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1강 겟세마네의 기도(14:32-42)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3-02-05 11:31
조회
1760
아. 겟세마네의 기도<14:32-42>

<비교: 마 26:36-46, 눅 22:39-46>

이 단화에 대한 전승사적 평가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 점에 대해 그닐카(J. Gnilka, 하권, pp. 338-339)가 비교적 잘 설명하고 있다.

로마이어가 속해 있는 첫째 부류는 이 단화를 마르코가 변경을 가하지 않고 받아들인 통일된 단락으로 보았다.

쿤(Kuhn)이 주장한 둘째 부류는 게쎄마니의 사건에 대해 각기 독립적으로 이야기하는 두 전승이 이 단화 안에 서로 결합되어 있다고 본다. 쿤(Kuhn)에 의하면, 32, 35, 40, 41절인 전승 A는 그리스도론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 전승은 사람의 아들의 때가 왔고, 이 때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죄인의 손에 맡겨짐으로써 실현된다는 것에 대한 예수의 (기도에서 알 수 있듯이) 확신과 제자들의 무지 사이의 대조에 의해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33-34, 36-38절을 포함하는 전승 B는 훈계의 의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예수가 소개된 것은 전기적인 서술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련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범을 제시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불트만(R. Bultmann)이 제시하는 셋째 부류의 견해는 이 단화의 기본 요소가 이차적으로 확대되었다고 본다.

이 전승의 통일성을 주장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전승의 분해는(분해를 위한) 개별적인 시도의 다양한 결과들이 입증하듯이 지극히 어렵다. 불트만(R. Bultmann)은 “겟세마네 사화를 적어도 넓은 의미에서는 신앙 전설 혹은 제의 전설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이 사화는 빌 2:8에서 바울이 표현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라는 그리스도 신화의 계기를 구상화하고 있으며, 따라서 바울적 색채의 헬레니즘적 기독교에서 유래한 것일 것이다.”1)라고 하였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340)는 “38절 때문에 이것은 전기적 ‘아포프테그마’(주 198을 보라.)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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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 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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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화의 출처는 팔레스틴-유다 그리스도교적 교회 공동체이다. 게쎄마니란 지명, 이중적인 아바-아버지, 쿰란 종파에 가까운 영-육 표현이 이것을 말해 준다.”라고 주장하였다.

웨셀(W. W. Wessel)은 “초대 교회가 예수께 대한 이와 같은 이야기를 조작해 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라고 올바르게 주장하였다.

마가는 이 단화를【32】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로 시작한다.

유월절 식사 때, 성찬식을 제정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셨다.

겟세마네(Γεθσημανή)는 문자적으로 ‘착유기’, ‘기름 짜는 틀’을 뜻한다.

이 동산은 기드론 시내1) 건너편(요 18:1) ‘감람산’(11:1의 주석을 보라.) 기슭(눅 22:39)의 어떤 곳이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다.

곳은 코리온(χωρίον)이며 ‘장소’, ‘공한지’, ‘지역’, ‘토지’, ‘정원’, ‘장원’, ‘밭’ 등을 의미한다.

요세푸스(Josephus)는 이러한 동산이 예루살렘 주변에 여러 곳이 있었다고 하였다.2) 바클레이(W. Barclay)는 “예루살렘은 너무나 번잡하였고, 또 거룩한 성안의 땅을 정원으로 가꾸기 위해 비료로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기묘한 율법이 있었다. 그러나 부자들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감람산에 정원을 소유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누군가 돈 많은 사람이 밤에 정원을 사용하도록 허락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동산 곧 정원의 주인이 예수님의 친구이었는지도 모른다”(A. Barnes, “Meyer”,3) 이상근).}(요 18:1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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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요한복음 18:1의 주석을 보라.
2) in E. Bickersteth.
3)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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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감람산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제자들을 데리고 습관적으로 찾으시던 장소였으며(눅 22:39), 이것을 잘 아는 가룟 유다(요 18:2)는 머지않아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이곳으로 온다.

