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4강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14:66-72>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3-02-28 10:34
조회
1783
<비교: 마 26:69-75, 눅 22:56-62, 요 18:15-18, 25-27>

베드로의 증언에 근거한 이 단화는 네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다. 본서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근본적으로 동일하여 이렇다 할 모순이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아무런 모순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그 나름의 독특한 배열을 가지고 있다. 특히, 첫 번째의 부인을 분리시켜 대제사장의 심문 앞에 두었다.

마가는 이 단화를【66】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 하나가 와서로 시작한다.

베드로(3:16의 주석을 보라.)가 아래 뜰에 있더니가 마태복음 26:69에는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로 되어 있다. “안뜰을 묘사하는 이런 두 가지 방법은 동방의 궁전이나 부유한 사람의 집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없다. 그런 집에서는 집의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다. 즉, 그 집의 방들은 개방된 안뜰 주위에 빙 둘러 서 있는 형태이다. 육중한 바깥문 혹은―더 정확히 말하면―대문에서 안뜰로 통하는 궁륭 통로가 있다. 이 통로에는 문지기를 위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는데, 작은 방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W. Hendriksen).

베드로가 아래 뜰에 있다고 하면, 예수님은 그 집 위쪽에서 심문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 아래 뜰은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바깥쪽이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안에까지 들어왔다는 것은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 바클레이(W. Barclay)가 잘 설명하고 있다.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폭도들 모두를 혼자서 상대할 것처럼 무모한 용기를 가지고 검을 빼어 들었다. 그리고 난투 속에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 버렸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생각에 따르면, 그는 조용히 뒤로 물러서 있어야만 할 상황이었다. 누구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오리라고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대제사장의 집에 온 것이었다.······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치고 말았으나,1) 한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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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복음 18:16에는 또 한 제자가 문을 지키는 여종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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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쳤던 그는 생각을 돌이켜 멀찍이나마 끌려가는 예수님을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대제사장의 비자가 다른 복음서들에는 ‘대제사장의’가 없이 “비자” 곧 여종으로만 되어 있다. 특히, 요한복음에는 “문 지키는 여종”(18:17)임을 밝혔다.

대제사장의 비자 하나가 와서, 즉 대제사장의 여종이 와서 한 행동에 대해, 마가는【67】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이라고 하였다.

이 여종은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를 자세히 응시하고는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폭로하였다. 웨셀(W. W. Wessel)은 “그녀가 바로 며칠 전에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을 때에 보았거나[R. A. Cole. E. Bickersteth], 혹은 요한의 부탁으로 베드로를 들여보냈던 일(요 18:16)을 기억했을 것이다[W. Hendriksen].”라고 하였다. 전자가 후자보다 더 그럴듯하다.

그 여종이 나사렛 예수라고 한 것을 보아, 예수님을 경멸한 것은 분명하지만(W. W. Wessel, “테일러”,1) 山口 昇), “베드로에 대한 적개심이나 해치려는 뜻에서 말한 것은 아니고, 매우 가볍게 자기의 인상을 표시한 데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베드로의 모든 약점을 폭로하는 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마경일). 감춰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마 10:26). 그렇게 될 경우에 인간의 용기가 얼마나 쉽게 겁약으로 바뀌는지 모른다.

잔뜩 겁에 질려 도저히 침묵하고 있을 수 없었던 베드로에 대해, 마가는【68】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 쌔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는 그 여종에게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라고 강조하여 거짓말을 하였다.2) “주를 위하여 내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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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山口 昇.
2) M. Shebuoth, VII. 3‧6: 랍비 문헌과의 유비가 이 문구의 의미를 밝혀 줄지도 모른다. 거기서는 소를 훔친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내 황소가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에 “나는 네가 하는 말을 모른다.”라고 대답한다(in J. Gnilka, 하권, p. 385, 주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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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버리겠나이다”(요 13:37 후반), 또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14:31)라고 한 큰소리는 간 곳이 없다. 도망쳐 버린 다른 제자들도 별로 나을 것이 없다. 그들 역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 14:31)라고 큰소리를 쳤었다.

본서에만 있는 깨닫지도 못하겠노라는 반복 강조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달만(Dalmann)은 “이 때 베드로가 갈릴리의 사투리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1)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말로만 방어한 것이 아니라, 앞뜰로 곧 대문 쪽으로(마 26:71) 몸을 피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구절(68절) 끝에 “그리고 닭이 울더라”(καὶ ἀλέκτωρ ἐφωνησεν)로 되어 있는 사본들(A, C, D, K, א, Δ, Θ, Π 등)이 있으나, 보다 더 가치 있는 사본들(X, B, L, W, Ψ 등)2)에는 없으므로 현대의 많은 해석자들과 주석가들은 생략하였다. 그러나 “테일러와 크랜필드”,3) 그리고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원래는 있었는데, 14:68과의 조화를 위해 생략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로서는 정확한 것을 알 수 없다.

