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9강 최후의 만찬(4:22-26)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3-01-17 11:39
조회
1542
바. 최후의 만찬<14:22-26>

<비교: 마 26:26-30, 눅 22:15-20, 고전 11:23-25>

불트만(R. Bultmann)은 “마가복음 14:22-25이 제의 전설이라는 사실은 이미 아이히호른(Eichhorn)과 하이트뮐레르(Heitmu\"ller)가 증명한 바가 있다.”1)라고 하지만, 山口 昇은 “이 전승이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임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전승의 형에 있어서는 마가와 마태가 비슷하며, 누가와 고린도전서 11:23-25이 비슷하다. 아마도 마가의 형이 옛 전승에 의한 것 같다.”라고 하였다.

불트만(R. Bultmann)은 “참으로 22-25절이 이미 있던 보도에 삽입된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보도에는 그 자체의 독립적인 서두가 없기 때문이다. 배제된 보도의 단편은 마가에서 아직도 명백히 25절에 보존되고 있다.”2)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317)는 “도입문인 독립 속격(‘그들이 식사하는 중에’)은 앞부분과 연결되는데 이차적인 첨가구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이처럼 사건을 연결시키는 일이 마르코복음에서는 드문 일이므로 이 독립 속격은 앞 단락과 연결시킨 마르코 이전의 편자에게 돌려야 한다.······고린도전서 11:23-26이 이 전승의 독자성을 확증해 준다. 이것이 예수가 넘겨진 밤에 일어난 이야기라면, 이것은 일관성 있는 수난 보도가 이미 전제되었음을 의미하지 않고, 그 사건이 회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성만찬 전승은 연속적인 수난 설화, 적어도 성만찬 전승이 포함된 수난 설화보다는 고대적이다.”라고 하였다.

마가는 이 성만찬 전승을【22】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로 시작한다.

유월절은 여기서 주님 예수의 만찬으로 넘어간다. 유월절 식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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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 332.
2) Ibid., p.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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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옛 것을 대신하게 될 새로운 성찬을 베푸신다. 몇 시간이 지난 후에 피로써 나타내지는―양을 잡아야 하므로―옛 상징은 갈보리에서 흘리신 피로 성취되어 영원히 그 목적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피가 없는 새로운 상징이 옛 것을 대체시키기에 아주 알맞은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유월절과 주님의 만찬을 역사적으로 아주 밀접하게 연결시킴으로써, 처음 것의 본질이 나중 것에서 상실되지 않음을 분명하게 밝혀 주셨다. 둘 다 그분의 백성들의 죄를 위해 유일하면서도 완전하게 희생을 하시는 그분에게 돌려진다”(W. Hendriksen).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는, 일반적으로 가장이나 단체의 장이 공동 식사 때에 하는 태도이다.

“예수는 식사를 시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사하는 동안에 축복의 기도를 한다(율로게사스, εὐλογήσας: ‘감사하다’, ‘찬양하다’의 뜻).······이런 시간 규정은 마르코가 전제하는 유월절 식사에 적합하며, 또한 친교의 식사에도 적합하다. 유월절 식사에는 유월절의 축사 때의 첫 번째 잔, 야채와 과일 잼의 전식(Vorspeise), 두 번째 잔을 곁들인 유월절 예배가 먼저 행해진다. 중심을 이루는 식사 시간은 누룩 없는 빵에 대한 축복으로 시작된다. 이 점에서 이것은 유월절 식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교 식사에서도 전식과 주식이 구별된다. 전식에서는 각자가 찬미를 부르고, 본격적인 식사 공동체는 주식에서 이뤄진다”(J. Gnilka, 하권, p. 321).1)

다음과 같은 축복 기도가 있다. “땅에서 빵이 생겨나게 하신 세상의 왕, 주 우리 하나님이시여, 찬양을 받으소서.”2)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유대교의 식사와 비교해 볼 때, 전혀 새로운 해석이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322)는 “이 말씀은 떡을 떼는 행위에 관련되지 않고, 떼어 낸 빵 조각에 관련된다. 빵을 떼거나 뜯는 것이 상징적으로 난폭한 죽음을 시사하지는 않는다.”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의 목숨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실 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므로(10:45, 마 20:28), 떡을 떼는 행위까지도 관련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고(참조: 요 6:51, 53), “빵을 떼거나 뜯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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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월절 식사에 관해 더욱 자세한 것은 W. Barclay의 주석을 보라.
2) in W. W. Wessel. in W. L. 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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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난폭한 죽음을 상징하는 것”(W. L. Lane, “Klostermann, Jeremias”1))으로 볼 수도 있다.

