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8강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한 경고(14: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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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창
작성일
2013-01-11 00:00
조회
1706
마.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한 경고<14:17-21>

<비교: 마 26:20-25, 눅 22:14-16, 요 13:21-30>

이 단화의 시간에 대한 규정과 열두 제자에 대한 언급은 마가의 편집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Grundmann”,1) J. Gnilka, 하권, p. 310).

본래 이 단화는 독립된 전승이었거나,2) 다음과 같은 두 개의 독립된 부분, 즉 예수님이 한 제자의 배신을 예고하신 식사 장면(18-20절)과 화의 선언 및 경고의 선언(21절)으로 구성된 것 같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311)는 양자의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아무튼, “이 전승의 기원은 식사의 관습이 시사하듯이 팔레스틴의 유다 그리스도교에게까지 소급된다”(J. Gnilka, 하권, p. 311). 그리고 “양식상으로는 장면과 결합된 예언의 말씀으로 규정해야 한다”(J. Gnilka, 하권, p. 311).

마가는 이 단화를【17】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와서로 시작한다.

저물매는 유대에 있어서는 새 날이 시작되는 때이다. 그러므로 니산월 14일이 끝나는 시간이자 15일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 저물 때에 예수께서 ‘베다니’(11:1의 주석을 보라.)에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와서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함께 앉으셨다.

열둘이라고 한 것은, 이미 베드로와 요한(눅 22:8)이 다락방에 가 있었다는 점(14:16)을 보아 이상하다고 말하는 학자가 있다.3) 이 점에 대해, 그닐카(J. Gnilka, 하권, p. 312)는 “열두 제자가 다음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증인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마르코는 문맥상 일치하지 않는 것도 감수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심부름을 마친 두 제자(베드로와 요한)가 베다니로 일단 돌아갔다가 일행과 함께 다시 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식사 중에 하신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에 대해, 마가는【18】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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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Gnilka, 하권, p. 310.
2) R. Bultmann, op. cit., p. 310.
3) in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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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유월절에는 선 채로 먹었는데(출 12:11), “그것은 급하다는 표시이며, 노예 상태에서 도망쳐 나오는 노예라는 표시이었다”(W. Barclay).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긴 의자에 왼쪽 팔꿈치를 의지하여 비스듬히 기대 누운 자세로 먹는 것이 관례이었다(W. W. Wessel, W. Barclay, A. E. Sanner). 이것은 “자신의 가정과 나라를 가진 자유인이라는 표시이었다”(W. Barclay).

그와 같이 의미 있고 기쁜 출애굽을 기념하는 식사 중에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기념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제자의 배반에 대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3:28의 주석을 보라.)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는 시편 41:9의 반영이다(참조: 요 13:18). 이 시편은 병들고, 박해받고, 친구들에게서 버림받은 사람에 대해 다룬 것이다. “흉허물없이 사귀던 친구마저, 내 빵을 먹던 벗들마저(칠십인역) 우쭐대며 뒷발질을 합니다.” 쿰란종파의 시편에서 의의 교사가 같은 시편 구절로 탄식을 시작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내 빵을 먹던 모든 사람이 내게 등을 돌렸다”(1 QH 5, 23-24).1)

나와 함께 먹는 자는 다만 그 시간에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는 자라는 뜻뿐만 아니라, 가장 친한 벗이라는 뜻도 있다(시 41:9 참조. 마경일). 예나 지금이나, 중동 지역에서는 “친구와 함께 음식을 먹은 후에 그를 배반하는 것은 가장 악한 배신 행위로 간주되었다”(W. W. Wessel).

여기의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는 가룟 유다를 염두에 두신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따라 곧 유월절 양으로 죽임을 당하실 비장한 각오와 재정을 맡길 정도로 믿고 사랑하던 제자의 반역 때문에 몹시 착잡하셨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가룟 유다의 양심에 큰 충격을 주어 그의 죄악에 대한 회개를 일깨워 주고, 또한 덫에 걸릴 아슬아슬한 순간에, 아직은 너무 늦은 것이 아니므로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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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 Jeremias, Der Leherer der Gerechtigkeit, 1963(StUNT 2), in J. Gnilka, 하권, p. 313, 주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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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나오도록 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었다”(M. Henry, W. Hendriksen).

식사 중에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19】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라고 하였다.

근심하여는 뤼페이스타이(λυπείσθαι)이며, 칠십인역에서는 ‘불쾌하다’(왕상 29:4), ‘얼굴을 붉히다’(창 45:5), ‘통곡하다’(사 15:2), ‘슬퍼하다’(사 19:10), ‘근심하다’ 등을 의미한다.