참혹한 죽음을 눈앞에 두고 겟세마네에 이르신 예수님은, “인간과의 교제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필요로 하셨다.······괴로움이 있을 때는 누구라도 좋으니 같이 있어 주기를 바라게 된다. 반드시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금의 예수님이 그런 상태이셨다”(W. Barclay). 그러나 인간은 궁극적인 위로가 되지 못한다. 이 점은 조금 전만 해도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던 제자들이 단 한 시간도 그분을 위해 깨어 기도하지 못한 것으로도 분명해진다(37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기도할(프로슈속마이, προσεύξωμαι: 13:33의 주석을 보라.)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라고 하셨다. 인생에는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자신만이 짊어져야 할 짐이 있다(갈 6:5). 우리는 그 짐이 아무리 무거운 것이라 할지라도 기도를 통해 힘을 얻어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도하실 곳으로 가시는 예수님에 대해, 마가는【33】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3:16의 주석을 보고, 세베대의 두 아들인(마 26:37) 야고보와 요한은 1:19의 주석을 보라.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ἐκθαμβεισθαι καί ἀδημονείν)의 두 동사는 “아주 예민한 감정 상태, 즉 두려움과 당혹과 불안과 고뇌가 섞여 있는 상태를 표현하고 있으며, 여기서와 같이 생생한 표현으로 기술된 곳은 아무데도 없다”(Bratcher and Nida, p. 446).1)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유다가 자신을 대적들에게 넘겨주기 위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혹은 올 준비를 하고 있음을―아셨고, 베드로의 부인과 제자들의 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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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W. W. We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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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헤드린의 정죄와 빌라도의 선고, 군인들에 의한 못박힘 등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원인은 가장 부드럽고 예민한 심령을 가지신 예수께서 점점 혼자만 남게 된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무엇보다도 가장 힘든 일은 십자가에 못박힌 자신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15:34)라고 울부짖으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인류의 죄 때문에 자신에게 끊임없이 밀려드는 하나님의 진노의 파도를 보셨을 것이다.
예수께서 동반한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 마가는【34】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라고 하였다.

내 ‘마음’(프쉬케, ψυχή: 8:35의 주석과 12:30의 주석을 보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는 죽을 지경인 극도의 비탄 상태를 토로하신 것이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342)는 “예수의 불안은 죽는 것을 해방이라고 할 정도로 크다. 쿰란 시편에서 의의 교사는 시편 42:6과 죽음에 대한 사상을 시사하는 말씀을 전해 준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내 영혼은 죽을 정도로 괴롭다’(1 QH 8, 32).”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죽음에 대한 불안과 비탄을 토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내릴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는(갈 3:13) 영원한 대속 죽음(10:45, 마 20:28)에 대한 고뇌를 토로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에 대해 (1) 예수님의 고민에 동참하라는 뜻이라는 설,1) (2) 제자들 자신을 위하여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뜻이라는 설(M. Henry, R. A. Cole), (3) 두 가지 뜻이 포함된 것이라는 설(J. Gnilka, 하권, p. 342, 이상근) 등이 있다. (1)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으나, 예수님의 고민이 인간이 받을 저주를 담당하는 사랑의 죽음이라는 점과 38절을 보아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심적 고통에 동참하고, 제자들 자신을 위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눅 22:40)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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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Hendriksen, “Phillips”(in A. E. Sanner), A. E. Sanner, E. P. Gould, W. W. Wessel, 黑崎幸吉,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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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독대하여 드린 절실한 기도에 대해, 마가는【35】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라고 하였다.

조금 나아가사는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측근인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에게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셨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22:41에는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거리라고 하였다. 기도하는 사람이 동료들을 떠난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잘 알려져 있다(창 22:5, 출 19:3, 렘 15:17).

