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19 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06-10-30 17:31
조회
1482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풍성감리교회 목사. 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설교집 16권. 426-3051)

<<제 19 강>>

마. 안식일의 치료<3:1-6>
    <비교 : 마 12:9-14, 눅 6:6-11>

불트만(R. Bultmann)은 이 이야기를 논쟁 및 사제대화로 보지만, 실상은 좀더 복잡한 양식으로 되어 있다. 그닐카(J. Gnilka, p. 159.)는 “이 단화의 문제점은 양식상으로 기적설화, 논쟁대화, 그리고 전기적인 아포프테그마(이중적인 질문으로 된)의 혼합물이라는 데 있다. 마태오복음의 병행 단화는 질문과 반문을 지닌, 보다 양식에 부합된 논쟁대화를 제시하고 있으므로(12:9-14), 전승의 본래적인 형태가 마태오복음에 보존되어 있다고 학자들은 생각하였다. 마태오가 적대자들의 서론적인 질문을 마르코에서 빌려 오고, 적대자들의 생각은 분명한 말로 바꾸었을 뿐이며, 루가복음에도 나오는 한마디 말씀으로 예수의 대답을 확대시킨 것이므로 그러한 견해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마 12:11).”라고 하였다.
6절에 대한 평가는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불트만(R. Bultmann)과 슈바이처(E. Schweizer)는 마가에 의한 가필이라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전자는 “이 결어는 보통 논쟁 및 사제대화에서 볼 수 없고, 이 사화의 핵심ㅡ안식일 병고침에 관한 원칙적인 물음ㅡ과도 어긋나는 전기적 관심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후자는 “2:1 이하의 논쟁설화를 결론짓기 위한 것이거나, 또는 1:14에서 시작된 첫 번째의 주요 부분을 결론짓기 위한 것 같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데라는 본래의 전승에 속해 있었다고 생각한다. 2절의 ‘엿보거늘’이나 3절은 설화의 줄거리에서 말하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 5절의 예수님이 노하심으로 둘러보신 점 등은 이 전승이 목격자의 회상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C. E. B. Cranfield). 그닐카(J. Gnilka, p. 160.)도 “학자들이 생각하는 대로 마르코가 관심을 갖지도 않고, 수난설화에도 나타나지 않는 헤로데당원들, 사용된 언어의 일부, 그리고 살해의 결의를 암시하는 적대자들의 예수를 고발하려는 의도(2절b) 등은 마르코 이전의 전승임을 말해 준다. 대문자사본은 결정적으로 마르코의 편집임을 보여 준다.”라고 하여, 6절이 마가의 가필이 아니라 본래의 전승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기적설화, 논쟁대화, 아포프테그마가 혼합된 양식으로 된 이 설화는, 마가가 편집한 마가 이전의 전승이라 할 수 있다.
마가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제자들로 인한 바리새인들의 적의에 이어, 한 걸음 더 나아가 안식일에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이 곳에 편집함으로써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또한 그들의 적의가 살의에까지 이르게 된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마가는 이 이야기를 【1】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로 시작한다.
다시(팔린, πάλιν)는 2장 끝에 이어진 것(E. Bickersteth, 山口 昇)이 아니라, 1:21-28 후에 있은 일(E. P. Gould)을 가리킨다. 즉, “같은 날에 되풀이한 행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연속성을 위해 화자가 고안한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F. C. Grant).
회당(1:21의 주석을 보라.)은 예수님의 본부인 가버나움 근처의 어떤 회당일 것이다. 이런 추측은 마가와 누가가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12제자를 선택하시고, 산ㅡ아마도 가버나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눅 7:1. cf. 마 8:5) 산이나 언덕ㅡ으로 올라가신 것과 밀접하게 연관짓는다는 사실(막 3:13-19, 눅 6:12-49)을 고려할 때 가능하다(W. Hendriksen).
예수님이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감시의 의무가 있는 대표가 가장 영예로운 자리인 앞자리에 앉아 있는 회당에 다시 들어가신 것은, 네 번의 충돌을 통해 예수님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아주 다르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매우 용감한 행동이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용감한 행동은 사랑과 진리를 위한 것이며, 바로 거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 이 예수님의 행동은 사랑이나 자비에 저촉되지 않는 한 율법을 준수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손 마른 사람의 마른이 형용사가 아니라 분사(엑세람메넨, ἐξηραμμένην : ‘오그라드는’, ‘바싹 마르는’, ‘마비되는’)로 된 것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결과로 볼 수 있지만(“Vincent”, 이상근), 증명할 수는 없다.
누가는 그 마른 손이 오른손이라고 했고(눅 5:6), {외경인 히브리 복음서(Hieronymus, Hebrerevangelium)에는, 이 사람의 곤경이 사회적 견지에서 예리하게 묘사되었다. “저는 미장이였습니다. (내) 손으로 생계를 마련했지요. 예수님, 부디 수치스럽게 먹을 것을 구걸하지 않도록 제 건강을 회복시켜 주십시오.”}(막 3:1의 주석).
이 사람은 건강을 잃어버림으로써 본의 아니게 자신의 생업에 종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의 즐거움, 더 나아가 인생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었다.

