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15 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06-10-08 19:18
조회
1339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2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2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15 강>>

3. 유대 교권자들과의 논쟁[2:1-3:6]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에 대해 기록해 온 마가는, 여기서는 예수님과 유대 교권자들과의 논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2:1-12),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죄인들과 식사하신 일(2:13-17), 금식 문제(2:18-22), 안식일에 한 일(2:23-28), 그리고 안식일의 치료(3:1-6)로 되어 있다.

가. 중풍병자를 고치심<2:1-12>
    <비교 : 마 9:1-8, 눅 5:17-26>

이 기사는 1-5절 전반과 10절 후반-12절의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내용과 그 사이에 낀 5절 후반-10절 전반의 사죄권에 관한 내용이 합쳐져 있다.

로마이어(E. Lohmeyer)는 5b-10절은 2:1-12 안에서 이차적인 것으로 이적 사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고, 순드월(Sundwall)은 5-9절을 원래 독립된 논쟁 대화이고, 10절은 후에 여기에 첨가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결어인 12절도 찬양은 문체상 여기에 맞지 않기 때문에 첨가문이라고 한다. 불트만(R. Bultmann)은 환자와 운반자의 ‘믿음’이 3f.절에서 자세히 밝혀졌고, 5a절에서 예수님의 인정을 받았는데, 이 신앙이 5b-10절에서는 자취를 감췄고, 11f.절은 어떤 이적 사화의 유기적 결어라는 점들을 들어 5b-10절을 이차적 첨가문이라고 한다. 그닐카(J. Gnilka, p. 120.)도 이 추측을 가능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山口 昇은 “병을 고치는 일과 죄를 사하는 일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게 되어진다면(■9) 5절 후반절-10절 전반절도 삽입된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견해가 더욱 그럴듯하다.
이 기사는 장면 묘사가 상세한 것을 보아 목격자(아마 베드로)에게서 직접 들은 내용을 쓴 것 같다.

이 기사는 【1】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로 시작된다.
수일 후에는 가버나움 집에 계신 때부터 수일 후를 가리키는 것인지, 앞의 사건이 있은 때부터 수일 후를 가리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때의 예수님의 인기를 미루어 볼 때, 무리가 예수님을 그토록 오랫동안 놓아둘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후자인 것 같다.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의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선교 본부이었다(cf. 눅 4:23. 1:21의 주석을 보라).
집에 대해서는 베드로의 집으로 추측하는 설(1:29)과 예수님의 집으로 추측하는 설(마 4:13, 요 2:12)이 있는데, 다시라고 한 것을 보아 베드로의 집인 것 같다.
“팔레스타인 생활은 매우 공개적이었다. 아침이 되면 문을 열어 두어 누구든지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집주인이 일부러 사생활을 원치 않는 한 그 문은 결코 닫혀지지 않았다. 즉, 열려 있는 문은 누구든지 들어오라는 공개 초대장을 뜻하였다. 본문의 집과 같은 초라한 집에는 현관 안의 넓은 방이 없었다. 즉 문을 열면 곧 거리였다”(W. Barclay).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는 이미 예수님의 명성이 자자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소문의 결과에 대해, 마가는 【2】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계신 집안은 물론, 문밖에까지 사람들로 빽빽이 들어찼다. “이렇듯 그리스도에게 사람을 이끄시는 힘이 있었던 것은 그의 이적이라든가 설교의 소문에도 의하나, 또 그의 숭고한 인격에도 의한다. 향기로운 방향이 매력으로써 사람을 이끌 듯이, 그에게는 일종의 견인력이 있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일수록,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와도 같은 생활을 보내는 사람일수록, 사람들에게서 경모(敬慕)된다. 우리들도, 사람들에게 경모되는 자,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자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米田豊).
그 무리 중에는 병을 고침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말씀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과 호기심을 가지고 구경하러 온 사람들과 시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올가미에 걸려고 온 서기관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리에게 도(로곤, λόγον) 곧 복음을 가르치셨다. 아마도 1:15의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와 비슷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이 구원의 도를 전하는 것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근본 목적이었다.

