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8강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3-03-22 12:57
조회
3116
하. 십자가에 못박히심<15:21-32>

<비교: 마 27:32-44, 눅 23:26-43, 요 19:17-27>

불트만(R. Bultmann)은 “십자가형의 보도에서 마가의 경우 옛 역사 보도―20b-24a절(십자가에 못박으니라, καὶ σταυρούσιν αὑτόν는 여기에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가 전설적으로 개작된 것이 분명하다.”1)라고 하고, 또 “21절(구레네 사람 시몬)은 마태와 누가에 의해 간과된 14:51f.처럼 옛 전승의 단편임이 분명하다.”2)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20b-24a절 이외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만한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의 개별적인 장면들이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에 발생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410)는 “이 개별적인 장면들이 수가 많고, 긴밀히 결부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보도의 여러 가지 설화적 특징들이 확대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사건의 진행이 중복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인상은 더욱 짙어진다(24절a와 25절, 23절과 36절, 34절과 37절). 이처럼 내용이 중복해서 나오는 걸로 보아, 우리는 원래 독립해 있었던 두 개의 십자가형 보도가 결합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느 보도에 어느 부분들이 해당되는가를 구별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를 연구한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 그들의 견해대로라면, 옛 전승에 속하지 않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3)
마가는 이 이야기를【21】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로 시작한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언급한 것은, 마치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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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 344.
2) “Dibelius(Formg. s. 183과 Botsch. u. Gesch. I. S. 252f), Finegan(a. a. O. S. 75), Lietzmann(ZNW 30, 1931, S. 214f.)의 의견도 같다.”(in Ibid.).
3) J. Gnilka(하권, pp. 410-411)는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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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 사는 너희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알렉산더는 사도행전 19:33과 디모데전서 1:20과 디모데후서 4:14 등에 언급되고, 루포는 로마서 16:13에 언급되는데, 같은 사람인지가 문제된다. 전자의 가능성은 거의 없고, 후자는 일반적으로 같은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다. 바울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 16:13)라고 하였다. 분명히 루포의 어머니, 즉 시몬의 아내는 바울에게 어머니와 같은 봉사를 하였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의 구레네(Κυρηναίον)는 북아프리카의 중요한 다섯 도시 중 하나이며, 지중해에서 십 마일 떨어진 고원 지대로서 오늘날의 리비아(이집트 서쪽)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그 곳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음을 생각해 볼 때, 시몬(Σίμωνα)은 어떤 사람들이 추정하듯이 아프리카 흑인이 아니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임이 분명하다”(W. W. Wessel). 그렇다고 하면, “시몬의 두 아들의 이름이 헬라 이름이기 때문에, 그가 유대인이 아닐지도 모른다”(쉥크)1)는 견해는 취할 바가 못 된다.2) 구레네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독자적인 회당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었다(행 6:9).
슈바이처(E. Schweizer)는 들에서[시골로서]란 유월절 날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또, 쉬라이버(Schreiber)와 쉥크(Schenk)는 시몬이 들판에서 온 것은 율법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3) 그러나 그닐카(J. Gnilka, 하권, p. 416)는 “만일 그랬다면 좀더 분명히 표현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런 대낮에 들일을 끝내고 돌아오지는 않는다.”라고 반대하였다.4) 또, 헨드릭슨(W. Hendriksen)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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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하권, p. 416, 주 29.
2) W. W. Wessel, W. Hendriksen, R. A. Cole. W. L. Lane, F. C. Grant, W. Barclay, 이상근, 마경일, J. Gnilka(하권, p. 416) 등은 시몬을 유대인이라고 한다.
3) “Schreiber, Theologie des Vertrauens, 64. Schenk, Passionsbericht, 28f.”(in J. Gnilka, 하권, p. 416, 주 26).
4) “Billerbeck, II. 828f. Dalmann, Jesus-jeschus, 93f. Billerbeck에 의하면 축제 때, 들에서 일하는 것이 모두 금지된 것은 아니며, 이런 일이 안식일에 허용되었음을 전제한다”(in J. Gnilka, 하권, p. 416, 주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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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특별한 금요일 아침에 그가 시골에서 왔다고 해서 그를 농부라고 추론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라고 하였다. 또, 시골로서의 원어(ἀπ‘ ἀγρου)는 ‘들일에서’(von Feldarbeit)1)가 아니라, ‘들에서’, ‘시골에서’, ‘뜰에서’를 의미하는 것이다(M. Henry, F. C. Grant, J. Gnilka, 하권, p. 416, 주 27).