그 회당 안에는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적들인 유대 지도자들도 있었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2】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에 대해 마가(6절)와 마태(12:14)는 바리새인들이라고 했고, 누가(6:7)는 서기관들을 덧붙이고 있다. 그들은 예배나 율법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1:21의 주석을 보라.)에 그를 고치시는가 엿보는 데 열심이었다. 실상, 그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알았고, 또 예수님이 그를 고치실 것을 확신하였다.
여기에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14절, 눅 6:7)은 예수님이 분명히 그 환자를 고쳐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면서도, 그들 자신은 환자의 필요를 빌미 삼아 사랑의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엿보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문자주의, 의식주의, 형식주의에 얽매여 영성과 도덕성과 지성을 잃어버린 위선적인 종교인의 전형이다. 그들에게 이런 것들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자기들이 못하는 사랑을 남이 할 때에 감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엄격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자신의 생명조차도 지키지 않았다.......마카비 전쟁 때와 로마의 폼페이가 이스라엘을 침입하여 전쟁이 벌어졌을 때, 유대인들이 안식일에는 피신도 방어도 하지 않았으므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라고 하였다.

랍비의 전승에 의하면, 안식일이라도 인간의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에는 고치는 일이 허용되었다(‘미쉬나’ 샤바도 18:13. Joma 8:6). 그러나, 분명히 이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으므로 적어도 바리새인들에게는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환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이 그를 고쳐 주시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를 고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송사할 건수를 얻기 위해 엿보는 유대 교권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3】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적들의 은밀한 흉계와 비열한 궤계에 맞서 공개적으로 그를 고치시려는 뜻과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시려는 뜻을 드러내신 것이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깨우치시려는 의지를 드러내신 것이다.
그 환자는 율법의 규정을 어기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회중 한가운데 일어나 섰다.
이어서 예수님은 적들의 의도에 대해 병행적인 구조가 주목되는 이중적인 질문으로 반박하신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4】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이라고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치료는 물론,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안식일이 몸을 쉬면서 생명의 창조주시며 선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기쁘시게 하는 등의 영적 교통을 해야 하는 특별한 날이라고 하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적들에게 이중의 질문을 하신 것이다.
선을 행하는 것(아가토포이에사이, ἀγαθοποιήσαι)과 ‘악을 행하는 것’(카코포이에사이, κακοποιήσαι)은 ‘옳고 그름’, 또는 ‘유익과 피해’라는 뜻에서 한 말이다. 환자를 고치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고, 그 선을 행하려는 것을 막고, 더 나아가 선행자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을 악행으로 여기신다. 야고보서 4:17을 보면,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라고 하였다.
빅켈스테트(E. Bickersteth)는 “바리새인들은 선행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고 영예롭게 ‘해야’ 하는데, 오히려 악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다른 날보다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것은 더 나쁘다.”라고 하였다.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이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아신 데서 나온 것이다(J. Calvin, J. Wesley, W. Barclay). 적들은 안식일이라도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에는 치료가 허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안식일에 도움을 받지 못하는 짐승을 구하는 것을 선행으로 여겼다. 만일에 그 짐승을 구해 주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죽게 하는 원인이 될 것이다. 이는 분명히 악행이다”(R. A. Cole).}(막 3:4의 주석).
안식일에 불쌍한 짐승을 구해 주어야 한다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생명을 구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만일에 생명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 인간을 죽게 하는 원인이 될 것이다”(E. Bickersteth, J. Gnilka, p. 162, E. Schweizer). 이것은 분명히 간접적인 살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그것도 선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의 옳으냐는 엑세스틴(ἔξεστιν)이며 ‘합법적이냐’, ‘율법에 합당하냐’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질문은 서기관식의 율법 연구에서 결정된 ‘할라카’(1:22의 주석을 보라.)의 관점에서의 대답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전승은 율법이 안식일의 생명 구원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적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할라카를 논의하기를 거절하였다”(W. L. Lane).
유대교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적인 오만과 편견과 아집 때문에 정당한 이유에 대해 굴복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직접적인 저항을 할 수도 없어서 침묵할 뿐이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사단의 역사는 안식일에도 예외 없이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영적 무장을 해제하거나, 일방적인 휴전 상태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사실상, “예수님의 이런 노력의 배후에는 안식일과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해방적인 입장이 담겨 있으며, (안식일과 율법을) 동시대인들이 율법주의적으로 낯설게 만드는 데 대한 예수님의 투쟁이 담겨 있다”(J. Gnilka, p. 162).
