점과 42절을 보아 받아들일 수 없다.
마이어(Meyer)와 웨셀(W. W. Wessel)과 스탤린(Sthlin)과 레인(W. L. Lane)은 예수님이 나환자의 불순종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지 않으신 경우에도 그분의 은혜를 받은 후에 불순종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6:45-52, 7:36 등)을 보아 받아들이기 어렵다.
헨리(M. Henry)는 “완쾌된 나환자가 나병의 원인인 죄를 또다시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라고 하였다. 웨슬리(J. Wesley)는 “이것은 깨끗하게 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에 대하여 많이 말함으로써 그가 제사장에게 직접 가기 전에 그 이야기가 제사장들의 귀에 들어가면 그들이 주님에 대한 시기와 적개심 때문에, 그 환자가 율법을 따라 자기 몸을 보이는 데 대해 트집잡을 말을 준비할까 해서이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와 무관한 단순한 이적 행위자로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귀신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은 이유와 같은 것이다(1:34의 주석을 보라).

같은 이유로 예수께서 고침을 받은 나환자를 곧 보내시며 경계하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44】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라고 하였다.
위에 밝힌 이유는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라는 예수님의 당부로도 뒷받침된다. 이것은 메시아 비밀의 동기 중 하나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라고 명하셨다. 이 말씀은 레위기 13-14장의 복잡한 회복 규례를 준수하라고 하시는 명령이다. 이 규례를 이행한 후에야 비로소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나환자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율법이 사랑의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거룩한 것으로 알고 지키셨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고 분명하게 밝히셨다(마 5:17).
고침을 받은 나환자는 고침 받은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엄한 경계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하였다. 이 사실과 결과에 대해, 마가는 【45】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는 마가만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 사람은 감사와 감격과 놀라움과 기쁨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그 나름의 동기는 좋은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사업에 지장을 주고 말았다. 또한, 예수께서 들어가려고 하셨던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교훈과 능력 있는 사랑을 받을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을 죄인들인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로서가 아니라, 단순한 이적 행위자로 알고 이적의 혜택을 받고자 하는 무리의 환성과 갈채를 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성부 하나님과의 사귐을 기뻐하셨다.
오늘날에도 믿는 자들의 자기 본위의 생각과 언행 때문에 주님의 사업이 지장을 받고, 또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을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 체험이 복음을 희석시키거나 뒷전으로 밀어 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예수님의 복음 선교가 완전히 제지당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이 바깥 한적한 곳에 계신 것을 안 사람들이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왔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복음 전도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과 복음 전도자를 찾아가서 듣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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