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25 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07-01-03 16:17
조회
1316
풍성감리교회. 훼이스신학대학원 객원 교수. 426-3051)
(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영문,한글/ 난해 성구 해설/ 형통의 기도/ 설교집 17권)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25 강>>

7. 천국 비유[4:1-34]

예수님에 관한 오해에 대해 기록해 온 마가는, 여기서는 예수님의 천국 비유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외형적 유사성에 의해 결합된 비유들이다”(R. Bultmann). 이 천국 비유들이 예수님의 교훈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공관복음서 전체의 주장이다. 체계적인 마태는 전승을 모아 주제별로 기록하는 경향이 있는데, 마가도 나름대로 이 비유들을 정리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씨 뿌리는 비유(4:1-9), 씨 뿌리는 비유의 해설(4:10-20), 등불과 등경의 비유(4:21-25), 은밀히 자라는 씨의 비유(4:26-29), 겨자씨 비유(4:30-32), 그리고 비유의 마무리(4:33-34)로 구성되어 있다.

가. 씨 뿌리는 비유<4:1-9>
    <비교 : 마 13:1-9, 눅 8:4-8>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엄밀한 의미에서 공관복음서(마 13:1-9, 눅 8:4-8)에 공통되는 유일한 비유이다. 또한, 세 복음서는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유의 말씀에는 폭넓은 장면 묘사가 먼저 나온다. 언어상으로나 의도상으로 보아 이 장면 묘사는 복음서 저자가 작성한 것으로 지적된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마르코의 편집임을 알 수 있다. 연결어 ‘다시’(πάλιν), 군중의 모임(‘모이다’ συνάγω는 언제나 편집구에 나온다 : 2:1, 5:21, 6:30, 7:1), 생생한 표현인 귀결문(1:45, 2:2, 3:20), 가르침에 대한 강조, 비유로 가르쳤다는 진술, 병렬적인 접속의 표현인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καὶ ἔλεγεν αὐτοίς) 등. 마르코 이전의 자료에 도입구가 있었다면, 이 도입구는 간략했었을 것이 분명하며, 복음서 저자에 의해 완전히 개작된 것으로 보인다”(J. Gnilka, p. 200).

마가는 비유의 말씀을 기록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이 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1】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다시 바닷가에서는 3:7(또 2:13)에 연결되는 것으로, 마가가 즐겨 쓰는 표현이다(참조 : 2:13의 주석). 여기의 바닷가는 물론 갈릴리 호수 가를 말하는 것이다.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은 예수님의 영향력이 전보다 훨씬 더 증대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비교 : 1:34, 2:2, 15, 3:7). 유대 교권자들의 방해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명성과 선교 활동은 계속 증대되었다. 애굽의 노예 생활을 하면서 학대받던 이스라엘에 대해, 성경은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출 1:12)라고 하였다. 사단의 세력들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수는 있으나, 축소시키거나 중지시킬 수는 없다.

매우 많은 무리 때문에 예수님은 배(아마 3:9에 언급된 배일 것이다.)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셨다. 앉는 것은 랍비들의 전형적인 교수 자세이었다.

예수께서 배에 앉아 가르치신 것과 관련하여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리스도의 지상 선교와 관련하여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청중에게 전하기 위해 이용한 방법의 풍부한 다양성이다. 그는 여러 번 정기적인 회당 예배에서 설교하고 가르치셨다(1:21, 39, 3:1, 6:2). 그리고 유대에서는 성전에서 설교하고 가르치셨다(요 18:20). 그는 예배의 규례를 믿으셨다(눅 4:16). 이것은 어떤 사람들, 즉 자신들의 모임을 교회 출석으로 대치시키기 시작한 사람들의 습관이ㅡ강조 또는 특별히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ㅡ주의 시인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른 한편, 그 규례는 그가 복음을 전파할 추가 기회를 유익하게 이용하시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성전과 회당에 국한시키시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곳에서나 군중들에게 설교하셨다. 그는 산이든지(마 5:1), 집이든지(막 2:1-), 바닷가이든지(4:1), 광야이든지(8:1-4), 배이든지(4:1), 공동 묘지이든지(요 11:38-) 가리시지 않았다.......그는 항상 자신을 환경에, 또는 환경을 자신에게 적응시키셨다.”
바클레이(W. Barclay)는 간단하게 “우리는 예수께서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교수 방법과 내용에 대해, 마가는 【2】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3:23의 주석을 보라.)로 가르치시니는 전개될 비유들이 여러 가지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비유는 3:23의 주석을 보라.

“하늘의 의미를 가진 지상의 이야기인 비유”(W. Hendriksen)는 “듣는 사람의 이해력이 아니라, 영적인 응답을 시험하도록 고안된 것이다”(R. A. Cole).

