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5강 향유를 부음 받으심(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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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창
작성일
2012-12-21 00:00
조회
1403
나. 향유를 부음 받으심<14:3-9>

<비교: 마 26:6-13, 눅 7:36-50, 요 12:1-8>

지금까지의 전승사적 분석들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서로 다른 결과들을 초래하였다. “도르마이어(Dormeyer)와 쉥크(Schenk)는 가난한 자의 문제(7절)가 마르코의 편집에 의해 삽입되었다고 보는데 반하여, 쉥케(Schenke)에 의하면 그것은 마르코 이전의 편자에 의해 삽입된 것이[라고 한]다”(J. Gnilka, 하권, p. 293).

불트만(R. Bultmann)은 “디벨리우스(Dibelius)와 함께 나는 7절을 핵심으로 보며, 8절에서는 단지 ‘저가 힘을 다하여’만을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그 외에 8절 이하는 이 부분을 이미 7절이 시사할 수 있었던 수난사에 소속시키는 이차적인 첨가문이다.”1)라고 하였다. 클로스테르만(Klostermann)과 로마이어(Lohmeyer) 역시 8절과 9절을 각이한 첨가문으로 보았다.2)

그러나 예레미아스(Jeremias)는 8절을 이 부분에 원래부터 있던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자선’과 ‘사랑의 일’의 랍비적 구별을 토대로 하고 있는데, 8절은 ‘좋은 일’을 ‘장사 준비’라는 ‘사랑의 일’로 해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9절을 헬레니즘적 첨가문이라고 설명했으나, 나중에는 팔레스틴적인 것으로, 그리고 이 부분의 원래의 결어로 보려고 한다.3) “그러나 페쉬에 의하면, 마르코는 편집적인 개정 없이 받아들였[다고 한]다”(J. Gnilka, 하권, p. 293).
이 단화는 병행 단화인 마태복음 26:6-13 외에도 누가복음 7:36-50과 요한복음 12:1-8의 내용과 비교될 만하다. 이 단화와 마태복음의 기사는 거의 같으므로 문제가 없고, 요한복음의 기사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시기적으로 보아 같은 사건으로 인정된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복음의 기사로, 이것까지 같은 사건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으나,4)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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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 43.
2) Ibid., 주 38.
3) Ibid.
4) “Chrysostom, Hengestenberg, Ewald, Bleek 등0”(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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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의 학자들1)은 비슷한 다른 사건으로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건의 시기에 대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유월절 이틀 전이라고 하는데, 요한복음에는 유월절 엿새 전이라고 하였으므로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아직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유월절 이틀 전(마 26:2, 막 14:1)이라는 시기는, 유대 교권자들이 예수님을 궤계로 잡아죽일 방책을 구하면서도 명절에 민요가 날까 두려워서 실행하지 못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 사건(막 14:3-9)은 유월절 엿새 전에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그럴듯하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마가는 사건들의 시간적인 순서보다도 신학적인 의미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여기서 예수께 값비싼 향유를 부었던 마리아의 사랑 및 헌신의 행위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사악함 및 가룟 유다의 배반(막 14:1-2, 10-11)을 대조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웨셀(W. W. Wessel)도 같은 견해를 말한다.

마가는 이 단화를【3】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로 시작한다.

베다니는 11:1의 주석을 보라.

문둥병 곧 나병은 성경과 유대교에서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아주 불행한 재액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었다. 레위기 13-14장과 미쉬나 단편 네가임(Negaim)은 문둥병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자로 간주되었다(민 12:12). 실상, 이 병의 치유는 죽은 자의 소생과 같이 어려운 것이었다.

문둥이 곧 나환자는 부정한 자로 규정되었으며, 따라서 사회에서 격리되었다. 레위기 13:45-46에 의하면, 나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서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아야만 하였다. {예수님의 시대에 나환자는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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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Calvin, J. A. Bengel, H. Alford, “Meyer, Westcott, Bernard, Farrar, Bruce, Plummer 등0”(in 이상근), R. Earle, E. P. Gould, R. A. Cole, D. W. Burdick, R. McL. Wilson, W. Hendriksen, W. W. Wessel, 黑崎幸吉, J. Gnilka, 하권, p.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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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도시들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격리 규정이 있었다. 그들은 다른 지역들에 머물 수는 있었지만, 거주지 밖에서 홀로 살아야만 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과의 접촉은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랍비 신학은 나병을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간주했으므로, 나환자는 저주받은 죄인으로 취급되었다. 여기에 나환자의 또 다른 고뇌, 즉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었다는 고통스런 자의식이 있었다.