땅에 엎드리어는 지극히 겸손하게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창 17:3, 17. 참조: 마 26:39, 눅 17:16).
될 수 있는 대로는 하나님의 전능을 의심하는 말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에서 될 수만 있다면’이라는 뜻이다(黑崎幸吉, 마경일). 즉, “희생적 죽음이 없이도 구속 사업을 성취할 길이 있다면, 그렇게 해 달라는 것이다”(E. P. Gould).

이때는 물론 최후의 수난의 때, 특히 십자가의 고난의 때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님의 간구에 대해, 마가는【36】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라고 하였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제자들은 자고 있었으며(37절), 더욱이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도를 알 리가 없다.”라고 하였다.1) 그러나 山口 昇은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거리는 돌을 던지면 닿을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제자들이 예수님이 기도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잠들어 버렸다고는 할 수 없다. 예수님의 기도가 어느 정도 장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지쳐 잠들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을 전연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하다.”라고 올바르게 설명하고 있다.

아바 아버지여(Ἀββά ὁπατήρ)의 아바(Ἀββά)는 아람어로 ‘아버지’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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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슨, 川島 「聖書인 敎會」, 1972년 7월호에 수록된 논문 「겟세마네의 기도」”(in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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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고, 아버지는 헬라어로 파테르(ὁ πατήρ)인데, 예수님이 친히 사용하신 것은 아니다. 고울드(E. P. Gould)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조화는 물론, 히브리어만을 사용하신 우리 주의 말씀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빅켈스테트(E. Bickersteth)는 “어떤 학자들은 마가가 헬라어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를 사용한 것이 독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나, 실은 직접 보고 들은 목격자에게서 들은 그대로 썼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342)는 “아람어 아바는 원래 어린아이의 말인데, 예수의 시대에는 강조어법(‘아버지’)으로서뿐 아니라 ‘내 또는 우리 아버지’라는 어형을 대신해서 부름말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지상적인 아버지에 관련해서만 사용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은 구약성서에서는(집회서 23:1, 4<칠십인역>을 제외하면) 찾아볼 수 없으며, 팔레스틴 유다교나 헬레니즘 유다교에서 아주 드물게 확인되므로, 이 부름말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특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참조: 갈 4:6, 롬 8:15).”라고 하였다. 이 부름말은 성부와 성자의 특수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는 성부의 전능에 대한 예수님의 찬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p. 343-344)는 “이 표현은 기도에서 흔히 쓰이는 상투적인 말인데(10:27), 여기서는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하느님의 전능을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이 ‘잔’(10:38의 주석을 보라.)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끝까지 고집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으로 전개된다. 즉,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다. {“그는 감연히 육체적 유혹과 연약을 극복하신 것이다”(이상근).}(마 26:39의 주석).

마경일 님은 “이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결단을 자기 자신의 결단으로 삼으시기까지 고투하신 것이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의지에 자기의 의지를 복종시키는 결사적인 투쟁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의 예수님의 마음이 실제로 얼마나 큰 번민 상태이었는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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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는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3-44)라고 하였고,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라고 하였다.

일단 한 차례의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에 대해, 마가는【37】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이 결정적인 시간에 경고를 받은 후의 제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고”(E. P. Gould) 돌아와 보셨다. 그런데 제자들 중 제자들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기도하지 않고 자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슬픔과 고독과 적막과 허탈 등으로 착잡하셨을 것이다.

그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하셨다. “스승이 걷는 수난의 길에 동참할 내적 준비가 제자들에게 되어 있지 않은 것”(J. Gnilka, 하권, p. 345)과 그들에게 닥쳐 올 시험에 대해 무방비 상태에 있는 것을 가볍게 나무라시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베드로보다는 본명인 시몬이라고 불리는 것이 어울린다.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나머지 제자들에게도 하신 것이다. 이 점은 슈바이처(E. Schweizer)의 말대로, 가끔 한 복음서 기자가, 다른 복음서 기자는 모든 제자들에게 돌리고 있는 일들을 베드로에게만 돌리곤 한 것(막 11:21-마 21:20, 마 15:15-막 7:17, 막 13:3-마 24:3, 마 18:21-눅 17:4, 눅 12:41 이하-마 24:45)을 보아 알 수 있다.