헨리(M. Henry)는 “제자들이 ‘나는 아니라고 확신합니다.’가 아니라, ‘내니이까?’라고 질문한 것은 자신들의 마음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더 신뢰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 그닐카(J. Gnilka, p. 314)와 마경일 님은 아무도 자기의 마음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자는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특히, 웨셀(W. W. Wessel)은 열 한 제자와 가룟 유다의 질문(마 26:25)을 대조하여 설명하였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의지력과 영적인 힘의 나약함과 두려움 때문에 예수께 질문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께 그렇게 질문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숨기려고 하는 위선을 드러내고 있다. 즉, 다른 제자들과 같이 그렇게 질문하지 않으면 의심을 받을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의 질문은 부정적 대답을 기대하는 것이었다.1)

예수님의 예고에서 우리는 중대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점에 대해, 그닐카(J. Gnilka, 하권, pp. 313-314)는 “그들이 번갈아 가며 묻는 물음은 방어적인 것(제가 그럴 리가?)이 아니라, 실제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저인가요?). 이로부터 예수의 예고의 본래적인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 예고는 넘겨준 자에게 경고하는 것이 아니며, 일차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향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교리적 내용을 포함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린 것이다. 이 섭리에 대하여 인간은 불안정한 위치에 있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가 인간의 죄책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이 거듭 강조된다.”라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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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ruce, Cranfield”(in 이상근), “Taylor”(in A. E. Sanner), A. E. Sanner, W. Hendriksen,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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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마가는【20】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라고 하였다.

나와 함께는 같은 식탁을 의미한 것인지, 예수님과 동시에 그릇에 손을 넣은 자를 의미한 것인지, 예수님의 접시에 함께 빵을 넣는 자를 의미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이러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예수님은 최후까지 그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이다(W. Barclay, 마경일).

그릇은 트뤼블리온(τρύβλιον)이며 ‘접시’, ‘쟁반’, ‘그릇’, ‘수프접시’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예고는 식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빵 조각을 같은 그릇의 국물을 찍은 후에 먹었음을 전제한다. 이런 식사의 상황은 모든 유대교식의 식사와 일치하며(룻 2:14. 참조: 요 13:26), 유월절 식사와도 일치한다”(J. Gnilka, 하권, p. 314). 혹은 몇 사람씩 같은 그릇을 사용(黑崎幸吉, 山口 昇, 이상근)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그릇에는 과일(아마도 대추야자와 무화과 그리고 건포도였을 것이다.)을 짓찧은 것과 물과 향료 그리고 초로 만든 맑은 국물이 담겨 있었다.

마태복음 26:25에는,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3:26에는,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라고 하시면서 한 조각을 찍어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고 하였다. 아마도 다른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하도록 하신 것 같다(눅 22:23, 요 13:29).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경고가 바로 자기를 두고 한 말씀임을 알았다. 그는 또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아직도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동료들에게는 숨겨진 비밀이나, 예수님께는 숨겨질 수 없는 것임을 안 지금은 회개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주목할 사실이 있다. “의심할 것도 없이 예수님은 강제적으로 유다의 행위를 중지시킬 수 있으셨다. 그분이 강제적으로 유다를 중지시키려는 생각을 하셨다면, 단순히 유다의 생각과 계획을 다른 열한 제자들에게 말해 주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날 밤에 유다는 살아서 그 방을 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W. Barclay).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기계로서가 아니라, 자율성을 가진 인격적인 존재로 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호소하시고, 경고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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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하시고, 채찍질하시며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경고에 무관심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말할 수 없는 책임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W. Barclay).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따른 자신의 대속 죽음과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해 안타까운 탄식을 하신 것에 대해, 마가는【21】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인자는 2:10의 주석을 보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 계획에 따라서, 그리고 예언자에 의해서 예언된 대로(사 53장) 속죄 제물로 죽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가거니와는 휘파게이(ὑπάγει)이며, 죽음을 나타내는 완곡어법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요 7:38, 8:14, 21 등).

특히, 여기서는 “단순히 죽는다는 뜻”(Bruce)1) 이상의 “죽음과 영광을 연결짓는 그리스도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J. A. Bengel). 예수님은 이 진리를 거듭 강조하실 필요가 있으셨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운명하셔야 할 메시아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실 때, 제자들은 이 엄숙한 말씀을 회상해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죽음이 대적들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고 주권적이며 영원한 승리의 계획이 실현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였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는 가룟 유다의 운명을 예고한 선언이다. 배신자에게 내려진 저주는 사악한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는 가룟 유다의 개인적인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다의 반역이 하나님의 경륜 수행의 일부분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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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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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서는 안 된다”(마경일). 즉, 하나님의 구원 경륜은 그리스도의 죽음이지, 배신의 역할로서의 가룟 유다가 아니다. 만일 하나님에 의해 가룟 유다가 배신자로 예정된 것이라면, 하나님의 예정대로 충실하게 역할을 감당하는 유다에게 저주를 선언하셨을 리가 없다.

또한, 당시에 격언처럼 쓰이던(F. C. Grant)1)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는 말씀도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천하보다 귀한 생명과 소질 등을 부여받아 가지고 고귀한 일이 아니라, 메시아를 배신하는 일을 할 것이었더라면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을 뻔했다는 뜻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복종하여 그의 경륜에 참여하든가, 혹은 하나님을 배반하여 그의 경륜에 참여하든가 어느 하나의 길을 걷는다. 후자를 택하는 자는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한 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는 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사람이다”(마경일). 이와 관련하여 크란필드(Cranfield)는 “하나님께서 저주받을 사람을 통하여 찬양을 받으신다는 사실은 결코 그 저주받을 사람의 행위를 정당화시켜 주지 못한다.”2)라고 하였다. 얼레(R. Earle,)는 “유다는 자유로이 선택했고, 그 결단은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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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Gnilka, 하권, p. 315: 넘겨준 자에 대한 저주는 묵시문학적 문헌들에도 예시되어 있다. “그들(죄인들 그리고 영들의 주를 부인하는 자들)은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에티오피아 에녹 38, 2).
2) in W. W. We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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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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