나병에서 완쾌된 사람은 그 사실에 대해 제사장에게서 확증을 받아야만 일반인과 같이 생활할 수 있었다. 제사장의 확증을 받는 데는 제물이 결부되므로, 확증을 받는 곳은 예루살렘 성전 외에는 없었다.

특기할 사실은 성경에서 말하는 나병에는 진성 나병이 아닌 경미한 피부병도 포함되었다는 점이다(레 13:47, 14:34).}(마 8:1의 주석).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나병을 고침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시몬1)이 그 은혜에 감사하여 예수님의 일행을 위해 벌인 잔치에서 식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특히, 빅켈스테트(E. Bickersteth)와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잔치의 동기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께 대한 감사라는 추측까지 덧붙이고 있다.

바클레이(W. Barclay)는 “팔레스틴 사람들은 식사를 앉아서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낮고 긴 의자에 옆으로 비스듬히 누웠다. 그들은 왼쪽 팔꿈치를 의지하여 긴 의자에 누운 채, 오른손을 사용하여 음식을 먹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누워서 식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서 있을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헨리(M. Henry)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주변의 어떤 친구들로부터 고독한 담을 쌓지 않고, 평소와 같이 자유롭게 지내셨다.”라고 하였다.

한 여자가는 마르다와 나사로의 동기간인 마리아이다(요 12:3).2) 슈바이처(E. Schweizer)는 “남자들이 식사를 하는 자리에 들어온 것은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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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 E. Sanner, W. W. Wessel, 米田豊, 黑崎幸吉, 山口 昇, 이상근, 마경일.
2) E. Bickersteth, C. R. Erdman, W. W. Wessel, W. Hendriksen, D. W. Burdick, J. D. Stevens, R. A. Cole, 黑崎幸吉,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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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관습에 맞지 않는다.”라고 하나, 시골에서는 남자들과 여자들을 사회적으로 그다지 엄격하게 분리하지 않았다(로마이어).1)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의 순전한(피스티케스, πιστικής)에 대해 (1) 향유의 산지명이라는 설(“Augustine”,2) J. A. Bengel), (2) 라틴어 spicatus(감송류의 나무 이름)를 헬라어로 옮겨 쓴 것이라는 설(Westein, Grotius, AV),3) (3) 피오(πίω: ‘마시다’)에서 온 낱말로 ‘가지고 다니는 액체’의 뜻이라는 설(Fritzsche),4) (4) 피스토스(πιστός: ‘진짜’, ‘순수한 것’)에서 온 낱말로 ‘순수한’의 뜻이라는 설5) 등0이 있다.

대다수 학자들의 견해인 (4)설이 가장 그럴듯하다. “당시에 어떤 상인들은 향유에 포도주를 섞어서 팔았다고 한다”(이상근).

나드(νάρδου)는 히말라야의 보탄과 네팔 산중 그리고 인도에서 나는 감송향의 뿌리에서 짜낸 고귀한 향유이다. 나드 향유는 “가보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물려질”(W. L. Lane) 정도로 귀하고 값비싼 것이므로, 주로 귀인들이 사용하였다.

옥합(알라바스트론, ἀλάβαστρον)은 결이 매우 훌륭한 석고로 된 흰색 단지이다. 이 옥합에는 많은 양의 나드 향유가 들어 있었다(요 12:3).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는 아마 옥합의 목 부분을 깨뜨렸을 것이고, 그런 다음에 속에 들어 있던 나드 향유 전부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렸다는 뜻이다.

유대에서는 잔칫집에서 손님에게 기름을 부어 주거나(시 23:5, 141:5, 눅 7:46), “귀인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는 관습이 있었으며”(米田豊, 山口 昇), 특히 제사장이나 왕의 취임식 때에 그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삼상 10:1, 왕하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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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하권, p. 295, 주 14.
2) in 이상근.
3) 상동.
4) 상동.
5) “Theophylact, Meyer, Vincent, RSV”(in 이상근), E. P. Gould, R. Earle, W. Hendriksen, J. Gnilka, 하권, p. 295, 黑崎幸吉, 山口 昇,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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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리아의 경우에는 손님에 대한 환대인 것 같거나(山口 昇) 장례를 치르기 위한 것이나(J. Gnilka, p. 295, 米田豊) 메시아로서의 왕의 즉위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에서 비롯된 전적인 헌신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 여인은 그 고귀하고 값비싼 나드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께 부어드린 것이다. 요한복음 12:3에는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옥합에 담긴 나드 향유가 충분한 양이었으므로 머리와 발에도 부어 드렸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몇 사람이 여인의 행위에 대해 불평하며 향유를 낭비한다고 하였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4】어떤 사람들이 분 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다(마 26:8). 특히, 제자단의 회계직을 맡은 가룟 유다(요 12:4)는 더욱 심하게 화를 내면서 대단한 낭비라고 비난하였다.

