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26 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07-01-08 14:01
조회
1294
풍성감리교회. 훼이스신학대학원 객원 교수. 426-3051)
(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난해 성구 해설/ 형통의 기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영문, 한글/ 설교집 17권)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26 강>>

나. 씨 뿌리는 비유의 해설<4:10-20>
    <비교 : 마 13:10-23, 눅 8:9-15>

예수님은 비유를 설명하시기 전에, 먼저 이사야 6:9-10을 인용하여 비유를 사용하시는 이유를 밝히신다. 마가는 이 배경에 대해 【10】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라고 하였다.

4:35-36에 의하면, 예수님이 계속해서 배 안에 계셨던 것처럼 보이므로,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란 4:10-20의 일이 있은 후의 일인 것 같다(黑崎幸吉, 마경일). 즉, 비유를 듣던 군중은 떠나가고, 예수님도 배에서 내려 다른 곳에 혼자 계실 때라는 것이다.

함께한 사람들은 열 두 제자나 일반 대중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이들은 열 두 제자로 더불어 예수께 그 비유들에 대해 질문하였다. 이 점에 대해 마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질문한 것으로 기록하였고(마 13:10), 누가는 비유의 뜻을 질문한 것으로 기록하였다(눅 8:9). 본문의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마가는 두 가지의 질문을 한 것으로 암시하고 있다.

비유들(3:23의 주석을 보라.)이라는 복수를 쓴 것은 씨 뿌리는 비유 외에 다른 비유들을 말씀하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가는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11】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라고 하였다.

비밀은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α)이며, 칠십인역에는 이 낱말이 오직 다니엘서(2:18, 19, 27, 28, 30)에만 나타나 왕의 비밀(꿈)을 가리키지만, 외경이나 고전 헬라어에는 많이 사용되었으며, 비밀(secret)을 표시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용법도 ‘비밀’(마 13:11, 롬 11:25, 골 1:26), ‘숨은 뜻’(계 1:20, 17:7), ‘비밀의 목적’(살후 2:7), 그리고 ‘만민 특히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롬 11:25, 엡 1:9, 3:3, 4, 9), ‘복음’(엡 6:19) 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서 비밀이란 전에는 감추어져 있던 것이 지금은 나타나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C. R. E- rdman). 그러나, “신비주의 종교에서는 신앙인에게 전수해 주는 비밀의 교리를 뜻하였다”(J. B. Lightfoot)}(골 1:26의 주석). 그러므로 그 세계에서의 비밀이란 일반인들에게는 감춰져 있고, 신앙인에게는 알려져 있는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는 “신약 시대에 대중 종교의 모습을 가진 것 중 하나는 신비종교라 불렸다. 이들 종교는 어떤 신과의 교통, 심지어 일치를 약속함으로써 모든 생사의 공포를 제거하도록 하였다. 거의 모든 신비종교들은 고난 당하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어떤 신의 이야기에 근거되었다. 그것들은 거의 모두가 수난극의 성격을 띠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1:15의 주석을 보라.)의 비밀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이 왕국은 아주 다르고,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주인과 구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왕국이 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W. Barclay). 그 이유는 “마가에게서 비밀은 왕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도래했음을 드러내는 것”(W. W. Wessel)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山口 昇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란 예수님의 인격, 즉 그의 메시아로서의 권세를 가진 교훈과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 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만이 그것을 인식할 수가 있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헨드릭슨(W. Hendriksen)도 “여기서 비밀은 인간의 마음과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의 강력한 현시이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관련하여 그 통치는 육적‧영적 영역에서 강력한 일들에 의해 수반되었다. 예수님은 이 비밀ㅡ그것은 이러한 일들을 행하고 있었던 이는 사단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었다ㅡ이 이 때에 자신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에게 은혜롭게 드러났다고 선언하신다. 다시 말해서, 순수한 믿음으로 자신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래드(G. E. Ladd)가 “비밀은 결국 묵시적 능력으로 오는 것인 왕국이, 다니엘에게서 미리 본 것처럼, 사실상 사람들 안과 사이에 은밀하게 역사하기 위해 감춰진 형식으로 미리 세상에 들어왔다.”라고 암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왕국에 속한 사람들은 왕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다”(E. P. Gould).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비밀이다”(C. E. B. Cranfield).
외인은 그때에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았던 사람들, 즉 예수님의 제자들 이외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의 비유란 “70인역에서는 시편 49편 4절, 78편 2절, 잠언 1장 6절, 에스겔 17장 2절 등에 있어서 히브리어 ‘마샬’(ל??)의 역어로 되어 있으므로, 실제로는 예수님이 히브리어 ‘마샬’ 혹은 이것에 상당하는 아람어 ‘마도라’를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이 말은 ‘비유’라고 하는 의미뿐 아니라 ‘지혜의 말씀’ 혹은 ‘잠언’ 또는 ‘수수께끼’라는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예레미아스는 이 말은 ‘수수께끼’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 까닭으로 11절 상반절과 11절 하반절은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비밀’에 대해 비유로는 대조가 안되므로 히브리어나 아람어의 의미를 따라 ‘수수께끼’로 해석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예수의 비유\\')”(山口 昇).