고대의 증언에 의하면, 십자가형이 확정된 죄수는 직접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하였다.2)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달리 암시하는 사본이나 문맥상의 자료가 아무것도 없으므로, 여기서는 십자가 전체로 보아야 한다.”라고 하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십자가의 기둥은 이미 처형장의 바닥에 박혀 있고, 지고 갈 것은 횡목뿐이라고 한다.3)
바클레이(W. Barclay)는 “죄수는 네 명의 병사들이 정방형으로 둘러선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한 명의 병사가 죄수의 죄상을 쓴 서판을 들고 행진하였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보여서 경고를 받도록 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큰 거리와 골목을 누비며 지나갔다.”라고 설명하였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요 19:17), 율법의 예언을 좇아 예루살렘 성밖에서 못박히시기 위해(레 24:14) 끌려가셨다.{그 길은 ‘고난의 길’(Via Dororosa)이라고 일컬어진다. 어느 지점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대신 지워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15:21).
“교부들(예: Chrysostom, In Joh. Hom. lxxxv, i)은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데 사용할 재료들을 짊어지고 가는(창 22:6) 이삭에게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그리스도의 한 유형을 보았다”(C. K. Barrett). 크리소스톰(Chrysostom)보다 한 이백 년 전의 사람인 “터틀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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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하권, p. 416, 주 26.
2) “Artemidor, Oneir. 2, 56: ‘십자가에 달릴 사람은 우선 십자가를 끌고 가야 한다.’ 그 밖의 증빙 구절은 Blinzler, 360, 주 16과 Billerbeck I, 587에 나와 있다.”(in J. Gnilka, 하권, p. 416, 주 24).
3) “Blinzler, 375”(in J. Gnilka, 하권, p. 416. 주 25), W. W. Wessel, E. Schweizer, J. Gnilka, 하권, p. 416, W. L. Lane, F. C. Grant,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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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tullian: 1660-220] 이후의 많은 주경가들이 이 때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산상으로 가시던 주님의 모습이, 이삭이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던 데서(창 22:6), 그 그림자가 있었다고 지적한다”(이상근).}(요 19:17의 주석).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이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갈 힘이 없는 것을 보고, 백성들에 대한 ‘징발권’을 행사하여,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 것을 붙잡아 그에게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게 하였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간 봉사는 비록 처음에는 억지로 하게 된 것이지만, 결국엔 자신과 가족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복이 되었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끌고간 곳에 대해, 마가는【22】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라고 하였다.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의 골고다는 아람어 골골타(אחלגלוג: ‘두개골’, ‘머리’)의 헬라어 음역이다(Γολγοθά:마 27:33, 요 19:17). ‘해골’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는 크라니온(κρανίον)인데 벌게이트 역(Vulgate: Jerome의 라틴 역 성경)에서는 칼바리아(Calvaria. 참조: 칼보리, Calvary)로 번역되었다.
골고다(해골의 곳)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1) 이곳에 사형된 사람의 해골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Jerome, Harm),1) (2) 여기에 매장된 아담의 해골 또는 ‘머리 잘린 사람들의 장소’와 관련해서 해석한 것이라는 설,2) (3) 이 언덕이 해골처럼 생겼기 때문이라는 설3) 등이 있다. 최근의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3)설이 가장 무난하다.
골고다의 위치에 관해서는 비아 돌로로사의 종점이며, 현재의 성안인 성묘교회(The Church of Holy Spulcher)가 있는 곳으로 믿어 왔으나(W. W. Wessel, E. Schweiz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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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이상근.
2) “Origen, Chrysostom, Epiphanios, Hieronymus”(in M. Henry, E. Schweizer, J. Gnilka, 하권, p. 417).
