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18 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06-10-28 15:50
조회
1464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풍성감리교회 목사. 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설교집 16권. 426-3051)

<<제 18 강>>

라. 안식일에 한 일<2:23-28>
    <비교 : 마 12:1-8, 눅 6:1-5>

“단화의 표준적인 서두(καὶ ἐγένετο : ......하시게 되었습니다)와 더불어 논쟁 대화에 있어서 특징적인 엄밀한 상황 묘사로써 시작된다”(J. Gnilka, p. 150).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실제로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을 가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안식일에는 약 반 마일만 걷도록 허용되었는데, 바리새인들이 어디서 왔는가? 아니면 바리새인들과 같은 견해를 가진 농부들인가? 왜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른 것은 비난하면서, 보다 더 중대한 범죄인 안식일에 걸은 것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않았는가? 더욱이 이 사건에 있어서는 언제 어디서 발생했는지에 대해 뚜렷한 진술이 없다”(E. Schweizer).
아마도 초대 교회가 교회의 안식일 관습을 변호하기 위해 예수의 입을 빌린 것 같다.

일반적으로 23-26절은 통일된 작품으로, 27-28절은 거기에 덧붙여진 별도의 전승된 격언으로 보고 있다. 그닐카(J. Gnilka, p. 152.)는 덧붙인 사람이 마가가 아니라, 기독론적 근거를 중시했던 그 이전의 편집자라고 하였다.

마가는 바리새인들의 예수의 사죄권에 대한 부인, 예수의 버림받은 자들과의 교제에 대한 반대, 예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에 이어 안식일 문제에 대한 비난을 들고 나온다. 그러한 사실들은 유대교와 복음 사이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가는 이 이야기를 【23】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라는 상황 묘사로 시작한다.
안식일(사바신, σάββασιν)은 1:21의 주석을 보라.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의 동사는 파라포류에스타이(παραπορεύεσθαι)로 ‘밀밭 사잇길을 따라 가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의 원문(οἱ μαθηταί αὐτού ἤρξαντο ὁδὸν ποιείν τίλλοντες τοὺς στάχυας)의 정확한 번역은 ‘그 제자들이 길을 가면서 이삭을 자르기 시작했다’이다.
이 점에 대해, 마태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으니”( 마 12:1)라고 하였고, 누가도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눅 6:1)라고 하여, 제자들이 배고픔을 면키 위해 한 행위임을 나타내고 있다. “마가복음 2:26을 보면, 마가도 제자들이 먹었음을 암시한다”(W. Hendriksen).
남의 포도원에서 포도를 그릇에 담는 것은 안 되지만, 배불리 먹는 것은 허용되었고, 남의 곡식 밭에서 낫을 대는 것은 안 되지만, 손으로 이삭을 따는 것은 허용되었다(신 23:24-25). 그러므로 제자들의 행위는 합법적인 것이었다.
이 말씀을 영적으로 적용한 학자들이 있었다. 베데(Bede)는 “성서 속에서 기쁨의 정수인 핵심적인 의미를 발견하기까지 성서를 명상하고 소화해야 한다.”라고 하였고, 어거스틴(Augustine)은 성서에서 덕의 실제적 자양분을 얻기까지 명상에 의해 낟알을 비비지 않고, 단순히 성서의 꽃들을 즐기는 사람들을 비난하였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서 비난할 구실을 찾는 데 혈안이 된 바리새인들에 대해, 마가는 【24】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라고 하였다.
바리새인들(2:15의 주석을 보라.)이 이삭을 자른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행위를 묵인한 예수님을 싸잡아 비난한 것은, 잘라먹은 행위 자체보다는 안식일에 일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즉,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율법(출 20:8-11, 34:21, 신 5:12-15)을 어기고 마당질을 했다는 것이다. 이 일은 ‘미쉬나’(1:22의 주석을 보라.) 샤바트 7:2에 있는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 39항목 중 세 번째에 해당되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안식일을 범한 것은, 그 범한 자가 미리 경고를 받았을 경우에는 돌로 쳐죽이는 벌을 받을 정도로 중대한 죄이었다(A. E. Sanner).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위를 추수 또는 마당질로 간주한 것은 터무니없는 확대 해석이다. 그란트(F. C. Grant)에 의하면, 미쉬나와 탈무드에는 안식일의 금지 조항에 자비 및 필요한 경우와 같은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그닐카(J. Gnilka, p. 153)는 “미쉬나(mischna : 라삐 유다<A.D. 135->에 의해 수집된 구전 율법들-역주)에는 ‘생명이 위험할 경우에는 언제나 안식일 규정을 무시할 수 있다’(Joma 8, 6)라고 하는 규정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적용한 구전법의 조항 또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율법주의의 대표격인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고정된 관점이나 선입관을 척도 삼아 즐겨 남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은 편협하고 가혹하여 사리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병적인 ‘자기 의’의 의식에 젖어 있었다. 자기가 본 것이나, 들은 것이나, 생각한 것이나, 해석한 것이나, 판단한 것이나, 말한 것이나, 행한 것 등만을 옳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말해, 자기만이 옳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힐문을 들으신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 마가는 【25】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위가 율법 위반인가 아닌가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하시는 대신에, 다윗의 생애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삼상 21:1-6 )을 들어 답변하셨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권위로, 특히 유대인들은 물론 바리새인들조차 반대하거나 비난할 수 없는 다윗의 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에게 반격하신 것이다. “예수의 반격은 그의 뛰어난 지혜와 성서에 정통하신 것을 보여 준다”(黑崎幸吉).
읽지 못하였느냐(οὐδέποτε ἀνέγνωτε)의 동사는 ἀνά(아나 : ‘잘’)와 γινώσκω(기노스코 : ‘알다’, ‘인식하다’, ‘지각하다’, ‘이해하다’)의 합성어로 ‘잘 인식하다’, ‘잘 지각하다’, ‘잘 알다’, ‘잘 이해하다’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취지는 다윗에 관한 기사를 읽고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문자대로만 알았을 뿐이고, 율법의 참 뜻은 파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 준수를 권익 대신에 짐으로 만들었다”(E. P. Gould).