비유, 즉 수수께끼로 되게 하시는 목적에 대해, 마가는 【12】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라고 하였다.

이 “이사야 6:9-10의 인용구를 전승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마르코의 편집으로 보아야 할지에 대한 학자들의 답변은 다양하다”(J. Gnilka, p. 209). 이 인용구는 백성들의 무감각을 하나님의 의도적인 목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맛소라 본문(히브리 원문)이나, ‘백성들의 상태’로 기록하고 있는 칠십인역의 본문과는 다르다. “이 인용구는 아람어역( Targum)에 의한 것이다”(“Jeremias”, 山口 昇, J. Gnilka, p. 209).

“아람어역(Targum)에서는 9절에서 2인칭 대신에 3인칭이, 10절에서 ‘고치다’ 대신에 ‘용서하다’가 사용되었다. 이 인용구는 아주 축소되었으며, 9절의 후반부와 10절의 다섯 마디 말만을 포함한다. 모든 대본과 비교해 볼 때, 보는 것(Sehen)과 듣는 것(Hren)이 뒤바뀌어 있음이 주목되어야 한다. 모든 대본에는 듣는 것이 먼저 나와 있다”(J. Gnilka, p. 209).

마가의 본문이 이 아람어역(Targum)과 같다는 것은, 그것이 초기의 예루살렘 교회의 전승에 기인한다는 것을 나타낸다(Jeremias).

이 구절의 경우, 예수께서 일부러 외인들의 마음을 완미하게 해서 회개할 수 없게 하는 것은, 사랑의 주로 오신 예수님의 참 뜻과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에서 몇 가지의 다른 해석이 제시되어 왔다.
(1) “이 절의 처음에 나타나는 ‘히나’(ἵνα, 신 ‘위함이라’)를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보는 대신에 관계 대명사로 본다. 이것은 만손(T. W. Manson)의 설로, 본래 이 개소는 탈굼[Targum : 아람어역}에 있어서는 아람어의 ‘데’가 사용되고 있으나, 그 말은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로나 관계 대명사로 사용되는 것으로, 마가가 잘못하여 헬라어 ‘히나’(ἵνα)로 번역해 버린 것이라고 말한다(\\'예수의 교훈\\'). 그에 의하면 여기는 관계 대명사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하면, 선행사는 ‘외인들’이 된다. 마태복음 13:13에서도 헬라어 ‘호티’(ὅτι)가 ‘히나’(ἵνα) 대신에 사용되고 있다. 헬라어 ‘호티’(ὅτι)는 이유를 나타냄으로(신. ‘때문이다’) 예수님이 비유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소경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山口 昇).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인 ‘히나’(ἵνα)가 마가의 오역이라고 하는 주장은, 하나의 문제를 완화하지만 ‘메포테’(μήποτε) 곧 목적을 암시하는 것의 의미를 언급하지 않는다”(W. W. Wessel).

(2) 고의(목적)의 관념은 예수님의 것이 아니라, 마가의 신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본다(W. L. Lane, “V. Taylor”)

(3) 고의(목적)의 관념은 예수님의 것이 아니라, 후세 교회의 창작으로 본다(유릿하, 불트만, 도드). 모울(C. F. D. Moule)은 “비유가 응답을 방해하거나 금하기 위해 고안됐다면, 유대인들의 무응답에 대해 낭패하게 된 초대 교인들이 추가한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하였다.

(2)설과 (3)설에 대해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설득력 있는 증거가 없다고 비판하였다.