세 제자 모두, 특히 베드로는 제일 먼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쳤지만(14:31, 마 26:35, 눅 22:33, 요 13:37),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국 중대하고도 결정적인 시간에 잠들고 말았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하여 기도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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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깨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W. Hendriksen).

또다시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지시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대해, 마가는【38】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특별한 이유가 제시된다. 시험(페이라스몬, πειρασμόν: 1:13의 주석을 보라.) 곧 예수님을 버리거나(14:29, 마 26:33) 부인하는(14:30-31, 마 26:34) 죄를 범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것이다. 사람이 시험에 들지 않은 길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 기도하는 것이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344)는 “깨어 기도할 때에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고, 유혹과 함께 다가오는 시험을 이겨 낼 수 있다. 유혹이 인간들을 시험한다는 것은 지혜문학에서 강조된 사상이다(지혜 3:5, 11:9, 집회 2:1, 33:1, 44:20, 그리고 욥기).”라고 하였다. 욥기와 마찬가지로 복음서들에서도 유혹은 사단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욥 1:6-2:11, 마 4:1 병행).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예수께서 자신의 인성에 의한 연약함을 경험하셨으며, 따라서 기도가 필요하셨다면, 제자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훨씬 더 기도가 필요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의 마음은 프뉴마(πνεύμα)이며, 여기서는 성령이 아니라 인간의 영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영은 인간의 내적 생명을 의미하며(롬 8:9, 고전 2:11),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사는 구속받은 인간을 지시한다.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고전 6:17)이라 하여, 신자의 내적 인간의 존재 형식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존재 형식과 같음을 보여 주고 있다”(C. H. Dodd).1) 이러한 존재 형식을 갖는 인간은 영으로 성령과 관계하여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며(롬 8:16),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고(고전 14:2), 영으로 기도하며(고전 14:14), 영으로 찬미한다(고전 14:15). 또한, 영이란 사고하고(롬 8:6), 인식하며(롬 8:16, 고전 2:11), 의지하고(롬 8:4-5), 판단하는 기능이 있다(고전 5:3). 영의 지배를 받는 영의 도구가 곧 마음이다(C. R. Erdma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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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 H. Dodd, The Meaning of Paul for Today(London: Collins Clear Type Press, 1971), p.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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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이 약하도다의 육신은 사룩스(σὰρξ: ‘육체’)이며, {‘물질적인 구성으로서의 육체’(롬 2:28, 고전 7:28, 15:39, 12:7, 골 1:24, 2:13), ‘성령과 대립되는 인간 자신에 의한 삶’(롬 8:9, 갈 3:3, 4:29, 5:17), ‘자연인’(롬 1:3, 4:1, 9:5, 8, 고전 1:29, 10:18, 고후 4:11, 5:16, 7:25, 10:3, 11:18, 갈 2:16, 4:23, 5:11, 24, 6:8, 12, 13, 엡 2:3, 11, 6:5, 빌 3:3, 4, 골 3:22), ‘인간의 나약성’, ‘죄성’, ‘한계성’(롬 6:19, 8:3, 갈 4:13), ‘인간적 조건’(빌 3:3, 4) 등을 의미한다.}(롬 1:3의 주석).

이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육체의 약함을 이해하고 동정하셔서(山口 昇), 매우 친절하고 부드러운 변명을 해 주시는 것(M. Henry)이 아니라, 아직도 영적으로 깨어 있어 기도하지 못하고 육체에 매여 있는 상태를 가볍게 나무라시는 것이다. 고울드(E. P. Gould)는 “취지는 왜 깨어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를 깨우치시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은 육체가 약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육체의 약함을 극복할 힘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같은 현상이 되풀이된 것에 대해, 마가는【39】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40】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라고 하였다.