이어서 예수님은 【26】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놉으로 도망하여 그 곳 제사장에게서 제사장만 먹게 되어 있는 진설병을 얻어먹고, 또 자기를 따르면서 부녀를 가까이 하지 않은 소년들에게도 먹게 한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성경에는 대제사장의 이름이 아비아달이 아니라, 아히멜렉으로 되어 있다. 이 문제에 대해 (1) 부자는 흔히 같은 이름으로 불렸기(삼상 22:20, 삼하 8:17, 대상 18:16) 때문이라는 설(Bruce), (2) 아들은 아버지와 더불어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라는 설(Grotius), (3) 아들인 아비아달이 보다 더 유명했고, 다윗과의 관계에서는 대표적인 제사장이었기 때문이라는 설, (4) 마가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
사무엘상 22:20에는 아비아달이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라고 기록됐는데, 사무엘하 8:17과 역대상 18:6, 24:6 등에는 반대로 아비아달이 아히멜렉(아비메렉)의 아버지로 기록되었다는 점과 예수님의 진실성 및 정확성을 미루어 (4)설이 무난하다.
하나님의 전(οἰκον τού θεού :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는, 다윗이 하나님의 성막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지 않았다. 이 말은 후에 신약의 교회에까지 적용되었다(딤전 3:15).
진설병은 성소 안의 정금으로 싼 상 위에 이스라엘 12지파를 따라 한 줄에 여섯 덩이씩 두 줄로 진설해 놓은 빵을 가리킨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며, 영원한 언약이었다(출 25:23-30, 레 24:5-9).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상의 손님들인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봉헌되었다. 그리고 이 진설병을 제공하는 수단에 의해 하나님께로부터 입은 은혜를 감사하며 인정하였다.”라고 하였다.
매 안식일마다 새 빵으로 바꿔야 했으며(레 24:8, 삼상 21:6), 물려 낸 빵은 제사장들이 거룩한 곳에서 먹었다(레 24:9).
이 진설병을 제사장이 아닌 다윗 일행이 먹은 사건을 인용하신 예수님의 취지는, 굶주림과 같은 인간의 필요는 율법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이는 율법의 경시가 아니라, “중대한 때에는 율법의 문자에 위반하여 그 정신을 실행해도 상관없다”(黑崎幸吉)는 뜻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닐카(J. Gnilka, p. 155)는 “다윗이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이런 자유로운 행동을 할 권위를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데서 표현되는 자유를 줄 수 있다. (예수의) 답변은 그리스도론적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예수님의 답변은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이 율법과 관련하여 그런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의 자유로운 행동을 할 권위가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율법은 율법의 완성인 사랑(롬 13:10)과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그리스도(롬 10:4)에 의해 규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에수님은 【27】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사바신, σάββατον)은 1:21의 주석을 보라.
이 대 원칙은 본서에만 수록된 매우 귀중한 말씀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의도가 ‘인간을 위한 안식일’ 대신에 ‘안식일을 위한 인간’으로 만드신 것처럼, 안식일을 잔인한 폭군으로 만들고, 인간은 그의 노예로 만든 랍비들”(W. Hendriksen)에 대한 혁명적 선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 인간을 위해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이다. 즉, 인간의 영적‧정신적‧육체적 복지를 위해 일주일 중 하루는 필요하다는 것이다(J. A. Bengel, R. Earle, A. E. Sanner). 안식일은 6일 동안의 노동에 의해 피로해지고 지친 몸을 쉬어 원기를 회복하고,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감사 찬양을 하거나 회개하는 거룩한 날이다.
안식일이 인간에게 특권과 유익이 아니라, 무거운 짐이 된다면 이미 안식일이 아닌 것이다. 안식일이 안식일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참 유익을 위해 사랑의 원리를 따라 운용되어야만 한다. 랍비 시므온 벤 메나샤(주후 180년경)는 “안식일은 네게 맡겨졌다. 그리고 네가 안식일에 맡겨진 것이 아니다”(Melkilta Shabbata 1 to Exod 31:14)라고 비슷한 말을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사회의 법과 제도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끝으로,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힐문한 바리새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선언을 하셨다. 【28】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므로 모든 인류의 구주이신 ‘인자’( 2:10의 주석을 보라.) 예수님은 당연히 안식일에도 주인이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신령한 질서가 명백한 곳에 올바른 안식일 성수가 있을 것이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중심한[그리스도가 중심인] ‘주일’에 안식일 정신도 구현될 것이다”(이상근).
안식일과 인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시야말로 인간의 참 유익을 위해 안식일법을 가장 잘 운용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옹호하시기 위해 “안식일법을 폐지할 권리가 있다”(J. Wesley)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입법자로서 “법의 사용을 결정할 권위가 있다”(W. W. Wessel)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법 운용의 마지막 결정권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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