예수께서 모여든 무리에게 가르치실 때에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3】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라고 하였다.
이 중풍병자는 중풍병을 앓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해(5절) 영혼마저 병든 아주 비참한 인생이었다. 이 사람은 팔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사람다운 삶을 살기 어려운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도 좋은 사람들(친구들? 친척들? 이웃 사람들?)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 좋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적 사랑과 능력을 믿고 중풍병자를 예수께로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으므로 비상 조치를 취하였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4】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계신 집의 안팎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무리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장벽이 있는데, 이로 인해 포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실망하고 발걸음을 돌리기에는 그들의 믿음이 너무나 확고하였고, 환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너무나 강렬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렸다. 이 일이 불가능한 일 같으므로 아람어의 오역이 아닌가 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팔레스틴의 가옥 구조를 보면, 그런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팔레스틴의 집은 보통 방이 하나이고, 지붕은 평평하였다. 지붕은 나무로 된 마룻대 위에 덤불이나 나뭇가지를 깔고, 그 위에 잘게 썬 짚들을 섞은 진흙 또는 찰흙을 덮고 밟아 다진 것이다. 그리고 집 바깥쪽에 지붕에 올라가는 층계가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층계를 통해 올라가서 그 집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었을 것이다. 지붕은 나중에라도 고칠 수 있지만,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만날 이번 기회를 놓치면 치유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정말 지혜로웠다. 지혜는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필요한 미덕이지만, 그 밖의 덕들은 상황에 따라서는 부덕도 되고 악덕도 되는 것이다. 한 예로, 군인들의 용기는 덕이지만, 죄 없는 자국민에 대한 용기는 정도에 따라서 부덕도 되고, 심지어 악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5인의 용기와 비상한 재치와 수완과 특히 모험이 성공할 것에 대한 확신,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께 대한 신뢰 등이 찬양을 받아야만 한다.”라고 하였다.
중풍병자의 누운 ‘상’(크라바톤, κράββατον : 밤에는 펴고, 낮에는 말아올리는, 가난한 사람의 지푸라기를 넣은 요.)을 달아 내리니는, 예수께 대한 그들의 믿음에 따른 용기와 지혜와 노력이 마침내 중풍병자를 예수님의 눈앞에 데려다 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를 만나러 가는 길이나 사명 수행의 길이 막힌다는 것은 보다 더 좋고 빠른 다른 길이 있다는 뜻이다.

갑자기 지붕이 뚫리고 침상에 달아 내려진 중풍병자를 보게 되신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마가는 【5】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에 대해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신 것이라는 설과 중풍병자까지 포함하여 다섯 사람의 믿음을 보신 것이라는 설이 있다. 중풍병자가 자신의 병이 난치병인 줄 알면서도 따라나선 점과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사죄 선언을 하신 점 등을 미루어 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
믿음(피스틴, πίστιν : 10:52의 주석을 보라.)은 예수님의 신적 사랑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뜻한다.
소자는 테크논(τέκνον)이며 ‘아들’, 또는 ‘어린아이’를 의미하고, 소자야라고 부르신 것은 “유대의 랍비들의 질문자에 대한 호칭과 동일하다”(마경일). 예수님은 몰골이 말이 아닌 중풍병자를 자녀로 여기신 것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의 죄(하마르티아이, ἁμαρτίαι)는 1:4의 주석을 보라.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아페온타이(ἀφέωνταί : 현재 완료 수동형)이며 ‘판결을 취소하다’, ‘추방하다’, ‘면죄하다’, ‘풀어 주다’, ‘지불을 강요치 않다’ 등을 의미한다.
이 말에 대한 가장 좋은 주석은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와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이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의 권위 있는 사죄 선언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행동을 내포한 선언인 것이다. 베데(Bede)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 자신의 고유 능력에 의해서 그때 거기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헨드릭슨(W. Hendriksen)도 “그는 중풍병자의 죄를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지워 버리셨다(cf. 시 103:12, 사 1:18, 55:67, 렘 31:34, 미 7:19, 요 1:9).”라고 하였다. 스테벤즈(J. D. Stevens)는 “예수님의 사죄 선언은 예수님의 신원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예수님은 치유 능력과 귀신 쫓음 등의 이적을 보이셨는데, 여기서는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보이신다. 위의 두 가지는 예수님의 메시아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은 메시아 시대의 도래의 표적으로 이적들과 복음 전파(마 11:5)를 내세우셨고, 직접적으로는 보다 더 어려운 죄 사함을 선언하셨다. 따라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선언보다는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9절)고 하는 편이 쉬웠던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사죄 선언은 그들이 기대하지 않은 면의 응답이었다. 이는 인간의 요구와는 달리, 예수님의 우선적 관심이 인간의 영혼의 상태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이 선행에 의해 죄를 상쇄하려는 노력으로서는 죄책감을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셨다. 그는 그 철학이 비극적인 실패와 지독한 절망으로 이끌 뿐임을 아셨다”(W. Hendriksen).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마 20:28, 막 10:45).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고의 깊은 원인이 그의 죄 때문임을 아셨으므로, 먼저 사유의 은총을 베푸신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질병과 고통의 원인이 그 자신의 죄 때문이며(욥 4:7, 22:5-10, 눅 13:4, 요 9:2), 따라서 치유가 하나님의 용서에 의해 이뤄진다(대하 7:14, 시 103:3, 147:3, 사 19:22, 38:17, 57: 18)고 하는 유대의 관념에 동의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관념에 대해 논박하셨다(요 9:3. 참조 : 눅 13:2).