앞뜰로 피해 나간 베드로가 거의 같은 일을 또 당한 것에 대해, 마가는【69】비자가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 하되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26:71에는 “다른 비자”로, 누가복음 22:58에는 “다른 사람”으로, 요한복음 18:25에는 “사람들”로 되어 있다. 특히, 요한복음에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이에 상당한 간격을 두고 있다.

이 구절의 비자에 대해 (1) 67절의 비자와 동일인이라는 설,4) (2)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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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이상근.
2) in K. Aland, et al., ed.
3) in 山口 昇.
4) W. W. Wessel, A. E. Sanner, W. L. Lane, E. Schweizer, F. C. Grant, J. Gnilka, 하권, p. 386,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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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가지의 전설이 있었다는 설(黑崎幸吉, 마경일), (3) 다른 비자라는 설1) 등이 있다.
(3)설을 주장하는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점에서 마가와 마태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들이 보는 바에 따르면, 마가의 설명에서는 여자 문지기가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마가복음 14:69은 읽기에 따라서는 그런 불일치가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솔직히 시인되어야 할 것이다. 그 구절은 “그리고 그 비자(바로 조금 전에 언급되었던)가 그를 보고 둘러선 사람들에게 다시 ‘이 사람은 그 당이라’라고 말했다.”라고 하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면, 마가의 기록이 더 이상해진다. 그 이유는 마가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소녀는 아직 둘러선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마가는 그 소녀가 그들에게 다시 이르되라고 할 수 있었는가? 이와 같이 이 구절을 동일한 비자의 이야기로 이해하면, 더 큰 모순과 불필요한 문제를 만드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전체 기록에서 볼 때, 마가가 단 한 명의 비자만을 언급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그렇게도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인가?

마태는 “한 비자가······다른 비자가”라고 말함으로써, 이 이야기 속에는 두 명의 비자의 말이 보고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지만, 마가는 소녀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함으로써, 즉 “대제사장의 비자들 중의 하나가 와서······가로되”(66, 67절)라고 말함으로써 “다른 비자가 가로되······”라는 자연스러운 한(이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귀결을 제시하며, 따라서 마태와 똑같은 사실을 표시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마가가 계속해서 “(베드로가) 앞뜰로 나갈새 비자가 그를 보고”라고 한 해석은, ‘거기에 있던 비자가 그를 보고’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다시(팔린, πάλιν) 대신에 ‘뒤따라서’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 어쨌든, 여기서도 복음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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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eyer”(in H. Alford), W. Hendriksen, H. Alford, D. W. Burd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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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의 불일치가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헨드릭슨(W. Hendriksen)의 설명에다 또 다른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67절에서 이미 비자가 불을 쬐는 베드로를 주목했다고 했으므로, 69절의 “비자가 그를 보고”는 다른 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더욱이, 이때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앞뜰로 나갔을 때(“나갈새”는 과거형인 엑셀텐, ἐξήλθεν으로 되어 있다.)이었다.

아무튼, “베드로를 예수님이 이끄시는 무리 내지는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자로 인식하고 있는바 이 사람은 그 당이라”(W. W. Wessel)라는 말은 베드로에게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곁에 서 있는 자들인 대제사장의 보수를 받는 경비원들 및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겁에 질린 베드로에게는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두려움을 더욱 증대시킬 뿐이었다.

그런 베드로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70】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라고 하였다.

부인하더라는 미완료 시제인 에르네이토(ἠρνείτο)이며, 베드로의 반응이 지속적인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마태복음에는 이 두 번째 부인에 맹세가 수반되었다.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는 누가복음에는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22:59)로 되어 있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알 길이 없다.

공격자들 중 한 사람은 베드로의 검에 귀가 떨어졌었던 말고의 친족이었다(요 18:26). 그들은 베드로에게 갈릴리 말씨1)를 쓰는 것을 보니까 예수의 당이라고 하였다(마 26:73). “예수의 첫 제자들이 갈릴리 사람들이었으므로, 예수의 운동이 갈릴리 운동으로 간주되었다”(J. Gnilka, 하권, p. 386).

아무튼, 베드로는 사면초가가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임을 당당하게 고백하고 나서든지, 아니면 그들 모두가 자신의 거짓말을 믿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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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L. Lane: 갈릴리 사람들은 셈어에서 아주 중요한 여러 가지의 후음들을 구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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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 더욱더 강력하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불행히도 베드로가 후자를 택한 것에 대해서, 마가는【71】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고 하였다.