(4) 마태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인 ‘호티’(ὅτι)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마가의 곤란을 피하기 위한 개변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워 본래의 전승은 ‘히나’[ἵνα]라고 생각해야 한다(山口 昇). 본래의 전승을 ‘히나’(ἵνα)로 보는 학자들은 스위프트(C. E. G. Swift), 웨셀(W. W. Wessel), 버딕(D. W. Burdick) 등이다.

결국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은 외인들(계속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스위프트(C. E. G. Swift)는 “그들의 맹목에 대한 심판과 징벌로서 진리를 감추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전경연 님은 “이 은폐의 동기에 대해, 핀들레이(J. A. Findlay)는 복음서 기자의 선교적 동기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적당한 시기에 나타나도록 은폐한 것이라는 말이다. 모든 포장은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두 조각으로 찢어질 때(15:38)까지 보류한 것이며, 지성소라는 비밀스런 장소에 감춰져 있던 등불이 결국 세상의 빛이 되고야 만 그 날을 두고 비밀스런 뜻이 보류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핀들레이(J. A. Findlay)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에서 그 은폐의 동기를 본다.”라고 하였다.

헌터(A. M. Hunter)는 비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의 비유들은 처음에 말하여졌을 때에는, 단순히 대중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 위하여 고안해 낸 불명료한 수수께끼였을 수 없다”든지, 또 “일식하는 태양을 보기 위하여 유리를 그슬리는 것과 같이” 은폐하려는 것은 천적 진리를 더 명료하게 보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은폐는 개인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때까지로 국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은폐는 신앙의 열쇠로만 열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그렇다면, 본절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 대해 심판을 선언하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충격을 받아 회개하고 믿도록 하신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의 해설(13-20절)에 대해, 그란트(F. C. Grant)는 어떤 초기 설교가의 작업일 것이라고 하였다. 山口 昇은 “이 설명이 많은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예수님 자신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 의한 해석이라고 말해지고 있다(벨하우젠, J. 바이스, 불트만, 디벨리우스, 부란스감, 도드). 그 이유로 문체나 용어가 마가의 것과 틀리는 점[다른 점], 초대 교회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점이 있다는 것, 해명이 비유의 중심점이 아니라 세밀한 점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 등이 거론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특히, 불트만(R. Bultmann)은 “막 4:13-20과 마 13:36-43의 해석들이 바로 그런 서기관적 해석들과 같으며, 또 짧은 적용문들 만큼 옛 주의 말의 문체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막 4:13-20이 이차적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기독교적 용어(ὁ λόγος<말씀>의 절대적 용법 등), 그리고 개체 표현들의 해석의 부자연성이다. 마 13:36-43의 이차적 성격은 무엇보다도 해석이 본래의 핵심인 참음에의 권고를 그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山口 昇은 “표현이 바뀌어 있다고 하여 이 해명이 예수님의 교훈에서 완전히 떠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ㅡ데라).”라고 하였다. 또, 초대 교회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점이 있다고 하나, 실은 그 시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는바 선포된 말씀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해설이 비유의 중심점이 아니라 세밀한 점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을 보아, 해설 전부가 예수님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마도 예수님의 것에 기초한 초대 교회의 해설이 아닌가 싶다.

이 비유의 해설은 【13】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로 시작된다.

알지 못할진대의 알지는 오이다테(οἴδατε)로서 ‘영감으로 알다’, ‘직관적으로 알다’, ‘초경험적으로 알다’, ‘관념적으로 알다’, ‘충분히 확신하다’, ‘절대적인 것을 알다’ 등을 의미한다(롬 2:2, 7:14, 고전 6:2, 갈 4: 13, 살전 1:5 등).

알겠느뇨는 기노세스테(γινώσεσθε)이며 ‘초경험적으로 알다’, ‘영감으로 알다’, ‘관념적으로 알다’ 등을 의미하는 오이다(οἶδα)와 달리, ‘체험적으로 알다’를 의미한다.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생활을 통하여 얻는 영적 진리, 또는 영적 사실을 안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자연적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말씀을 순종하고 복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요 7:17). 두 낱말은 혼용되기도 한다.