어떤 학자들(W. Barclay, W. L. Lane, J. Gnilka, 하권, p. 322)은 유월절 식사에서 누룩 없는 빵에 대한 해석은 빵에 대한 축사에서가 아니라, 유월절 예배에서 행해졌으며 해석의 맥락도 달랐다(\\'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에집트에서 먹던 곤궁의 빵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빵(떡)을 직접 자신의 몸, 또는 “자기 자신”(E. Schweizer)과 관련지으신다. 그러므로 식사하는 자들은 식사에서 죽음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과 새로운 친교를 맺게 된다. 이 친교, 즉 “그의 몸을 먹는 자들은 수난을 당한 그리스도와 결합될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과 그 죽음이 베푸는 축복에도 참여하는 것이다”(J. Gnilka, 하권, p. 323).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주시면서 받으라고만 하시고, 자신은 들지 않으신 것이다.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에 대한 기존의 해석과 관련하여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주목할 만한 설명을 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무교병[누룩 없는 빵 또는 떡] 조각이 실제로 자신의 육체와 동일하다고 말씀하셨다거나, 그것이 그 순간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1) 예수님의 몸과 무교병은 분명히 구별되어 존재하고 있었다. 어느 것도 다른 한 편의 것으로 변화되거나, 다른 한 편의 실질적인 특성을 취하지 않았다.

(2) 주께서 공생애 기간에 상징적인 낱말을 매우 자주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8:15, 요 2:19, 3:3, 4:14, 32, 6:51, 53-56, 11:11). 이러한 모든 예에서 주님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언어상의 특징이 처음에 그 말을 들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경시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닌가! 또, 각 경우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잘못되었음은 그 문맥에서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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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하권, p. 322, 주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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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가! 이제는 암시된 교훈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3) 예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 문, 새벽 별, 모퉁이 돌, 어린 양, 샘, 반석 등으로 칭하셨거나, 혹은 사람들에 의해 그와 같이 일컬어지셨다. 또, 그는 자신을 “생명의 떡”(요 6:35, 48), “하늘에서 내려온 떡” (요 6:58)이라고도 하셨다. 그런데 왜 그 떡 조각이 그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어야만 하는가?

그러므로 떼어 낸 떡 조각과 부어주신 포도주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성만찬 안에서 정확하게 암시된다.

“너희가 영원한 죽음을 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를 위하여 나의 몸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어주고 피 흘려서, 너희의 주리고 목마른 영혼들을 나의 십자가에 달린 몸으로 먹이고 길렀고, 나의 흘린 피로 영생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것은 이 떡이 너희 눈앞에서 떼어지고, 이 잔이 너희에게 주어져서 너희가 나를 기념하면서 너희 입으로 먹고 마시는 만큼이나 분명하다”(성찬식의 형식으로, 이것은 개혁교회의 예배 의식에 속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다음 언행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23】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라고 하였다.

유월절 식사에서는 빵에 대한 축사와 “물 탄 붉은 포도주”(W. L. Lane)에 대한 축사 사이에 양고기가 나온다. 그 다음에 유월절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에 세 번째 잔이 나오는데, 이 잔은 ‘축복의 잔’에 해당하는 것이다.1) “보통의 축연에서는 빵을 떼고 나서 잔을 나누기 전에 식사를 한다.······식사가 끝났다고 생각했으므로 감사 기도라는 말을 택했을 수 있다. ‘감사하다’(유카리스테인, εὐχαριστείν)라는 말은 성찬식을 가리킨다는 가정이 그럴 듯하다”(J. Gnilka, 하권, p. 323. 참조: W. W. Wessel).

유월절 식사와 유대의 향연에서 참석자들이 공동의 잔 하나로 마셨는지, 각자의 잔으로 마셨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2) 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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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Barclay, J. Gnilka, 山口 昇, 이상근, W. L. Lane(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2) A. E. Sanner, 山口 昇, 이상근 등은 공동의 잔으로 마셨다고 한다. J. Gnilka(하권, p. 323, 주 27)는 “Dalmann과 Jeremias는 후기의 증인들과 오늘날 베두인인들의 마시는 관습에 근거하여 공동의 잔을 주장한다.”라고 하였다. 또, 그는 “H. Schurmann은 누가복음 22:17을 해석하여, 제자 들이 주어진 잔의 포도주를 서로 나누어서 그들 자신의 잔으로 마셨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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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나눈 빵 조각과의 유비 때문에 후자를 배제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공동의 잔을 성찬식 공동 식사의 표징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참조: 고전 10:16).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겨 강조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이다(마 26:27).

아무튼,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식사에 참여한 것이 결정적인 순간의 실패를 막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J. Gnilka, 하권, p. 324). 성령의 체험이 없는 종교 의식 준수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제자들―가룟 유다는 이미 떠났다(요 13:27, 30)―이 다 마시자마자 예수님이 해석을 해 주신 것에 대해, 마가는【24】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는 이사야 53:11-12에 의존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종의 죽음이 늘 바쳐야 하는 속죄 제물을 지양한 일회적인 속죄로 파악되는 것 같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많은 사람은 “많은 사람”(W. Hendriksen)이라기보다는 모든 사람(J. Calvin, W. W. Wessel, J. Gnilka, 하권, p. 325)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는 출애굽기 24:8의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를 연상하게 한다.