3) J. A. BengelE. P. Gould, C. E. G. Swift, “Godet, Plummer”(in 이상근),“C. Kopp, Regensburg, 1959”(in J. Gnilka, 하권, p. 417, 주 34), A. E. Sanner, E. Schweizer, 마경일,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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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와서는 다메섹 문밖에 있는 ‘골든 갈보리’(The Gordon’s Calvary)로 불리는 언덕이 보다 유력하게 지목된다.1)
골고다에 도착한 후의 군인들의 행동에 대해, 마가는【23】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라고 하였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전에 몰약을 탄 포도주2)를 주었다. 몰약은 아라비아 토산품으로 맛이 쓰기로 유명한 마취제로 고통을 경감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와 같은 인도적인 행위는 유대의 관습이었다.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의 경건한 여인들이 자발적으로 이런 마취제를 사형수들에게 제공하였다(TB Sanhedrin 43a).3) 이 관습의 배후에는 잠언 31:6-7의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그는 마시고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그 고통을 기억치 아니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418)는 “그러나 여인들이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형리들이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나,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받지 아니하셨다. 아마도 그 이유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14:25)라고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한 것이며, 또한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고난을 그대로 감수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쉥크(Schenk)4)는 잠언의 구절을 감안하면, 이 거절은 예수님이 결국 죽을 분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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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상근: 지금 성지에서는 예수께 십자가를 지신 빌라도의 재판석에서 십자가에 달린 골고다 언덕까지의 길을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고난의 길)라 부르고, 그 길을 예수께서 가시다 멈추신 지점을 따라 14정류소로 나누고 있다. 구레네 시몬을 만난 곳은 제 5정류소에 속한다.
2) 마태복음 27:34에는 “쓸개 탄 포도주”로 되어 있다.
3) in W. L. Lane과 J. Gnilka, 하권, p. 418.
4) in J. Gnilka, 하권, p.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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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군인들에 대해, 마가는【24】십자가에 못박고 그 옷을 나눌 쌔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라고 하였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실은 극도로 자제하여 기술되었다. 오히려 못박히신 예수님 아래 있었던 군인들의 어이없는 짓거리가 더 자세하게 기술되었다.
십자가형에 대한 자세한 것은 로마 세계에 잘 알려져 있었으므로, 더 많은 설명이 요구되지 않는다. 십자가의 모양에는 T형과 †형과 X형이 있었다.
이 십자가형은 고대 아프리카, 애굽, 수리아, 파사, 헬라, 로마 등에서 행해진 보편적 사형법이었다. 중국에도 십자가형이 있었으나 못을 박지는 않고 매어 달기만 하였다. 십자가는 처음부터 조립하는 수도 있었고, 분해해서 운반하는 수도 있었다. 로마법에는 십자가의 일부, 또는 전부를 사형수가 짊어지고 형장까지 가게 되어 있었다. 십자가의 크기는 보통 9~12척이었고, 처형은 죄수를 벌거벗겨 형틀 위에 눕혀 놓고는 양손과 포개진 두 발등에 못박은 후에 세우는 방법과 처음부터 세워진 십자가에 못박는 방법이 있었다. 발등에 못을 박는 대신에 비끄러매기도 하였다.
십자가형은 키케로(Cicero: 주전 106-43. 로마의 정치가이며 철학자.)의 말대로, “인간이 내릴 수 있는 형벌 중에 가장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형벌”이므로, 로마에서는 자국 시민에게는 행하지 않고, 식민지인이나 노예들 또는 반란자나 강도 같은 극악한 죄수에게만 행하였다. 십자가에 못박힌 죄수는 빨리 죽지 않았다. 7 일간이나 못박힌 채로 매달려 있는 죄수도 있었다고 하나, 대개는 3일 정도 매달려 있으면 미칠 것 같은―실제로 미쳐 버린 죄수도 있었다고 한다―극도의 고통과 굶주림으로 인해 탈진하여 죽고 말았다. 그 고통과 치욕이 오죽했으면,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천 가지의 죽음으로 죽는다.”라고 하는 말이 다 있을 정도이었다. 때로는 죄수에게 베풀어진 자비로서 큰 망치로 다리를 쳐서 속히 죽도록 하는 법이 있었다고 한다. 죄수가 죽으면 매장해 주기도 했지만, 그대로 십자가에 방치하여 뭇사람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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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와 새들의 밥이 되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1)
그 옷을 나눌 쌔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갖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는 뜻이다. 이 일은 시편 22:18의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가 성취된 것이다.