중풍병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사죄 선언에 대해 서기관들이 마음속으로 반발한 것에 대해서, 마가는 【6】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이라고 하였다.
거기에 앉아 있던 ‘서기관들’(1:22의 주석을 보라.)은, 선풍적인 인기가 있고, 또한 존경을 받는 예수님을 시기의 눈으로 감시하다가 드디어 꼬투리를 잡았다. 자기 인생을 성실하게 가꾸기보다 남의 인생을 트집잡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마음은 카르디아이스(καρδίαις)로서 ‘생명의 중심이며’(잠 4:23), 생각(롬 10:6, 고전 2:9, 고후 3:14), 욕구(롬 10:1), 욕정(롬 1:24), 의지(고전 4:5, 7:31, 고후 7:3), 결단(고전 7:37), 행위(롬 2:15, 6:17), 근심과 고통( 롬 9:1, 2), 슬픔(고후 2:4) 그리고 사랑(롬 5:5, 고후 7:3)의 주체이다. 특히, 중요한 점은 마음이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회개란 이성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변화되는 것이며(고후 4:6), 변화된 마음은 하나님과 관계한다(마 5:8, 벧전 3:4).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감찰하시며(삼상 16:7, 롬 8:27, 살전 2:4),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에 비추어 주신다(고후 4:6). 또한,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살전 3:13 ), 마음에 성령을 주시고(고후 1:22), 그리스도로 하여금 마음에 거하게 하신다(갈 4:6, 엡 3:17, 골 3:15).
인간 편에서는 마음에 할례를 받고(레 26:41, 겔 44:7, 롬 2:29), 마음에 말씀을 담아(롬 10:8)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롬 6:17).
의논하기를은 디아로기조메노이(διαλογιζόμενοι)이며 ‘논쟁하다’, ‘토론하다’, ‘숙고하다’, ‘토의하다’ 등을 의미한다.
마음에 의논하기를은 예수께 대한 첫 적개심의 싹이다.

서기관들의 마음의 의논에 대해, 마가는 【7】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하였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의 이 사람은 경멸의 뜻이 담긴 말이다.
참람하도다는 블라스페미아스(βλασφημίας)이며 사람이나 사물, 특히 하나님께 대해 비방하거나 욕하거나 모독하거나 불경스런 말을 지껄인다는 뜻이다.
그들이 사죄 선언을 하신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단정한 근본 이유는,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유대교적 교훈에 입각하여 사죄가 오직 하나님만의 특권이며(출 34:7, 사 43:25, 44:22), 또한 그 하나님은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신 6:4)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메시아의 시대에서조차도 사죄는 메시아에게 맡겨지지 않았다. 메시아는 심판을 통해 불경건한 자들을 멸하고, 마귀적인 세력들을 제압하고, 올바른 통치를 통해 백성들을 죄에서 지킴으로써 죄를 멸해야 하는 것이다”(Bille- rbeck).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사죄 선언은 참으로 참람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신성 모독은 율법에 의하면 사형■온 회중이 돌로 쳐죽이는 것■에 해당하였다(레 24:15-16, 민 15:30-3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드러내 놓고 예수님을 공박하지 못한 것은 예수님의 권위에 압도당했고, 또한 무리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 지식은 있었으나, 그 지식을 적용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그들의 이성은 발달했으나, 예수님에게서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점을 볼 만한 영적 지각은 없었다. 사실상,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이로서 사죄 선언을 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의 사죄 선언은 하나님의 사죄권의 행사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마음속을 즉시 꿰뚫어 보셨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8】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라고 하였다.
곧(εὑθέως)은 1:10의 주석을 보라.
중심에 아시고의 중심에는 프뉴마티(πνεύματι)이며 글자 그대로의 뜻은 ‘영으로’, ‘심령으로’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삼상 16:7, 렘 20:12) 아시는 것처럼(왕상 8:39, 시 7:10), 예수님도 하나님으로서의 영안으로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신다(12:15, 요 24:25).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의 놀라운 믿음과 교권자들의 놀라운 악심을 보셨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라고 책망 조의 질문을 하셨다.
“보아도 해결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만이 이해할 수 있다”(마경일).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2-13)라고 하였다.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 【9】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하였다.
여기서 예수님은 ‘병 고침’과 ‘용서’를 대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과 ‘병 고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을 대조하시는 것이다(E. P. Gould).
“서기관들의 입장에서 보면,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이 더 쉬운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남의 마음을 둘여다보거나, 전능자의 왕실에 들어가서 용서받은 자와 용서받지 못한 자에 관한 그의 판결을 찾을 수 없으므로 반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병 고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이 더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병이 낫지 않았을 경우에는 모든 사람이 그의 헛소리를 증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W. Hendriksen).
그러나, 실제로 어려운 것은 일반 의사들도 할 수 있는 ‘병 고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이다.

