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3강 그 때를 위해 깨어 있어라(13:32-37)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2-12-06 11:53
조회
1132
아. 그 때를 위해 깨어 있어라<13:32-37>

예수님은 계속해서 경계해야 할 책임을 강조하시면서 답변의 결론을 내리신다. 이 사실에 대해서, 마가는【32】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하였다.

마태복음에도 있으나(마 24:36), 누가복음에는 없고, 사도행전(1:7)에는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 있다.

이 말씀을 가리켜 불트만(R. Bultmann)1)과 그닐카(J. Gnilka, 하권, p. 274)는 초대 교회의 창작이라고 한다. 그러나, 山口 昇은 “불트만의 견해는 승인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수님이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말을 초대 교회가 부가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웨셀(W. W. Wessel)은 “이러한 말씀들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초대 교회가 그렇게 가슴이 섬뜩한 경계의 말씀을 창조해 냈으리라고는 거의 생각하기 어렵다.”라고 잘 설명하고 있다.

그 날과 그 때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설2)과 그리스도의 재림 및 종말이라는 설(W. W. Wessel, 黑崎幸吉, 山口 昇)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초림과 달리, 최후 심판자로 오시기 때문에 후자를 취해야 한다.

그 날은 예언서에 사용된 공식을 불러일으킨다. 즉, 그것은 야웨의 출현을 선언하는 문장에서 확실히 종말론적 반향으로 나타난다(암 8:3 -9, 13, 9:11, 미 4:6, 5:9, 7:11, 습 1:9-, 3:11, 16, 옵 8, 욜 3:18, 슥 9:16 ). 여기서는 하늘의 천사들(앙겔루스, ἄγγελοι: 1:13의 주석을 보라.)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는 비밀로서 남아 있는 날을 의미한다.

“하느님이 결정적인 계시의 때를 유보했다는 사상(슥 14:7, 솔로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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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 153.
2) W. Hendriksen, A. E. Sanner, W. L. Lane, C. R. Erdman, J. Gnilka, 하권, p.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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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7:23, sBar 21:8)과 마찬가지로, 천사들이 중요한 일들을 모른다는 사상도 유다교에 널리 알려져 있다(참조: 제 4 에즈 4:52, 벧전 1:12, 엡 3:10)”(J. Gnilka, 하권, p. 275).
그렇기는 하나, 아들도 모른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점을 근거 삼아 아리우스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1) 삽입(F. C. Grant), 또는 아리안파의 삽입이라는 설(Ambrose),1) (2) 아셨으나 제자들에게 고할 일이 못 되었다는 설(Augustine, Bruce),2) (3) 성부에 대한 성자의 절대적 복종과 겸손을 표시하는 것이라는 설(H. Alford, D. W. Burdick, 黑崎幸吉), (4) 사람과 같이 되시고 자기를 낮추사 자기 몸을 비우신 그는 여기 대해서 일부러 알지 않으신다는 설(C. R. Erdman), (5) 성부는 계획자, 성자는 계시자, 그리고 성령은 보존자이실 것이므로 재림의 시기를 작정하는 일은 성부에 속하고, 성자는 그 날에 재림하셔서 심판하시고 성부의 계획을 성취시키시는 것이라는 설(이상근), (6) 그의 인성은 알지 못했으나 신성은 아셨다는 설3) 들이 있다.

누가복음 2:52의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와 빌립보서 2:7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등0을 보아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6)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산너(A. E. Sanner)는 “절대로 아무도 그 날과 그 시를 알 수 없다는 이 절의 강조된 단언은 날짜를 정하는 자들에게 자갈을 물렸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말씀에 대하여 익살을 부려 말하기를, ‘그 날과 그 시간은 몰라도 재림의 해는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에 대한 비난은 정당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이 사실은 예수의 재림 날짜를 예언하려는 인간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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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이상근.
2) 상동.
3) J. Calvin, J. Wesley, J. A. Bengel, “Tillotson”(in M. Henry), “Ellicott”(in 이상근), M. Henry, E. Bickersteth, W. Hendriksen, E. P. Gould, W. W. Wessel, J. D. Stevens, C. E. G. Swift, 이상근,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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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 모든 노력―그 상상된 날이 1843년이든 1844년이든, 아니면 1844년 10월 22일이든 1914년 가을이든, 보다 후기의 어떤 날이든―의 헛됨과 죄악성을 증명해 준다.······소란스러움, 주제넘음, 건방짐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도 국내외에 자칭 재림주라고 주장하거나, 재림의 시기를 예언한 이단자들도 있었고, 또한 현재도 그런 이단자들이 활동하거나 암약하고 있다. 또한, 그런 이단자들로 인해 생기는 피해 중 가장 큰 피해는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재림의 시기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감춰진 비밀을 알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오만한 도전이다. 하나님께서 모르게 하신 것은 모르고 있는 것이 순종적인 신앙의 자세이다.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재림의 날과 재림의 때를 모른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경계심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33】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라고 하였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βλέπετε ἀγρυπνείτε)는 B, D 사본 등0을 따른 것이나, X, A, C, K, L, W, Δ, Π, Ψ 사본 등0에는 “깨어 기도하라”(ἀγρυπνείτε καὶ προσεύχεσθε)로 되어 있다.1) 어쨌든, 이중 삼중의 명령형으로 강한 뜻을 나타내고 있다.

재림의 때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태만과 방종이 아니라, 항상 주의해야 하고, 항상 영적으로 깨어 기도하면서 그 때를 대망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깨어 있는 것에 대해 인간이 재림하실 주님을 향해 항상 가져야 하는 태도이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는 태도라고 하였다.

“기도하라”는 프로슈케스테(προσεύχεσθε)이며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과 말과 행동을 포괄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재림의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주의하고 깨어 기도해야 할 의무를 강조하시기 위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셨다(34-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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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K. Aland, et al., 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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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 마가는【34】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라고 하였다.

사람은 그리스도, 집은 교회, 타국으로 갈 때에는 그리스도의 승천, 종들은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문지기는 베드로(R. A. Cole. “Schreiber”1))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지도하는 교역자들 및 신학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2)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승천으로부터 재림의 때까지의 중간 시기, 즉 교회의 때를 암시하고 있다(M. Henry, 마경일). 그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부여된 권한을 가지고, 위임된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교역자들 및 신학자들은 언제 재림하실지 모르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즉시 영접할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이들 곧 문지기의 또 다른 역할은 그리스도인들을 모든 적들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눅 12:39).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35】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늘 경계해야 할 이유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밤을 삼경으로 나누었던 유대인들과 달리, 로마인들은 사경으로 나누었다. 즉, 저물 때는 오후 6-9시, 밤중은 오후 9-12시 닭 울 때는 오전 0-3시, 새벽은 오전 3-6시를 가리켰다. 이와 같이 마가가 주님의 재림을 밤의 한 때로 가정하는 것은, 가장 예기하게 어려운 때에 발생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마 24:43, 44, 살전 5:2).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순간은 없는 것이다. 매 순간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을 최대한 발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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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하권, p. 278, 주 12.
2) 참조: J. Wesley, M. Henry, W. Hendriksen, J. Gnilka, 하권, p. 278,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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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맡겨진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언제 재림하실지 모르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마 24:44, 45, 살전 5:6).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36】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거듭 경계하시는 말씀이다. 마태복음에는 자기 직무를 충실히 감당한 종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고, 반면에 자기 직무를 유기한 악한 종에게는 징벌이 있고, 또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마 24:44-51).

결론적인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37】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직접적으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안드레(3절)에게 주신 것이나, 실은 그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주신 것이다. 이 원리는 모든 성경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깨어 대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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