그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예수님과 그 십자가 곁에서 멸망이나 구원은 아랑곳없이 헌옷 나부랭이나 더 갖기 위해 제비를 뽑는 그들의 모습은 얼마나 기막힌 대조인가! 인간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치욕과 고통은 아랑곳없이 자기 위주의 복만을 구하는 이기적인 현대 교인들도 그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많은 것을, 심지어 옷까지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자만이 그분과의 참된 사귐을 가질 수 있다.”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그 시간에 대해, 마가는【25】때가 제 삼 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니라라고 하였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때는 제 삼 시 곧 오전 아홉 시였다는 것이다. 이 시간 진술은 해설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 기자들에게도 어려움을 제기한다. 마태와 누가는 이 시간 진술을 생략하였다. 요한복음 19:14에 의하면, 예수님은 여섯 시경에 빌라도 총독의 선고를 받으셨다고 한다.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는 몇 가지 견해를 소개하는 웨셀(W.W. Wessel)은 요한이 로마의 시간 계산법을 사용한 것, 즉 여섯 시가 유대 시간 계산법의 정오가 아닌 오전 여섯 시라고 해석하는 견해를 반대하고, 초기의 필사자가 첨가했거나 오기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하면서 후자가 더욱 가능성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간단하면서도 중대한 사건 기록을 베끼는 일에 필사자가 실수했다거나 임의로 첨가했다는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 또한, 삼 시를 옷을 나눠 가진 일에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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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W. L. Lane, W. W. Wessel, “데이비스”(in W. W. Wessel), W. Hendriksen, W. Barclay,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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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으려는 학자들이 있으나(Lagrange, Schmid-mahoney),1) 지나치게 안일하게 처리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로마와 유대의 시간 표기법의 차이라는 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요한복음 기자는 다른 구절들(1:39, 4:6, 52)에서도 그런 것처럼, 아마도 로마의 시간 계산법을 사용한 것 같다.······이 두 진술, 즉 예수님이 오전 6시경에 선고를 받았다는 요한의 진술과 예수님이 오전 9시(유대 시간으로는 3시)에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마가의 진술은 서로 크게 모순된다고 하기 어렵다. 요한은 제 6시라고 하지 않고, 제 6시경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당시의 험악하기 이를 데 없는 분위기(14:1-15)를 미루어 볼 때, 선고에서 처형까지의 2-3 시간이란 결코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못박히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마가는【26】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27:37에는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로 되어 있고, 누가복음 23:38에는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로 되어 있고, 요한복음 19:19에는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로 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 대해, 리(Lee)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요 19:20) 번역에 기인한 것으로 보려고 하나,2) 그닐카(J. Gnilka, 하권, p. 420)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면서 마르코복음에 있는 짧은 형태인 ‘유대인의 왕이라’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이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니라”가 그 죄패의 완전한 기록일 것이라고 한다. 현장에 있었던 요한의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기록을 보아, 헨드릭슨(W. Hendriksen)의 추측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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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하권, p. 419, 주 45.
2) in J. Gnilka, 하권, p. 420, 주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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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듯하다. 또, “요한의 기록 자체를 완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이상근). 그렇다면, 나머지 기록들은 죄패의 요점만을 썼거나, 혹은 줄여서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죄명을 쓴 죄패를 사형수의 목에 걸거나,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는 것이 당시의 풍속이었다.1) 대개 “죄패는 백악(白堊)으로 하얗게 칠한 나무판에 잉크로 쓰거나 불로 새긴 것이었다”(W. L. Lane).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명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것은, 그것도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한 것(요 19:20)은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면서 모반할 자들에 대한 경고와 유대인들을 조롱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세계에 표명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한 방편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의 죄명이 유대인의 왕으로 되었다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죄도 없는 그들의 왕을 죽인 것이 되므로,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라고 써 달라고 요청했으나 묵살되었다(요 19:20-22).
그 때에 강도로 알려진 두 죄수가 거의 동시에 십자가형을 받은 것에 대해, 마가는【27】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없음)라고 하였다.
