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5강 빌라도의 재판(15:1-15 1-7)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3-03-08 10:07
조회
2237
타. 빌라도의 재판<15:1-15>

<비교: 마 27:1-2, 11-14, 눅 23:1-5, 13-25, 요 18:28-37>

가.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긴 유대 교권자들(15:1-7)


그닐카(J. Gnilka, 하권, p. 381)는 “현재의 본문에서는 예수가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고 그 와중에 바라빠가 끼어드는데, 전체 문단은 상호 연결되어 통일을 이루고 있다.”라고 하면서, “벨하우젠, 로마이어, 수낙켄부르크”,1) 바클레이(W. Barclay), 산너(A. E. Sanner) 등이 한 것처럼 5절 다음에 문단을 끊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한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1절과 2-15절로 구분하였다. 널리 알려진 판단에 의하면 2절은 이차적으로 첨가된 것이다.2) 불트만(R. Bultmann)은 “바라바 삽화는 전설적 확대임이 명백하나, 그 선을 아주 정확히 그을 수는 없다(대개 6-15절).”3)라고 하였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유대의 종교 재판에서 로마의 사회 재판으로 옮겨진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유대의 공회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유대의 교권자들은 빌라도의 힘을 빌려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한 것이다.

마가는 이 이야기를【1】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넘겨주니로 시작한다.

대제사장들은 8:31의 주석을 보고, 장로들은 8:31의 주석과 11:27의 주석을 보고, 서기관들은 1:22의 주석을 보라. 그들로 구성된 공회는 8:31의 주석을 보라.

새벽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번역이 가능하다. 한 가지는, 대제사장들이 회의를 개최했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결의를 했다는 것이다.4) 첫 번째 번역을 택하면, 새벽에 새로 소집된 공회(산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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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하권, p. 381.
2) R. Bultmann, op. cit., p. 343. “Linnemann 134f. Dormeyer, Passion, 175f”(in J. Gnilka, 하권, p. 391, 주 2).
3) R. Bultmann, op. cit., p. 343.
4) “세 가지 변형구가 있다. συμβούμιον ἑτοιμάσαντες”(א, C), ποιήσαντες(B. Koine-Text), 또는 ἐποίησαν(D, Θ).”(in J. Gnilka, 하권, p. 394, 주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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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회의에 관한 표상이 주어지는데, 이것은 새벽 회의에 관해 보도하는 누가복음 23:1에 가깝게 된다. 누가는 공회의 야간 회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394)는 “베드로 설화를 산헤드린 심문과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해 놓은 마르코는 4:65에서 제쳐놓았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그는 회의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결의를 했다.’라는 번역을 택해야 한다. 이 결의는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주는 일에만 관련되어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로 웨셀(W. W. Wessel)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헨드릭슨(W. Hendriksen)은 “휴식 후에 새벽 일찍 공회를 연 것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행위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라고 주장하였다. 빅켈스테트(E. Bickersteth), 黑崎幸吉, 山口 昇, 마경일 님, 이상근 님도 같은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학자들도 단순한 의논이 아니라 결의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참조: 10:33).

