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27 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07-01-15 21:10
조회
1281
풍성감리교회. 훼이스신학대학원 객원 교수. 426-3051)
(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난해 성구 해설/ 형통의 기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영문, 한글/ 설교집 17권)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27 강>>

다. 등불과 등경의 비유<4:21-25>
    <비교 : 21절-마 5:15, 눅 8:16, 11:33.
            22절-마 10:26, 눅 8:17, 12:2.
            23절-마 11:15, 13:8, 43, 막 4:9, 눅 8:8, 18 전반, 14:35.                24절 전반-위를 보라(23절에 대한 것).
            25절-마 13:12, 25:29, 눅 8:18 후반, 19:26.>

이 부분에서는 다른 복음서들에도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여러 말씀들이 발견된다. 마가가 이 이중적인 말씀들을 비유의 장에 삽입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다수 학자들이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말씀들은 본래 비유들로 규정되지는 않았다. 배열을 위한 정식인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καὶ ἔλεγεν αὐτοίς)는 저자의 편집임을 암시한다. 그가 이 말씀들을 수집했는지, 아니면 ‘이미 수집된 것을 발견했는지’(Lindeskog)는 확실하지 않다. 후자라고 가정한다면 이중으로 배열되어 있으므로 두 개의 작은 말씀군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중적인 말씀군의 구조, 특히 각기 마지막에 나오는 이유문의 구조가 마르코의 편집임을 말해 준다”( J. Gnilka, p. 228).

“마가는 이 전승을 여기에 삽입하여 예수님의 비유들에 대한 명백한 이해를 위해 빛을 주고 있다”(W. L. Lane). 즉, “이 기사는 비유의 참된 목적에 대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C. R. Erdman).

마가는 이 기사를 【21】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로 시작한다.

저희에게 이르시되는 주제의 전환을 가리키는 것이며, 저희는 “4:10의 무리들을 지시하는 것이다”(W. Hendriksen).

등불은 뤼크노스(λύχνος)이며, “올리브유 속에 담긴 작은 심지가 있는, 진흙으로 만든 작은 등을 가리키는 것인데, 당시의 창문 없는 팔레스틴 집을 밝히는 주요 수단이었다”(W. L. Lane).

여기서는 “말씀”(W. Hendriksen), ‘진리’, ‘복음’, “은혜 받은 사람”(M. Henry), “예수의 인격 속에 현존하고 있는 왕국의 비밀”(W. L. Lane, 山口 昇), ‘예수’ 등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등불 앞에 정관사(호, ὁ)가 있는 점과 예수님이 복음의 핵심이며, 왕국의 비밀의 주인공이며(4:11의 주석을 보라.), 진리 그 자체이시며,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분이시라는 점(요 1:14)과 빛으로 비유되고 있는 점(요 1:9, 8 :12. 눅 1:79의 주석을 보라.), 그리고 인격적인 표현인 “등불이 오겠느냐”(ἔρχεται ὁ λύχνος)로 되어 있는 점 등을 보아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말 아래나의 말은 모디온(μόδιον)이며, 원래 곡물을 재는 도량형기이다. 십일조를 계산하는 데 꼭 필요했기 때문에 유대의 가정에는 반드시 말이 있었다. 나무 기둥에 불길이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또는 불을 끄기 위해 사람들은 이 말을 가지고 등불을 덮었다. 이렇게 등불을 끌 때면 좋지 않은 연기가 났을 것이다(Jeremias, Billerbeck).

평상 아래나의 평상은 클리넨(κλίνην)이며, “식탁에 기대앉는 침상”(이상근)으로 “낮에는 말아 올려 두는 요이다”(A. E. Sanner).

말과 평상이란 여기서는 등불의 역할을 막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등경은 뤼크니안(λυχνίαν)이며, “방 중앙에 있는 기둥에 연결한 선반이나, 벽에 돌출된 단순한 돌이나, 눈에 잘 띄도록 놓고 비슷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금속 조각을 가리킨다”(W. Hendriksen). 여기서는 말씀을 듣고 받아들인 자, 즉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의 역할을 뜻하는 것이다.

이 구절의 요지는, 등불이 방안을 밝히기 위해 말 아래나 평상 아래가 아닌 등경 위에 놓여져야 하듯이,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바 그 자신을 핵심으로 하는 복음, 또는 그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천국의 비밀은 널리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인격과 메시아로서의 생애와 선교 활동은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에 의해 더욱 널리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등불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세상을 잘 비추게 하는 등경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그분의 빛을 받은 빛의 자녀(엡 5 :8)로서 자신의 신앙 인격과 언행을 통해서 그 빛을 모든 사람들에게 반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교인의 삶이란 예수님의 빛을 비추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는 드러나도록 의도된 것이다. 비유의 교훈 속에 감춰진 비밀은 결국 공개를 위한 일시적 숨김일 뿐이다. “진리를 말하는 것이 위험할 때가 있다. 핍박과 고통의 지름길이 될 때도 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람과 진실한 교인은 모든 사람 앞에서 진리에 의해 설 것이다. 루터(M. Luther)는 진리를 발견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의 단 하나의 생각은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었고, 그 일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W. Barclay).