강도는 레스타스(λῃστάς)이며 ‘강도들’, 또는 ‘반란자들’로 번역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도 바라바와 연루된 반란자들이라는 설2)과 강도들이라는 설(눅 23:33)3)이 있다. 강도들이자 반란자들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누가의 증언대로 강도들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누가에 의하면 그들 중 한 사람은 회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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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W. Wessel, J. Gnilka, 하권, p. 420, 黑崎幸吉, 山口 昇, 이상근.
2) W. W. Wessel, A. E. Sanner, E. Schweizer, “M. Hengel”(in J. Gnilka, 하권, p. 421, 주 56), “Dormeyer”(in J. Gnilka, 하권, p. 421, 주 57), W. L. Lane, 마경일.
3) W. Hendriksen, “K. H. Rengstorf”(in W. Hendriksen, 주 821), C. E. G. Swift, E. P. Gould, E. Bickersteth, F. J. Dake, R. Earle, R. A. Cole. D. W. Burdick, 黑崎幸吉, 米田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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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구원받았다고 한다(눅 23:40).
“미쉬나1)의 법에 의하면, 하루에 한 사람밖에 처형할 수 없었지만, 로마인들에게는 집단 처형이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J. Gnilka, 하권, pp. 420-421).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강도들 한가운데서 강도들과 같은 취급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보다 더 억울하고 부당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섭리라는 면에서 볼 때, 강도들 한가운데서 운명하시는 것이야말로 가장 영예로운 죽음이 아닐 수 없다. 바클레이(W. Barclay)는 “그것은 예수님의 전 생애가 최후에 이르기까지 죄인의 친구였다는 것을 상징해 준다.”라고 하였다.
위경 전승은 나중에 사람들이 두 강도의 이름을 말하게 되었을 때, Zoathan과 Chammatha라는 이름을 첨가해 넣었다(Kodex c).2) 그러나 {「아랍 소년의 복음」(Arabic Gospel of the Infancy xxiii)에는 두 강도의 이름이 디도(Titus)와 드마크스(Dumachus)로 되어 있다.3) 외경 빌라도의 행전(10:)에는 회개한 편이 디스마(Dismas), 다른 편이 게스다(Gestas)였다고 하고,······니고데모의 복음(Ev. Nicodemus 10:)에는 디도와 디스마라 한다.4)}(마 27:38의 주석). 현재로서는 그 두 사람의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다.
극도의 치욕과 극도의 고통인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에 대한 행인들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2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라고 하였다.
이 구절 앞에, 예수님이 두 강도들 한가운데에 못박히신 것이 이사야 53:12의 성취임을 밝히는 내용이 있다. “불법자와 함께 인정함을 받았다 한 성경이 응하였느니라”(15:28) 그러나 이류 사본들(K, L, P, Δ, Θ, Π)에만 있고, 일류 사본들(א, A, B, C, D)에는 없으므로,5) 후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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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쉬나(미드라쉬): 모세 율법에 포함되지 않는 일상생활의 규범으로 구전이나 관습으로 지켜 내려온 것인 ‘할라카’의 집성이며, 모세 율법 다음가는 권위를 갖는다.
2) in J. Gnilka, 하권, p. 421.
3) in A. Plummer.
4) in 이상근.
5) in K. Aland, et al., 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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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구절(29절)부터 32절까지는 행인들의 조롱을 묘사했는데, 이 묘사는 시편 22:6-8의 반영이다.
이 구절 이하 32절까지는 사람들의 조롱을 묘사했는데, 이 묘사는 시편 22:6-8의 반영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에 대한 세 무리―지나가는 자들과 대제사장들 및 서기관들과 못박힌 강도들―의 조롱을 연속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예수님이 못박히신 곳이 성밖이었지만, 성에서 가깝고(요 19:20), 또 길에서도 멀지 않기 때문에 지나가는 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못박혀 괴로워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경멸과 거만의 표시로 머리를 흔들면서(욥 16:4, 시 22:7, 109:25, 사 37:22, 애 2:15) 예수님을 모욕하였다. 그들 모두는 예수님이 바로 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모욕하여(에블라스페문, ἐβλασφήμουν)는 2:7의 “참람하도다”의 주석을 보라.