두 가지가 다 가능한 예수님은 서기관들에게 자신이 사죄권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실 필요를 느끼셨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10】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의 지상적 활동에 관해 언급한 사람의 아들의 어록에 속한다. 이 어록은 사람의 아들의 내림과 수난과 부활에 관한 말씀들과 나란히 있다. 이렇게 구분한 다음에 이 말씀은 2:28과 함께 고찰되어야 하며, 전승사적 관점에서는 어록 자료 전승 가운데 이에 일치하는 말들과도 결부되어야 한다(마 8:20, 눅 9:58, 마 11:19, 눅 7:34). 이 말씀과 다른 말씀들과의 차이는 다른 데서는 예수의 전권이 간접적으로 언급되는데, 이 말씀에서는 2:28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전권이 직접 선포된다는 점이다(J. Gnilka, p. 126).
인자(ὁ υίὸς τού ἀνθρώπου)라는 용어는 본서에서는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 칭호는 본서에 14회(2:10, 28, 8:31, 38, 9:9, 12, 31, 10:33, 45, 13:26, 14:21, 14:41<2회>, 14:61) 사용되었고, 그 밖에 마태복음에 30회, 누가복음에 25회, 요한복음에 12회 사용되었다.
인자라는 말은 장차 심판자로 오실 메시아(구세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다니엘(7:13-28, 에녹서 46) 등이 사용하였다. 예수님이 여기서 이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겸손이 아니라, 신적 권위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는, 사죄권이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으로 생각한 서기관들에게 그 사죄권이 인자로 성육한 자신을 통해 행사되는 것을 깨우쳐 주려고 하신다는 뜻이다. 세상에 인자로 오신 예수님은 땅에서 그 사죄권을 행사하신다. 따라서, 예수님으로 인한 죄 사함을 받지 못하는 것은 곧 심판을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요 3:18. 참조 : 요 5:27). 黑崎幸吉은 “예수가 이 권위를 자각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합일 의식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요 5:19, 30).”라고 주장하였다.

예수께서는 중풍병자가 죄 사함 받은 증거로 그의 병을 고쳐 주셨다. 이 사실에 대해, 마가는 【11】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σοὶ λέγω)는 권위가 담긴 강한 표현이다. 예수께서는 이 표현을 앞세워 복음을 가르치시고(마 5:22, 28, 34, 39, 44), 병자를 고치셨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삼중의 명령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중병을 오래 앓다가 치유되면 원기를 회복하는 기간이 지나야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명령은 중풍병자가 치유와 동시에 원기가 회복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명령을 들은 중풍병자에 대해, 마가는 【12】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라고 하였다.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은 치유에 대한 하나님의 시위이다(J. Gnilka, p. 128.). 그가 사람들에 의해 침상에 실려 올 때에는 멸시를 당하고, 인의 장벽에 막히고, 지붕이 뚫어져야 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지만(4절),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은 후에는 혼자서 침상을 메고 당당하게 걸어나갔다. 그것도 장벽이 되었던 무리가 놀라 비켜 주는 사이로 걸어나간 것이다. 주님과의 만남의 증거는 복된 변화이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서기관들 및 무리에게 자신의 사죄권을 증명하셨다.
그 장면을 직접 본 사람들 중에서 서기관들을 제외한(참조 : 2:16, 24, 3:2, 6, 22) 모든 사람이 다 ‘놀라’(엑시스타스타이, ἐξιστασθαι : 기이한 일을 체험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반응)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예수님의 사죄 선언보다는 병 고침 곧 이적 행위에 대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닐카(J. Gnilka, p. 128.)는 “전 인간이 몸은 질병에서, 정신은 죄에서 구원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풍성감리교회. 저서:신약 27권 주석,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설교집 16권. 426-3051)



전체 0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공지사항 관리자 2012.05.23 3750
32 최세창 2007.02.26 1179
31 최세창 2007.02.11 1286
30 최세창 2007.02.05 1264
29 최세창 2007.01.29 1162
28 최세창 2007.01.22 1083
27 최세창 2007.01.15 1280
26 최세창 2007.01.08 1293
25 최세창 2007.01.03 1311
24 최세창 2006.12.18 1250
23 최세창 2006.11.27 1257
22 최세창 2006.11.19 1160
21 최세창 2006.11.13 1379
20 최세창 2006.11.06 1342
19 최세창 2006.10.30 1482
18 최세창 2006.10.28 1459
17 최세창 2006.10.16 1458
16 최세창 2006.10.08 1405
14 최세창 2006.10.02 1328
13 최세창 2006.10.02 1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