공회원들은 사형 집행에는 총독의 최후 결정이 필요했으므로,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써 예수님의 수난 예고(9:31, 10:33)는 성취된다. 예수님은 이방 민족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백성들에게서 배척받으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신성모독죄와 같은 종교적 죄는 로마의 법이 형벌할 범죄 중 하나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왔을 때, 로마에 대한 정치적 혐의자로 고발하였다. 누가만이 밝힌 고소의 내용은, 첫째는 유대 백성들을 미혹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한다는 것이고, 셋째는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한다는 것이다(눅 23:2). 그러한 그들에 대해서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59:7-8)라고 예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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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28에는, 예수님이 총독의 숙소나 관정에 끌려가셨다고 한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그 곳은 성전 구역 북서쪽 모퉁이에 있는 안토니아의 성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빌라도는 주로 가이사랴에 머물렀지만, 수비대(15:16)와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 성채에도 처소가 있었다. 유월절, 즉 정치적으로 위험하게 여겨지는 시기에, 빌라도는 아무런 소요가 없이 평화가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에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매의 제 5대 총독으로서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 밑에서 26년부터 36년까지 통치하였다. 그는 로마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유력한 인물이자 반 유대적 인물로 알려진 세야누스(Seianus)의 친구였으므로, 그도 역시 반 유대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필로(Philo)는 아그립바 1세가 칼리굴라(Caligula)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여, 그를 “강팍하고 무자비하며 완고한” 사람, 즉 재판도 하지 않은 채로 처형을 계속했으며, 잔인한 짓을 많이 저지른 사람이라고 했는가 하면, 또한 뇌물을 좋아하고 무례하며 난폭하고 강탈을 일삼는 사람이라고도 하였다. 반면에, 콥트(Copts: 애굽의 기독교인들)나 아비시니아인들(Abyssinians)은 그를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는다.

복음서를 통해 보면, 그는 교만하고(요 19:10) 잔인하였다(눅 13:1). 자기 앞에 선 예수님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보여 준 것처럼, 무엇보다도 그는 항상 황제의 신임을 얻고자 하는 이기주의자요 기회주의자였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동정심이라곤 조금치도 남아 있지 않았고, 정의감도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반대의 면모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도 있기는 하다.

확실한 한 가지는, 그가 유대인과 로마 정복자 사이의 긴장 관계의 미묘한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별로 상식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유대인을 괴롭히는 일을 즐긴 것 같다. 성전 보물을 수도세로 사용하는가 하면, 로마의 도량형을 예루살렘에 끌어들이고, 심지어는 로마 신들의 형상과 이름이 새겨진 황금 방패로 성전을 더럽히기까지 하였다.

그처럼 정치적 역량이 모자라는 빌라도가 공직에서 물러나게 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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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은, 모세가 그리심 산에 묻어 놓았다고 하는 거룩한 그릇을 찾기 위해 한 거짓 선지자의 지도 아래 그 산에 올라가려고 하는 광신자들을 해친 데 있었다. 빌라도의 기병대는 그들을 공격하여 많은 사람을 죽였다. 결국 그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불평으로 공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비난들에 답변하기 위해 로마를 향해 출발했으나, 로마에 도착하기도 전에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는 죽고 말았다.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나, 유세비우스(Eusebius)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빌라도는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강요당했다고 한다.

아무튼, 빌라도의 죄가 크긴 하지만,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나 그의 사위인 대제사장 가야바의 죄만큼 크지는 않다(참조: 요 19:1).1)

{“빌라도 총독의 아내인 프로클라(Claudia Procla)는 숨은 제자였으며, 희랍 정교회에서는 그녀를 성도로서 성열(聖列)시키고 있다”(이상근).}(요 18:29의 주석).

빌라도의 심문에 대해, 마가는【2】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라고 하였다.

빌라도 총독은 앞에 선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다. 이 빌라도의 질문은 네 복음서들에 다 나온다(마 27:11, 눅 23:3, 요 18:33). 빌라도가 그 질문을 한 것은 유대의 공회가 그리스도임을 시인하신 예수님(마 26:63-64)을 빌라도 총독에게는 로마 황제를 대적하는 왕을 자처한 자로 고소했기 때문이었다(눅 23:2).

그닐카(J. Gnilka, 하권, p. 395)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질문은 14:61과 일치하며, 따라서 풍자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헨드릭슨(W. Hendriksen), 고울드(E. P. Gould), 로마이어(Lohmeyer),2) 黑崎幸吉 등의 견해는 다르다. 특히,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정말 가소롭구나!”라고 해석하였다. 식민 통치국인 로마가 세운 총독인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이냐고 질문한 것은 진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비아냥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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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W. Hendriksen, J. Gnilka, 하권, p. 395.
2)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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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는 단순한 이인칭이 아니라 강조형 이인칭이다(E. P. Gould, W. Hendriksen). 사실상, 이 질문에 이르기까지 유대 교권자들인 공회원들과 빌라도 사이에 실랑이질이 있었다(요 18:28-32).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대제사장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유대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금하고, 왕 그리스도라고 자칭한다고 고소한 것이다(눅 23:2).