아하(οὐά)는 감탄사로 모독이나 비아냥거림에 쓰인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는 14:58의 주석을 보라.
지나가는 자들의 계속된 조롱에 대해, 마가는【30】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모르는 그들은 무기력하게 매달려 고통을 당하는 예수님께,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마 27:40) 자신을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였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저버리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것임을 알 영적 지각이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은 바로 그들까지도 포함한 모든 죄인들을 위한 죽음보다 더한 사랑의 힘을 꿰뚫어 볼 영안이 없었다.
스위트(p. 383)는 “이 조롱은 특별히 인내하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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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오직 희생정신에서 자제하고 있는 그의 권세를 그에게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1)라고 주석하였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조롱하는 점에서는 유대의 지도층인 교권자들도 다를 것이 없었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3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하였다.
대제사장들(8:31의 주석을 보라.)과 서기관들(1:22의 주석을 보라.)과 “장로들”(마 27:41. 막 8:31의 주석을 보라.)은 공회원들이다.
교권자들은 지도자라는 신분과 품위를 망각한 채, 비열한 욕망이 이뤄졌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일반인들과 같이 천박하게 예수님을 희롱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그 내용은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교권자들은 예수님이 남들을 위해 행하신 신유와 축귀 등의 기사와 이적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음을 인정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런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능력이 사단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3:22). 그러나 이제는 그나마도 사단의 도움이 다하여 자기 한 몸조차도 구원할 수 없다고 희롱하는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맹목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다(참조: 마 15:14). 오히려 예수께 대한 시기와 질투와 살의로 더욱 심해졌을 뿐이다. 교권자들과 지나가는 일반인들과의 차이란 계급장밖에 없다.
레인(W. L. Lane)은 “역설적으로 31절 후반의 희롱하는 말들이 심원한 진리를 표현하였다.”라고 한다. 실상, 교권자들의 희롱의 소리는 실상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이었다. 만일 예수님이 인간을 위한 자신의 선교를 성취하셔야 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고통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셨을 것이다(8:31). 예수님은 자기 한 몸을 버림으로써 만민을 구원하러 오셨고, 현재 그 일을 결정적으로 수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 수 없다는 말은 도덕적‧영적 불가능을 의미하는 말이요 역학상의 불가능이 아니다”(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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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W. W. We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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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교권자들은 자기들의 비난과 조롱의 말들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이와 같은 교권자들의 영적 맹목과 무지를 볼 때, 정말 중요한 것은 종교적 신분이 아닌 성령 충만임을 알 수 있다.
교권자들의 계속된 조롱과 예수님 곁에 못박혀 있던 강도들의 조롱에 대해, 마가는【32】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라고 하였다.
레인(W. L. Lane)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을 조롱했을 때, 그들은 빌라도의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다른 표현으로 바꾸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적절한 칭호이며, ‘이스라엘의 왕’은 예수님의 주장에 대한 올바른 팔레스틴 형식이다.”라고 하였다.
이스라엘 왕은 유대인의 왕(15:26)과 같은 의미이다. 역시 교권자들의 희롱의 소리이나, 실상 예수님은 영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왕인 메시아이시다.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라고 한 조롱은 일반적인 유대의 메시아관을 반영한 것이다. 즉, 메시아로서의 표적을 보여 우리 모두를 믿게 해 보라는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메시아 참칭자라는 조롱이다. 이 점에 대해 고울드(E. P. Gould)는 다음과 같이 의역하였다. “아니,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라니!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 만일 그가 실제로 메시아적 왕이라면, 자신의 메시아적 권능을 사용하여 십자가에 매달린 우스꽝스런 위치에서 내려옴으로써 자신을 구원해 보라! 그렇게 하는 것이 메시아로 믿었으면 하는 그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는 길이다.”
못박히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온갖 비방과 조롱을 하는 것은, 마땅히 못박혀 죽어야 할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누가복음 23:36에는 군병들의 희롱도 첨가되어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과 저주 한가운데서 바로 그들 모두가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구원의 사랑을 성취하신 것이다(참조: 갈 3:13).
이 예수님의 침묵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메시아성의 비밀을 보게 된다(Cranfield).1) 베드로는 이 극적인 예수님의 침묵에 대해,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3-24)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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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이상근.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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