복음과 함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교인 됨을 드러내야 한다. 바울은 교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였고(고후 2:15), 또 그리스도의 편지라고도 하였다(고후 3:3). 바울 자신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라고 하였다. 우리의 인격과 생활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무대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복음의 진리를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드러내야만 한다.

앞 구절(21절)의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은 ‘왜냐하면’(원문에는 가르, γάρ가 있다.) 【22】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라고 설명하였다.

누가의 병행문은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아니할 것이 없느니라”(눅 8:17)로 되어 의미가 더욱 명료하다.

아무튼, 마가는 예수께서 인용하신 격언을 자신의 사고에 맞게 한 것이다. “숨겨져 있는 것은 결국 언젠가는 드러나기 위해 숨겨져 있을 뿐이다. 예수님이 메시아인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임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계시하시고, 복음의 선포를 통해 세상에 알리려 하셨던 하느님이 이 비밀 배후에 계시다”(J. Gnilka, p. 231). 따라서, 우리는 지상에 오신 예수님의 선교를 통해서 그 동안 숨겨져 왔던 구원에 관한 모든 비밀, 또는 단지 모호한 유형과 희생 제물에 의해 설명된 모든 것들이 밝히 드러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공개의 사건은 비밀을 안 사람들, 즉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에 의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체로 하는 진리는 불멸의 것이다. “인간은 진리에 맞서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을 숨기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진리는 위대한 것이며, 결국엔 보급될 것이다”(W. Barclay).

이 말씀은 인생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감추고 싶고, 또한 감춰져 있는 인생의 모든 자취는 결국에는 다 드러나게 마련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비밀을 가질 수 없다. 진실은 나타나는 길이 있다.

이 말씀은 자연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식과 과학의 진보에 따라 점점 더 많은 비밀들이 드러나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 있다.

예수님은 【23】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하셨다.
이 구절은 4:9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는 군중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아마도 제자들 역시 제대로 깨닫지 못할까 보아 염려하신 것 같다.

이어서 예수님은 듣는 자의 중요성과 책임에 대해, 【24】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라고 하셨다.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는 ‘너희가 듣는 것에 유의하라’, ‘너희는 주목하여 들어라’, “너희는 조심하여 들어라”(J. Gnilka, p. 231.), 등을 의미한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는 마태복음 7:2과 누가복음 6:38에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에 이어 기록되었고, 후자의 경우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에 이어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 취지는 전혀 다르다. 마태와 누가의 경우는 남을 비판하지 말 것을 가르친 것인 반면에, 마가의 경우는 앞 구절을 받아 복음을 주의 깊게 듣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풍부한 의미는 듣는 사람의 주의력의 정도에 비례하여 이해된다는 것이다.

또 더 받으리니는 듣는 사람의 주의력에 비례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이해가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영혼을 기울여 들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울인 노력보다 훨씬 더 많은 계시를 받게 하신다.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은 인간의 노력이 미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한 것이다. “그는 영원토록 은혜 위에 은혜, 호의 위에 호의, 복 위에 복을 추가하신다(엡 1:7, 요일 1:16, 사 55:7, 65:24, 믹 7:18. 비교 : 단 9 :20-23, 요 3:16, 히 7:25)”(W. Hendriksen).

예수님은 앞 구절(24절)과 관련하여, 【25】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고 하셨다.

이 격언은 “마태복음 13:12과 누가복음 8:18에도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들 역시 씨 뿌리는 비유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이 본래의 전승의 모습이었다고 생각된다”(山口 昇).

이 표현의 요지는 비유로 가르치신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이해하여 계시를 받은 자는 그 만큼 더 많은 종말론적 계시를 받을 것이고, 반면에 말씀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그나마 있던 영적 이해력이나 영적 지각마저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신령한 세계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에 있어서도 별로 다를 바 없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이 말은 냉혹한 것 같다. 그러나, 생의 모든 교훈은 그것이 필수적이며, 깊이 있는 사실임을 보여 주고 있다. 첫째, 지식에 있어서 사실이다. 인간은 알면 알수록 알 능력이 그 만큼 더 많아진다.......인간은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만큼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둘째, 노력에 있어서 사실이다.......몸을 훈련하면 할수록 그 만큼 더 행할 능력이 많아진다.......우리는 때로 우리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몸도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잘 기억해야 한다. 셋째, 기술에 있어서 사실이다. 인간이 손재주나 눈이나 정신을 발달시키면 시킬수록 그 만큼 더 그것을 발달시킬 능력이 많아진다. 넷째, 책임질 능력에 있어서 사실이다. 인간이 책임을 많이 지면 질수록 그 만큼 더 많이 책임질 수 있다.......그렇지 않으면 퇴화되거나 상실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밖에 경제면에 있어서도 사실이다.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 현상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나 엄연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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