이 구절의 요지는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알지 못할 정도라면, 다른 비유들의 의미는 더욱 알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연속된 비유들 중 처음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의미 때문에 다른 비유들의 출발점이자 이해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다”(W. L. Lane). 따라서,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해야 모든 비유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천국 또는 영의 진리에 대한 인간의 맹목은 매우 보편적 현상이라서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E. Schweizer). 이러한 제자들의 몰이해에 대해 예수님은 다소 실망하셨다.

예수님은 【14】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라고 해설하셨다.

뿌리는 자는 인자(마 13:37) 곧 예수님 자신(마 16:13-15)을 가리키는 것이다. 비유의 합법적인 확대에 의해서(마 10:40) 우리는 씨 뿌리는 자가 예수님뿐만 아니라, 참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 즉 열 두 제자들, 바울, 그 밖의 제자들, 그리고 목사, 선교사, 복음 전도자, 순수한 간증자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씨는 말씀(비교 : 마 13:39에는 “천국 말씀”, 눅 8:11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 즉 “왕국의 비밀을 포함하는 선포의 말씀이다” (W. L. Lane). 이는 “단순한 도덕적 진리가 아니라, 영적이며 영원한 진리인 천국 복음과 같은 표현이다”(E. Bickersteth).

하나님의 말씀 곧 천국 복음을 뿌리는 자들은 농부들처럼, 풍세를 살펴볼 것(전 11:4)이 아니라, 오직 씨를 주시는(고후 9:10)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다음, 예수님은 【15】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라고 해설하셨다.
이 구절은 4:4에 대한 해설이다.

길가는 온갖 사람들의 발에 밟혀서 단단해진 길바닥처럼, 온갖 전통이나 사상이나 경험이나 선입관, 또는 온갖 죄악들로 인해 영과 머리와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람들은 설교를 포함하여 새 것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말씀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복음의 진리가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어 표면에 머물러 있을 뿐이며, 결국 즉시 찾아온 사단(1:13의 주석을 보라.)에 의해 그 말씀을 빼앗기고 만다.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께서 그들에 대해서 선포된 말씀에 대한 책임이 없고, 다만 사단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변명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16】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라고 해설하셨다.

이 두 구절은 4:5-6에 대한 해설이다.

돌밭은 천박한 사람, 의지가 약하고 감정에 치우치는 사람, 경망한 사람, 생각이 얕은 사람, 그리고 변덕스런 사람 등을 가리킨다.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지도 않고,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단순히 순간적인 기분에 의해 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렇게 받아들여진 말씀은 영혼에 깊이 뿌리내릴 수가 없다. 그 결과, 받은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것이다.

환난은 틀립세오스(θλίψεως)이며, 외부에서 가해지는 철저한 압박을 의미한다. 또한, 이 낱말은 박해나 기타의 환경 속에서 기독교인이 직면하는 여러 가지 시험이나 어려움을 포함하는 일반적이며 포괄적인 말이기도 하다. 같은 어원의 동사는 포도를 짜는 틀에서 포도를 으깬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마 13:21, 24:21, 계 7:14).

핍박은 디오그무(διωγμού)이며, ‘각박하게 따라가면서 괴롭히는 것’, ‘격렬하게 박해하는 것’을 의미한다(10:30, 마 13:21, 고후 12:10, 살후 1 :4, 딤후 3:11). 특히,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복음의 적들에게서 받는 압력이나 고통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넘어지는은 스칸달리존타이(σκανδαλίζονται)이며 ‘덫에 걸리다’, ‘함정에 빠지다’, ‘실수하다’, ‘죄를 짓다’, ‘죄를 짓게 하다’, ‘넘어지다’ 등을 의미한다(롬 11:9, 14:13, 16:17, 갈 5:11, 벧전 2:18, 렘 6:21, 호 4:5).

바클레이(W. Barclay)는 “일이란 끝맺음보다 시작이 더 쉽다.”라고 하면서, 어떤 유명한 전도자의 “우리는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노력은 5%이고, 그를 그리스도 안에 보존하고, 교회 안에서 성장시키는 데에는 95%의 노력이 든다는 것을 배웠다.”라는 말을 소개하였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은 【18】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19】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라고 해설하셨다.

이 두 구절은 4:7에 대한 해설이다.