그닐카(J. Gnilka, pp. 395-396)는 “유다교의 메시아적 칭호는 이스라엘의 왕(참조: 막 15:32, 요 1:50), 또는 유다의 왕이라 일컬어졌다. 예수님이 비유다인들(빌라도, 동방 박사들)에 의해서만 유다인의 왕으로 불린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비유다인은 유다인의 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유다교적 메시아 기대를 자신에게 적합하게, 그리고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이 유다교적 기대는 우선 정치적 성격을 지닌다. 유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수십 년 동안 왕의 신분을 자처하면서 로마 점령군에 대한 공격을 시도한 (메시아) 참칭자들이 거듭 출현하였다.1) 이런 배경은 유다인의 왕이라는 명칭의 위험성을 밝혀 준다.”라고 하였다.

네 말이 옳도다는 수 레게이스(Σὺ λέγεις)인데, ‘네가 그렇게 말한다.’로 번역하여 (1) 부정한 것이라고 하는 설(페쉬),2) (2) 긍정한 것도 아니고 부정한 것도 아니라고 하는 설,3) (3) ‘네가 말한 그대로다.’로 번역하여 긍정한 것이라고 하는 설4) 등이 있다.

마태복음 26:25과 요한복음 18:36-37이 서로 다른 두 가지 경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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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유다라는 사람이 “왕의 지위를 노렸다.”(Jos. Ant. 17, 272). 헤롯 대왕의 종 시몬이 왕관을 차지하려 했으며, “왕으로서 인사를 받으려 했다”(Ant. 17, 273f). 목자인 안쓰로가이오스(Anthrongaios)는 왕위를 노리다가 “왕권을 장악하여 오랫동안 왕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Ant. 2, 60-62).
2) in J. Gnilka, 하권, p. 396, 주 21.
3) W. Barclay, E. Schweizer, R. Earle, J. Gnilka, 하권, p. 396.
4) M. Henry, E. P. Gould, F. J. Dake,W. Hendriksen, E. Bickersteth, D. W. Burdick, C. E. G. Swift, R. A. Cole. W. W. Wessel, A. E. Sanner, W. L. Lane, R. P. Martin, J. D. Stevens,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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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양쪽 다 예수님의 답변이 하나의 증언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해 준다는 점을 보아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긍정은 빌라도의 질문 속에 담긴 정치적 의미의 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교적 의미의 왕임을 시인한 것이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진리를 증언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바 진리의 왕국에 속한 왕이라고 하였다(요 18:36-37).

빌라도는 예수님의 대답의 속뜻을 깨달은 것은 아니었지만(요 18:38), 아무튼 예수님이 로마 정부에 대한 정치적 반역자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일단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눅 23:5. 참조: 요 19:4)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본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공회원들의 반응에 대해서, 마가는【3】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하는지라라고 하였다.
그들의 고소 내용에 대해 마가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누가는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눅 23:5. 참조: 눅 23:3)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편에 보면, 고난받는 의인도 부당한 고발을 당하면서 기도한다.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무고히 나를 공격하였나이다.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109:3-4. 참조: 37:12).

예수님은 그들의 무수한 위증에 대해 한마디도 변명하시지 않고, 계속 침묵하셨다. 이 점을 기이하게 여긴 빌라도가 또다시 예수님께 질문한 것에 대해, 마가는【4】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라고 하였다.

아마도 빌라도는 예수님이 변명하기를 은근히 바랐던 것 같다. 마경일 님은 “그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볼 때, 유대인들의 고소가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암암리에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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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앞서 유대인의 법정에서 침묵하신(14:60-61, 마 26:62)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셨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5】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라고 하였다.