언약은 디아테케스(διαθήκης)이며 ‘증거’, ‘약속’, ‘유언’, ‘계약’, ‘언약’ 등을 의미한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우신 주권과 복종의 관계이며, ‘언약의 피’란 언약의 실재를 확인하는 표적이다. 바로 이것을 통해서 언약은 그 효력을 지니게 된다”(Taylor).1) 옛 언약은 제물의 피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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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W. W. We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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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되었지만(출 24:3-8), 새 언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보혈로 성립되는 것이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옛 언약의 수락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율법을 준수하는 데 의존해 있다는 것을 본다. 만일 율법이 깨지면 언약도 깨지고,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도 깨지고 마는 것이다. 즉, 그것은 전적으로 율법과 율법에 충실하다는 것에 의존한 관계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은 구원의 방도는 아니었다. 구약성경에 있어서 속죄의 방편은 인간의 율법 준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제물의 피를 통한 사랑의 행위이었다(창 3:21, 레 17:11, 슥 9:11 등. 그리고 구약의 속죄 제도). 그것은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나 제물 또는 제물의 피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그림자로서 지시해 주는바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속죄 제물이 되실 그리스도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제는 옛 언약을 대신하는 새 언약이 예수님의 보혈에 근거하여 체결된다. 예수님의 보혈은 옛 언약의 피와 유형론적으로 대립된다. 스가랴 9:11에 의하면, 갇혔던 자들은 ‘이 언약의 피 때문에’ 물 없는 구덩이에서 해방된다. 이와 같이 언약을 수립하면 해방과 구원이 주어진다. 잔에 관한 말씀에서 베풀어진 구원은 보편적인 속죄로서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성서의 이해에 의하면, 피는 생명을 의미하므로 피를 흘리는 것은 죽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죄를 속한다는 의미를 지닌다(레 17:11, 히 9:22. 참조: 엡 1:7). “이 점에서 제공된 잔이 죽으러 가는 주님과의 교제를 허락해 준다는 것이 분명해진다”(J. Gnilka, 하권, p. 324).

그러므로 “새 언약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초석으로 볼 수 있는 열두 제자단에 관련된다. 반면에, 보편적인 속죄는 불신앙에 빠진 사람들과 이방 백성들을 지향한다”(J. Gnilka, 하권, p. 325).

예수님이 이 유월절 식사가 지상에서 마지막 식사라고 매우 엄숙하게 강조하신 것에 대해, 마가는【25】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진실로(아멘, ἀμήν)는 3:28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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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에서 난 것은 유월절에 사용되던 예배식의 기도문의 표현으로 포도나무의 열매인 포도나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뜻하는데, 마시지 아니하리라를 보아 포도주로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1:15의 주석을 보라.)는 여기서는 죽은 후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사는 내세를 의미한다. 그 나라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실 새것은 카이논(καινὸν)이며 시간적인 새것을 뜻하는 네오스(νεός: 2:22, 눅 15:12)와 달리, 질적인 새것을 의미한다(벧후 3:13).

예수님은 그 나라에서 새것으로 제자들과 함께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이 운명한 후에 부활하여 승천하실 것을 아셨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p. 325-326)는 “이로써 현재의 식사는 천상의 완전한 종말론적 식사와 관련되었다. 이 식사가 종말론적 식사를 앞당긴 것은 아니지만 그것의 확실한 도래를 보증한다. 종말론적 식사가 이뤄질 때, 예수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 임박한 하느님의 왕적 통치가 계시된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의 미래의 희망과 부활의 확신을 표현한다.”라고 하였다.

이미 예언자들(사 25:6)과 묵시문학에서 메시아적 구원이 완성된 때가 기쁨의 식사로 서술되었다(에티오피아 에녹 62:14, 에녹서 72:14. 참조: 눅 22:30, 계 19:7). 그 때에 유월절과 성만찬은 모두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예정해 놓은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W. Hendriksen). 그분을 믿고 따르는 신실한 성도들은 그분의 죽음을 통해 이뤄진 이 놀라운 희망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山口 昇은 “나실인의 서원에서 배워서 예수님이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완전히 헌신한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또 일면에 있어서는 나실인은 그 성별의 기간이 지난 후, 규정의 제물을 드리면 다시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 것(민 6:20)처럼, 예수님은 희생 제물로 죽을 뿐만 아니라 서원 기간이 차면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이 온다는 희망을 주고 있다.”라고 설명하지만, 마실 것만 가지고 나실인의 서원과 관련짓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유월절 식사 겸 성만찬을 마친 예수님 일행에 대해, 마가는【26】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니라라고 하였다.

저희가 찬미하고는 유월절 식사에서 네 번째 잔을 든 후에 마지막으로 부르는 할렐시의 후반부(시 115-118편)를 부른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레인(W. L. Lane)은 “경건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식사가 끝난 후에 함께 남아서 여러 시간 동안 하나님의 과거와 미래의 구속 행위에 관하여 깊은 대화를 나누는 관습이 있었다(Tos. Kethubim V. 5). 식탁 교제는 할렐시의 후반부(시 115-118편)를 부름으로써 마쳤다.”라고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감람산으로 나가니라의 감람산은 11:1의 주석을 보라.

예수님은 자신의 처절한 죽음인 십자가를 눈앞에 두시고도 동요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하신 규례와 말씀을 하나하나 이행해 나가신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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