가시떨기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 또는 신령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적이며 물질적인 것에 대한 염려나 욕심 또는 유혹 등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람들은 말씀을 잘 이해하고, 깊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살아가는 동안에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말씀의 성장을 막기 때문에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염려의 원문(μέριμναι τού αἰώνος τούτου)은 문자적으로는 ‘이 세대의 염려’, 즉 일시적이며 세속적인 생활에 대한 염려를 의미하는 것이다. 얼른 생각하면,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가 당연한 것 같지만, 실은 염려란 주로 인격의 문제이다. 염려란 세상살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동시에 세상살이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벧전 5:7 )라고 권면하였다.

재리의 유혹의 원문(ἀπάτη τού πλούτου)은 ‘부의 유혹’으로도, ‘부의 즐거움’으로도, ‘부의 속임수’로도 번역되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부의 즐거움, 또는 부의 유혹만큼 인간에게 매력적인 것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재리 곧 부 자체는 죄가 아니나 그 위험성은 분명하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신뢰하며 섬기는 것이 바로 재물임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 :24)라고 경고하셨다. 재물은 삶에 필수적인 것이나 잘못된 보장 감각을 주거나 교만케 하거나 믿음의 길을 막는 위험이 있다(참조 : 19: 16-22).

우리는 영생을 눈앞에 두고도 많은 재물에 대한 염려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간 관원이며(눅 18:18) 부자인 청년(마 19:16-22)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히 13:5), 또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한 바울의 경계를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보다 적극적으로, 재물을 자신의 쾌락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기타 욕심의 욕심은 에피튀미아이(ἐπιθυμίαι)이며, 그 자체가 악한 것인지, 선한 것인지, 중성인지가 문제된다.

{칼빈(J. Calvin)과 윌리암즈(R. R. Williams) 그리고 黑崎幸吉 등은 악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비해, 이스톤(B. S. Easton)은 욕심은 중성이지만, 욕심을 악덕이라고 하는 스토아 철학의 영향 때문에 악한 의미가 지배적이라고 하였다(딤후 3:6, 딛 3:3, 약 1:14.). 그와 같이 욕심을 중성으로 보는 학자들로 와드(R. A. Ward)와 깁손(E. C. S. Gibson)이 있다.

그러나, 포티트(G. Poteat)는 “불교의 교훈은 욕심을 악한 것이며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성서적 교리가 아니다.......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범죄하도록 시험하지 않으신다. 그 이유는 이 모든 천성들(육체적 욕망, 욕심)은 선한 것이고 살아가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욕심을 잘못 지도하고,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남용할 때, 끌려 미혹되어 악한 결과를 가져온다.”라고 타당한 설명을 하고 있다. 욕심이 하나님의 창조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면, 그 자체는 선한 것임에 틀림없다.

본래 선하고 좋은 것이었던 욕심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섭리(하나님과의 교제)를 이탈하여 남용되거나 오용될 때, 죄악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본성(식욕, 성욕 등)은 본래 좋은 것이며, 삶에 필요한 것이지 악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욕심의 대상과 내용이다.}(약 1:14의 주석).

위에 열거한 내적 요인들이 말씀을 ‘막아’(쉼프니구신, συμπνίγουσιν) 곧 질식시켜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돌밭에 비유된 경우는 외적 요인 때문에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예수님은 【20】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라고 해설하셨다.

이 구절은 4:8에 대한 해설이다.

마태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썼지만, “충실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재현함에 있어서 각 복음서 기자들은 각자의 양식을 사용했을 뿐이지,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W. Hendriksen).
말씀을 순종하는 행위, 즉 “수확은 탁월한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준비되는 것이다”(W. L. Lane). 이 비유의 교훈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는 “인내하라! 네 일을 행하라. 씨를 뿌려라.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라. 수확은 확실하다.”라고 하였다. 또, 이 비유의 교훈은 말씀을 듣는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일반 법칙을 요약하면, 비유의 교훈은 복음을 듣는 것의 결과란 언제 어디서나 들은 사람들의 마음 상태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듣는 자의 성격은 그에게 말해진 말씀의 효력을 결정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로 비유된 사람들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 黑崎幸吉은 “걱정할 것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때로는 큰 고난을 베푸셔서 [단단한 길바닥을 갈아엎고], 굳은 자갈밭[돌밭]을 깨뜨리고, 가시 넝쿨을 태워버려 이를 좋은 땅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인생에서의 고난은 이런 뜻에서 하나님의 은사이다.”라고 하였다. 시편 119:71-72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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