베드로의 세 번째 부인은 단순한 부정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맹세에 저주까지 가미함으로써 가장 강력하게 스승을 알지 못한다고 부정한 것이다.

저주하며는 아나테마티제인(ἀναθεματίζειν)이며, {“히브리어로는 케렘(cherem)인데, ‘인간의 소유나 용도에서 제외된 것’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단절된 어떤 것’과 같은 개념이다”(R. C. H. Lenski). 흠정역(AV)에서는 ‘저주받은’ 또는 ‘저주받은 것’ 그리고 ‘빛의 왕국으로부터의 파문’ 등의 뜻으로 번역되었다. 구약성경의 번역자들은 이 낱말을 ‘멸망을 위해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지시하는 데 사용하였다.}(롬 9:3의 주석).

여기에 저주의 대상이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이 저주를 예수님과 관련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1) 그러나 그닐카(J. Gnilka, 하권, pp. 386-387)는 “예수를 저주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이 형벌을 모면할 수 있었던 후대의 교회사의 상황이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저주는 말하는 사람들에게 향하거나 자기 저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 베드로는 맹세를 함으로써 하느님을 증인으로 세운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한 내용은 ‘이 사람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끊을 때에 사용하는 표현이다. 라삐들은 이 표현을 파문하는 데 사용했다(참조: 마 7:23).”라고 주장하였다. 헨드릭슨(W. Hendriksen), 레인(W. L. Lane), 웨셀(W. W. Wessel), 그리고 山口 昇 등도 저주하며의 대상이 예수님이 아니라 베드로 자신이었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이름을 기피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리임을 부인했던 앞의 두 번의 경우와는 달리, 이번에는 예수님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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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하권, p.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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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부인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정말 믿을 것이 못 된다. 한때는 “주는 그리스도이시니이다”(8:29)라고 고백한 그 입술로, 이제는 그냥 부인하다 못해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한 것이다. “하나의 거짓은 제 이의 거짓을 낳는다”(黑崎幸吉). 그리고 제 이의 거짓은 으레 처음의 거짓을 믿게 하기 위한 목적 때문에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최초에 바로 서는 일이 큰 실패를 저지르지 않는 중요한 거점이 된다”(마경일).

베드로의 실패는 마태복음 10:33의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참조: 8:38, 눅 12:9)라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 모른다.

어드만(C. R. Erdman)은 “이 위대한 사도에게 조소의 손가락질을 하기는 쉬우나, 이만 못한 시련에도 비겁과 허위와 분노로 말미암아 말과 행동으로 주님을 참으로 부인하지 않는 신자가 드물다.”라고 하였다. 바클레이(W. Barclay)는 “베드로는 만용을 가진 자만이 빠질 수 있는 유혹에 빠졌다.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결코 베드로와 같은 유혹마저 받아 보지 못한, 타산적이며 자신의 안전만 추구하는 데 급급한 사람들이 베드로의 실패를 비난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누구에게나 극한점이 있다. 베드로는 자기의 극한점까지 도달하였다. 그러나 천 사람이면 구백 구십 구 명이 자신의 극한점보다 훨씬 못 미치는 곳까지밖에는 도달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사실상, 우리의 생활 속에서 가장 먼저 부인되는 이가 바로 주님이시며, 제일 먼저 부인되는 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베드로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보이시는 주님 예수께서는 그가 가장 강력하게 부인했을 때에 그를 구할 일을 시작하셨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자신의 주권적인 섭리로 모든 일을 지배하시는―닭 울음까지도―주께서 그의 무한한 자비로 베드로를 구하시려고 일을 시작하신다.”라고 하였다.

닭이 우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72】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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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라고 하였다.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는 본서만이 밝히고 있다.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의 기억되어 생각하고는 에피발렌(ἐπιβαλών)인데,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즉, ‘머리를 덮다’, ‘외투를 얼굴까지 끌어올리다’, ‘밖으로 뛰어나가다’, ‘몸을 땅에 내던지다’, ‘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감추다’, ‘회상되다’ 등이다. 전후 문맥상 개역 한글 성경이 원래의 의미를 잘 살린 것 같다.

베드로는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또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치자(눅 22:61)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14:30, 마 26:34)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 그는 자신의 비열과 겁약과 무력함을 발견하고, 수치와 회한과 철저한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마가는 단순히 울었더라라고 했지만, 마태와 누가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로 표현하여, 그의 회개의 철저함을 나타내고 있다. 페러(Farrar)는 “새벽을 맞이하기 위한 통곡이었다.”1)라고 하였고, 웨셀(W. W. Wessel)은 “그는 그리스도인이 핍박에 못 이겨 예수님을 부인한다 할지라도, 다시 회개하고 용서받아 새롭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항상 열려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를 격려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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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이상근.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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