분 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라고 한 책망은,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어진 값비싼 나드 향유만 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제자들은 영적 사고는커녕, 아직도 물질 위주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에는 자기들이 하지 않는바 남이 하는 아름답고 선한 일에 대해 비난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들이 있다.

그 제자들이 재빨리 향유의 값을 계산해 보고 나서 그 여인을 책망한 것에 대해, 마가는【5】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라고 하였다.

제자들은 향유가 삼백 데나리온(요 12:5), 또는 그 이상(5절)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삼백 ‘데나리온’(6:37의 주석을 보라.) 이상의 돈이라면, 거의 일 년 동안의 품삯에 해당하는 막대한 액수이다. 제자들이 그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할 만도 하였다.

여기서 제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언급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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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유월절 주간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마리아의 행동만 보고, 그녀의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감사를 읽지 못하고, 또한 제자로서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들은 아직도 신령한 사람이 못되고 물질 지향적인 사람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고귀한 헌신에 대해 천박한 비난을 하는 제자들을 보신 예수님에 대해, 마가는【6】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여인을 칭찬하는 동시에 제자들의 몰지각을 나무라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의 머리와 발에 나드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은 마리아를 비난하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마리아의 마음속의 사랑과 감사를 읽으셨던 것이다. 실로 사랑과 감사에는 낭비가 있을 수 없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의 좋은 일(καλὸν ἔργον)은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사랑스럽고 귀여운 일’을 의미한다.
그토록 고귀한 사랑과 감사에서 비롯된 헌신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또한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둔 스승에 대해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영적 무지가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다.

마리아의 행동은 결단코 낭비가 아니었다. 진정한 사랑과 감사에는 결코 낭비가 있을 수 없다. 사랑과 감사는 계산을 하지 않는 것이다. 주고 또 주어도 아까운 줄을 모르는 것이 사랑의 신비이다. 사랑에는 다함이 없다. 진정한 감사란 반드시 보은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여인의 행동을 보고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신 이유이다. 또한, 보다 더 큰 이유는, 그 여인이 의식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대속 제물이 되시는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기 때문이다(8절).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를 무시하거나 경시하시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구제와 도저히 비교될 수 없는 신령한 일, 즉 죄인들을 위해 죽으실 메시아에 대한 헌신을 높이 평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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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의미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7】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신명기 15:11의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의 반영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함께 있기 때문에 도울 마음만 있으면 아무 때라도 도울 수 있지만, 예수님은 대속의 죽음을 겪어야 하시기 때문에 항상 함께 계실 수가 없으며, 따라서 섬길 마음이 있어도 섬길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 때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하면, 그 기회가 아니면 영원히 할 수 없는 일도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마리아는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일을 가장 적절하게 해내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더더욱 영광인 것은 마리아 자신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1) 이 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8】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라고 하였다.

힘을 다하여는 예수께 대한 여인의 사랑과 감사가 얼마나 깊고 진실한 것인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화를 내며 비난했던 제자들에게는 심히 부끄럽고, 곤궁에 처했던 여인에게는 심히 영광스러운 말씀을 하셨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9】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3:28의 주석을 보라.)는 두 가지 예언을 담고 있다. 즉,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될 것과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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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 Bickersteth, E. P. Gould, “Taylor”(in R. M. Wilson), 黑崎幸吉, 山口 昇, 이상근. 비교: W. Hendriksen, W. W. Wessel, D. W. Burdick, R. Earle, E. Schweizer 등0은 여인이 의식적으로 예수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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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주님께 대한 마리아의 깊은 사랑과 감사에서 비롯된 고귀한 헌신을 말하여 기념하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은 간접적으로 자신의 부활을 예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복음(1:1의 주석을 보라.)의 중심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리아의 행동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므로 복음과 관련하여 말해질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모든 성도는 마리아처럼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에서 비롯된 헌신을 함으로써 기념될 만한 일을 남겨야 한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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