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24 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06-12-18 10:40
조회
1251
풍성감리교회. 훼이스신학대학원 객원 교수. 426-3051)
(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영문,한글/ 난해 성구 해설/ 형통의 기도/ 설교집 16권)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24 강>>

다. 예수의 참 가족<3:31-35>
    <비교 : 마 12:46-50, 눅 8:19-21>

불트만(R. Bultmann)은 “20f.절과 31-35절의 연결은 의심할 수 없는 것 같다. 20f.절을 간과한 마태와 누가가 보여 주는 것처럼, 20f.절을 빼고는 역시 31-35절은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f.절은 31-35절과 같은 계속을 요구한다. 이 사실은 21절의 계속이 너무 후에 오기 때문에 D 사본이 21절을 변형시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20f.절과 31-35절이 22-30절에 의해 분리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21, 31-35절이 통일적 구상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것과 관련하여, 그는 디벨리우스(M. Dibelius)의 “34절이 원래의 결어이고, 35절은 후에 첨가된 ‘설교의 말’로서, 원래 독립된 로기온이 아니고, 이 사화에서 일반적인 도덕률을 끄집어내려는 이차적 작품이다.”라고 한 주장을 인용하면서, “아무튼, 로기온과 사화 사이의 상위성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가 34절에서 지시하는 듣는 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도 역시 31-34절과 35절의 결합이 원래의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나는 유사형들에서 미루어 35절에 원래의 것이 있고, 31-34절(20f.절도 함께)에 이차적인 것이 있다고 본다. 즉, 이 상위성은 31-34절의 상황이 35절의 말에 의해 꾸며졌다는 사실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35절의 로기온의 내용을 한 이상적 장면으로 묘사하려고 한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극단적인 해석이다. 물론, 때와 장소의 상세한 점은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그것은 전승의 과정에서 사람들의 관심의 표적이 예수님의 말씀에 두어지고, 때와 장소는 소실되어 버렸을 것이다(C. E. B. Cranfield,). 그럼에도 불구하고, 31-34절의 묘사는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고, 본래의 전승에 기초하는 것이라는 강한 인상을 준다”(데라).

마가는 이 이야기를 【31】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로 시작한다.
예수의 모친은 요셉의 아내인 마리아이다. 요셉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이 활동할 당시에는 살아 있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동생들에 대해 (1) 요셉의 전처 소생들이라는 설(에피파니우스 : 4세기 후반), (2) 예수님의 이종 사촌들, 즉 성 처녀 마리아의 자매이자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의 아들들이라는 설(히에로니무스 : 4세기 후반), (3) 요셉과 마리아의 작은 아들들이라는 설 등이 있다.
앞의 두 설에 대해 山口 昇은 마리아의 영구 동정의 교리를 옹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동생들에 대한 특별한 설명이 없다는 점과 예수님이 마리아의 맏아들이라는 기록(눅 2:7)이 있는 점을 미루어 대다수 학자들의 견해인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동생들은 집 안팎에 있는 무리 때문에 예수께 갈 수 없어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동기와 목적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는 소문 때문이었고, 따라서 예수님을 집에 데려다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자세한 것은 3:21의 주석을 보라.). 이와 같이 어설픈 지식이나 영적 몰이해는 위대한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자기 본위의 선의는 종종 남에게 피해가 되곤 하는 것이다. 선의가 선의가 되려면, 자기 본위가 아니라 남 본위의 사고 방식이 필요하다.

어드만(C. R. Erdman)은 “그들은 예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가 하시는 일을 중지시키려는 것이었다. 예수는 어떻게 하시면 좋을까? 자기의 일을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머니를 아무렇게나 대접할 수도 없다. 일에 지장을 받을 수도 없고, 인간적으로 냉정한 사람이 될 수도 없다. 참으로 진퇴양난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지혜로 그 일을 처리하셨다. 예수는 이것으로 영원한 진리를 가르치실 기회로 삼으셨으니, 즉 예수의 참된 친척은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헨드릭슨(W. Hendriksen)도 “예수께서는 방해를 항상 유익하게 사용하셨다.......그는 방해를 위대한 말, 또는 놀라운 행위의 성취를 위한 발판으로 바꾸는 방법을 아셨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무리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32】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라고 하였다.
누이들(αἱ ἀδελφαί σου : ‘당신의 누이들’)은 A, D, E, F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 א, B, C, K, L 사본 등에는 생략되었다. 생략된 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병행구와 어울리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35절과 어울린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무리가 전하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33】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라고 하였다.
이 예수님의 질문은 고대 교회에 큰 어려움을 초래하였다(E. Sch- weizer). 이 예수님의 질문은 자신의 가족 관계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다. 이 질문은 가족들의 불신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방해받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예수님의 본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또한, 육신의 가족 관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신령한 가족 관계를 가르치시기 위한 의도를 나타내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빅켈스테트(E. Bickersteth)는 “인간으로서 예수님은 인간적 애정과 지상의 혈연 관계를 가지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만을 아셨다. 즉,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증진하는 것을 생의 첫 의무와 생의 첫 지배 원리로 삼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육신의 가족들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여기시지 않았다. 이 점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시는 중에도 모친을 염려하신 사실로도 분명해진다(요 19:26-27).