기이히 여기더라는 타위마제인(θαυμάζειν)이며 ‘경탄과 놀라움의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396)는 “다른 대목에서 반복되는 빌라도의 놀람(15:44)은 심리학적 반응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비상한 것, 신적인 것을 시사한다(참조: 5:20).”라고 하였다.

아마도 예수님은 자신의 무죄를 알면서도 종교적 시기심과 영적 무지로 사형 선고를 내린 유대 공회와 무죄인 줄 알면서도 정치적 이해 관계로 유대의 교권자들의 눈치를 살피는 빌라도 총독 앞에서 변명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다. 보다 더 자신에 대한 예언을 성취코자 하신 것 같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예수님이 침묵하신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측하고 있다.
(1) 예언을 성취하시고자 입을 열지 않으셨을 것이다(사 42:1, 53:7, 57:15, 슥 9:9). 이 점이 가장 그럴듯한 이유일 것이다.
(2) 이미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 선언한(요 18:38. 참조: 눅 23:4) 빌라도 앞에서 더 이상 대답하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이다.
(3) 유대 교권자들도 자기들이 위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러므로 더 이상의 답변이 필요 없으셨을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침묵은 웅변 이상의 웅변이었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사실상, 그 침묵은 예수님을 괴롭히는 자들에 대한 정죄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자신이 무죄임을 변명하시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놀란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줄 궁리를 하였다. 이 사실에 대해서, 마가는【6】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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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죄수를 놓아주는 전례에 관한 기록은 다른 복음서(27:15, 눅 23:17, 요 18:39)에도 있다. 불트만(R. Bultmann)은 마가복음 15:6 이하를 전설적 확대로 보고 있으나1) 실제로 행해진 관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레인(W. L. Lane)은 “로마의 법에는 두 가지 형태의 사면, 즉 아직 선고받지 않은 죄수를 사면하는 일과 이미 선고받은 죄수를 사면하는 일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테일러(Taylor, p. 580)와 레인(W. L. Lane)과 웨셀(W. W. Wessel)은 백성의 요구에 따라 로마의 관리가 죄수를 석방한 예로 파피루스 플로렌티누스(the papyrus florentinus) 61, 59를 들고 있다. 그 내용은 로마의 애굽 총독인 셉티무스 베게투스(G. Septimus Vegetus)가 채권자와 그 집의 여인들을 감금했던 피고인 피비온(Phibion)에게, “너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짓을 했지만, 나는 너를 네 백성에게 돌려준다.”라고 한 것이다.

웨셀(W. W. Wessel)은 “이러한 관습은 로마의 관습이었으므로 팔레스틴에서도 잘 지켜졌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레인(W. L. Lane)은 “1세기에 예루살렘에서는 유월절에 한 명, 혹은 여러 명의 죄수를 놓아주는 관습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山口 昇은 “빌라도가 보신하기 위해서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라고 하였다.

빌라도는 그러한 전례를 핑계삼아 예수님을 놓아주고 골치 아픈 문제에서 손을 떼고 싶었을 것이다.

명절 사면에 있어서 빌라도의 의중에 있던 또 한 사람에 대해, 마가는【7】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라고 하였다.

바라바(Βαρββάν)는 א, A, B, D, K, L, W, Δ, Π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Θ, ƒ1사본 등에는 ’Ιησούν Βαρββάν2)(예수 바라바)으로 되어 예수님과 동명 이인임을 나타내고 있다. 보다 더 가치 있는 많은 사본들의 기록인 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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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 343.
2) in K. Aland, et al., 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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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바(Βαρββάς)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당시의 유대 세계에 흔한 이름이었다. 고울드(E. P. Gould)는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정치범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영웅적 애국자이었다.”라고 하였다. 특히, 그는 반란 중에 살인도 하였다. 분명히 바라바와 함께 감금되어 있었던 다른 반란자들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으므로, 바라바는 이 무리의 지도자로 보인다(J. Gnilka, 하권, p. 397, W. W. Wessel, W. L. Lane). 그러한 의미에서 바라바는 유명한 죄수이었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1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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