적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침묵의 의미를 간파하신 예수님에 대해, 마가는 【5】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라고 하였다.
마음(카르디아스, καρδίας : 2:6의 주석을 보라.)의 완악함은 불신앙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J. Gnilka, p. 163).
완악함은 포로세이(πωρώσει)이며 {“원래 대리석보다도 더 굳은 몸을 뜻하는 포로스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이 말은 관절 속에 생겨 그 동작을 마비시키는 통풍석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은 뼈가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자리에 생기는 경결을 의미하는데, 본래의 뼈보다 더 단단하다. 끝으로 이 말은 모든 감각 능력의 상실을 의미하게 되었다”(W. Barclay).}(엡 4:18의 주석).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만을 위해서 오래 살다 보면, 결국 선한 일들을 위한 호소에 무감각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 결국 죄의 공포와 선의 매력에 무감각하게 된다”(W. Barclay).}(롬 11:7의 주석). 만일 인간이 자기 본위의 삶을 열심히 추구하다 보면, 결국 하나님께 대해 무감각해지고 만다. 그는 하나님의 채찍을 맞아도 아픔만을 느낄 뿐이지, 그 속에 담긴 사랑의 징계를 지각하지 못한다. 바울은 그러한 이방인들을 가리켜,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라고 탄식하고 있다.
율법주의에 의거하여 자기 본위와 자기 위주의 삶을 열심히 추구하던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율법의 참 뜻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의 어두워진 눈과 귀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대리자이신 예수님의 이적과 말씀을 보고 들으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했고,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마 13:13-15, 막 4:12, 행 28:26). 그 유대의 지도자들은 영적 중환자들이거나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었다.
그들에 대해 예수님은 근심하셨다. 근심하사는 쉰(σύν : 함께)과 뤼페오마이(λυπέομαι : ‘고민하다’, ‘슬퍼하다’, ‘가슴 아파하다’)의 합성어인 쉴뤼푸메노스, συλλυπούμεενος)이며 ‘남의 불행을 같이 아파하며 슬퍼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영혼의 병과 죽음 때문에 같이 아파하고 슬퍼하는 사람은 그 원인인 죄와 완악함에 대해 진노할 수밖에 없다.
노하심으로 둘러보시고의 노하심은 오르게스(ὀργής)이며, 여기서는 단순한 인간으로서의 감정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서의 죄에 대한 적대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섬세한 감정의 묘사는 본서의 특징 중 하나이다.
저희를 둘러보시고는 예수님이 도전적으로 모든 사람을 둘러보셨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려는 선교적 동기도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란 창조적이며 권위 있는 신적 명령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함에 있어서 율법(안식일)도 적들의 음모도 자신의 위험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참 선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는 그의 예수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순종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의 믿음은 율법의 의식적 규례와 유대 지도층의 비난과 정죄 그리고 불치병이라는 자신의 인식 등을 뛰어넘은 것이다.
아무튼,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것은 바리새적 전통과 율법주의적 권위를 여지없이 깨뜨린 것이었다. 예수님은 종교적 규례와 규칙이 아니라, 종교의 참 뜻으로서의 사랑을 내세우셨다. 여기에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는 예수의 선교와 세상 구원은 이미 그 지평이 나타난 것이다”(E. Schweizer : 6절의 해석).
헨리(M. Henry)는 “영적으로 우리의 손은 말랐고, 죄로 인해 영혼의 힘은 약해졌으며, 선을 행할 힘이 없다.......위대한 치료의 날은 안식일이고, 치료의 장소는 회당이며, 치료 능력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왔다.”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있어서 주일과 교회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다.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안식일 치료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최소한의 영향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악감을 자극하여 극에 이르게 하였다. 사랑과 선행이 모든 사람에게 감사와 감격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 교권자들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6】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라고 하였다.
원문의 첫머리에는 ‘즉시로’(유테오스, εὐθέως)가 있어서 그 교권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헤롯당과 손을 잡은 재빠른 행동을 나타내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2:16의 주석을 보라.
헤롯당은 종파나 정식 정당이 아니라, “갈릴리 분봉왕인 헤롯 안티파스”(눅 3:1)와 그 가족들의 친구, 또는 지지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를 감수하기는 했으나(W. L. Lane, 마경일), 로마 총독을 반대하고 헤롯 왕의 지배를 원한 일종의 정치적 결사이다(마경일). 그러므로 그들은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에게서 정치적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양자는 보수적인 점에서만 공통점이 있고, 종교적‧정치적으로는 정반대의 입장으로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에는 기꺼이 손을 잡았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그러나, 더욱 기이한 일은 선을 없애기 위해 악과 악이 동맹하는 일보다 악을 없애기 위해 선과 선이 동맹하는 일이 훨씬 적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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