아무튼, 예수님의 질문의 요지는 “핏줄 관계란 예수님의 행위를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성장하는 예수님과의 실제적 관계에 비교할 때,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E. Schweizer).

예수께서 자신의 참 가족에 대해 정의를 내리신 것에 대해서, 마가는 【34】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라고 하였다.
둘러앉은 자들은 열 두 제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마 12:49).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는 예수께서 자신과 피로 맺어진 가족들을 무시하거나 모욕하려는 의도로 하신 말씀이 아니다. 육신의 부모나 형제 자매보다도 훨씬 더 가깝고도 중대한 새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려는 의도로 하신 말씀이다.
웨슬리(J. Wesley)는 “단순히 육체의 어머니로 생각하던 동정녀 마리아보다 자기의 참된 제자들을 이렇게 더 사랑하셨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제자들에 대한 자기의 높고 온유한 애정을 보일 뿐만 아니라 수세대 후에 그녀에게 드려질 지나치고 우상적인 영광을 예견하고 의도적으로 방지한 것 같다.”라고 하였다.

마경일 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는 일은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형식적인 사건으로가 아니라, 그 말씀을 듣는 내적‧정신적 사건으로 성립된다.......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복종함으로써 성립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라고 하였다. 이 점은 예수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분명해진다.
누구든지는 아주 광범위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데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마태복음과 같고,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로 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은 구체적으로 성경, 특히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알 뿐만 아니라, 유익이 되든지 손해가 되든지 그 뜻대로 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닐카(J. Gnilka, p. 196)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다교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이 원칙(참조 : 롬 2:17-18)은 예수의 말에서 새로운 방향점을 찾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예수님과의 가족 관계에 대해 콜(R. A. Cole)이 잘 설명하고 있다. “이 관계는 외적이며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내적인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은 교리를 아는 단순한 지식, 심지어 진리에 대한 지적 동의‧승인조차도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사실상 그런 지식은 우리에게 저주가 될 뿐이다(눅 12:48). 그런 지적 동의는 궁극적으로 자기 기만과 멸망으로 이끌 뿐이다(눅 6:47-49). 지적 승인과 참 믿음 사이의 차이는 야고보서 2:21-24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추상적‧지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도덕적‧경험적인 것이다. 그 지식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므로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다. 그 지식은 다른 지식처럼 지적 발견이 아니라, 우리에게 초래된 변형 또는 생명이 부여된 영적 경험이다.”
그러므로 종교적‧도덕적 성격을 특징으로 하는 예수님과의 가족 관계는 “하나님에 의해 인간 속에 생겨진 새로운 본질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 자체는 복종으로 보여진다”(E. P. Gould).
한 마디로 말해, 먹고 마시고 일하며 사는 것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것으로 삼고 있는바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관계는 예수님의 생에서 최우위적인 것이며 중심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과 이 관계를 함께하고자 하는 자들은 그분과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이다. 칼빈(J. Calvin)은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들과 모든 신자들에게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족, 즉 자신의 모친과 형제라는 명예로운 위치를 제공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된 것이므로,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롬 8:17).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결단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따른다.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는커녕 알 수도 없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만 그 뜻을 알고 행할 수 있다. 이것은 바울만의 교리가 아니다(엡 2:8, 빌 2:12-13). 이것은 또한 예수님의 교훈이다(요 15:1-12).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순수한 믿음과 계속적인 기도 그리고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그란트(F. C. Grant)는 “이 삽화는 가족과 헤어지고, 외국으로 추방당하고, 박해를 받은 초대 교회에 대해 가장 용기를 북돋워 주는 말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스위프트(C. E. G. Swift)는 “영적 가족, 이것이 초대 교회를 성장시킨 근원이 되는 진리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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