여러 가지 비유들의 서론이라 할 수 있는 1, 2절에 이어 씨 뿌리는 비유가 시작된다. 씨 뿌리는 비유는 【3】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로 시작된다.

들으라는 청중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말이다(W. Hendriksen, 山口 昇, 마경일). 단순한 주의 환기라기보다는 결단을 동반하는 경청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비유는 팔레스틴 농부들의 생활상에 충실하다”(W. L. Lane). 그러나, 농부가 하는 일의 한 측면, 즉 파종의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진다. 따라서, 서두에 농부가 아니라, 어떤 씨 뿌리는 사람이 언급된다.

유대인들은 손으로 뿌리는 방법이나, 구
멍이 뚫린 자루에 씨앗을 담아 짐승의 등에 실어 뿌리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 비유는 전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W. Barclay, 이상근). 특이한 것은 씨를 뿌린 후에 밭을 간다는 점이다(E. Schweizer, “Jeremias”, J. Gnilka, p. 203).

이어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 【4】뿌릴 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라고 하였다.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를 포함한 이 비유의 해석은 13절 이하의 예수님의 해설을 보라.

길가는 밭들 사이에 생긴 좁은 농로를 가리킨다. 사람들의 발길에 밟혀 흙이 단단하게 굳었으므로 씨가 심겨지지 못하고, 또한 새들의 눈에 잘 띄게 마련이다. 그러나, 가끔 의도적으로 길가에 씨를 뿌리는 농부가 있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경작하지 않은 땅 사이에 말라 비틀어져 있는 그루터기와 가시들을 밟고 다녔던 그 길이, 뿌려진 씨들을 받아들이도록 경작될 것이기 때문이다”(W. L. Lane).

다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 【5】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라고 하였다.
이 두 구절은 16-17절의 예수님의 해설을 보라.

흙이 얇은 돌밭은 돌이 많이 섞여 있는 밭이 아니라, 갈릴리 지역에 흔한 크고 넓적하고 두꺼운 바위 위에 흙이 얇게 덮여 있는 밭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밭에 씨가 떨어지면, 태양열과 수분을 쉽게 받아 싹이 빨리 나오기는 하나, 햇볕에 타고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죽는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 【7】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18-19절의 예수님의 해설을 보라.

이 구절은 가시나무가 자라기 시작한 땅에 떨어진 씨를 가리키는 것이다. 씨는 뿌리를 뻗어 잘 자라지만, 가시나무가 자라서 그 곡식을 뒤덮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끝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20절의 예수님의 해설을 보라.

좋은 땅 곧 옥토에 떨어진 씨들은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는 뿌려진 씨의 양 만큼 맺히는 것이 아니라,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나 맺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세상은 풍성한 복의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이 법칙은 농사뿐만 아니라, 일반 기업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자본은 한 번만 투자하면 수십 배, 수백 배의 이익(결실)을 얻게 되고, 한 번 습득한 기술 및 지식 등은 수십 배, 수백 배의 결실을 얻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복의 근원이신 사랑의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랑 대신에 이기적 욕망만을 좇아 살려고 하기 때문에 서로간에 싸움을 하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의 풍성한 복도 사랑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마음에 작용하는 원리는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변하지 않으나, 그 반응의 성격은 인간의 영성 및 심성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다.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비를 주시는 하나님(마 5:45)께서는 사람을 선별하지 않으시고, 들을 사람이나 안 들을 사람 모두에게 말씀을 주신다(겔 2:5). 그러므로 우리는 골라 가며 뿌리지 않고, 모든 종류의 밭에 뿌리는 하나님께 비난이나 질책 대신에, 그 사랑을 깨닫고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 【9】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진리에 대한 인간의 경시 또는 무지를 의식하신 예수께서, 그들로 하여금 더욱 설교를 주목하여 듣고 깨닫도록 자극하시는 것이다.

청중은 귀가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진리를 깨달을 영의 귀가 열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소리이므로 마음과 정신뿐만 아니라 영을 기울여야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흙의 종류는 말씀 선포에 대한 다양한 인간의 반응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기본적인 생각은 아니다”(W. W. Wessel, W. L. Lane). “이 비유의 초점은 씨를 뿌리는 자의 행위에 있다.......하나님의 나라는 씨가 땅에 뿌려지는 것처럼 세상에 들어왔다.......비유의 절정은 강력하게 수확의 영광스런 성격을 강조한다(30배, 60배, 100배).......예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감춰진 의미를 통해 가르치신 것은, 그 자신의 인격과 선포에서 왕국의 도래와 종말의 지연 그리고 수확(완성) 사이의 관계에 있었다”(W. L. 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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