마태는 두 번째 기도문을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라고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첫 번째에 비해 일보 전진한 기도라 하겠다. 이미 죽음에 대한 공포와 이를 피하려는 유혹은 사라지고, 이제는 죽음을 향해 감연히 나아가신 것이다”(이상근).

심히 피곤함이라는 카타바뤼노메노이(καταβαρυνόμενοι)이며, ‘무겁게 내리 눌린다’라는 뜻이다.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는 너무 피곤해서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눌러 잠든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육신으로서의 인간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깨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공급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제자들은 실패한 것이다. 제자들에 대한 말을 그들 자신의 변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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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피곤했다는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눈이 멀었음을 나타낸다(Kelber). 그들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는 것은 그들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J. Gnilka, 하권, p. 347).

또다시 같은 현상이 되풀이되는데,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41】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라고 하였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예수님이 두 번밖에 가시지 않았는데도 세 번째 왔다고 하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山口 昇은 “같은 사실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세 번째 간 사실에 대한 기사는 생략되었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제는 자고 쉬라에 대해서는 (1) 풍자적인 말이라는 설,1) (2) ‘내가 깨라고 할 때 깨지 않으면 누가 너희를 깨울 것인가’라는 뜻이라는 설(J. A. Bengel), (3) 의아스러워서 하는 말이라는 설(“Plummer, Cranfield”,2) E. Schweizer), (4) 단념하는 말, 즉 이제는 깰 필요가 없다는 뜻이라는 설(Bruce),3) (5) 잠시 동안의 시간 여유가 있을 것이니 그간 쉬라는 뜻이라는 설(E. Bickersteth, “Zahn”4)), (6) 질문, 즉 벌써부터 이제까지 자고 쉬었느냐고 하는 것이라는 설(Lietzmann),5) (7) 예언적 의미, 즉 무리가 눈앞에 다가선 마당에서는 깨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할 수도 없고, 예수님과 함께 잡혀 갈 수도 없으므로 당분간 자고 쉴 수밖에 없다는 뜻이라는 설(이상근) 등이 있다.

(6)설까지는 다음 구절의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는 말씀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를 보아, 이제는 예수님을 위해서, 그리고 제자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깨어 기도할 기회가 없어졌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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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W. Wessel, “Meyer”(in 이상근), R. Earle, 山口 昇, J. Gnilka, 하권, p. 347.
2) in 이상근.
3) 상동.
4) 상동.
5)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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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닐카(J. Gnilka, 하권, p. 347)는 “그만이다(아페케이, ἀπέχει)는 불가해하다. 이것은 ‘받다’, ‘수령증을 쓰다’를 의미하는 상업 용어이다. 그렇다면 주어를 보충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 몫을 받은 유다가 주어인가, 아니면 예수의 기도를 받아들인 하느님이 주어인가?1) D, Θ, it, Sy 사본 등은 여기에 τὸ τέλος를 보충한다(그렇다면 종말이 왔다).······시간과 관련해서 번역해야 한다. 곧 ‘끝났다’는 식으로 번역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기도를 통한 투쟁에서 아버지가 요구하는 길을 분명히 알게 되었음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제자들의 몰이해는 더욱 두드러진다.”라고 설명하였다. 헨드릭슨(W. Hendriksen)도 “41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겟세마네의 투쟁에서 끝났다는 확실한 인상을 받는다. 승리가 획득되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완전한 평화가 있다. 그는 천사에 의하여(눅 22:43), 그리고 자신의 기도를 통하여 힘을 얻었다. 분명히 그 세 제자는 그를 실망시켰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결단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라고 비슷하게 설명하고 있다.
때가 왔도다에 대해서는 14:35의 주석을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는 9:31의 주석을 보라.
죄인(톤 하마르토론, τών ἁμαρτωλών)은 복수형에 관사가 있으므로 어떤 개인들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반역한 무리들을 가리킨다(E. P. Gould).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42】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하였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에 대해 그닐카(J. Gnilka, 하권, p. 348)는 “뒤따르라는 부름이 아니다. 이제 뒤따르라고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취지는 자신을 따르라는 것도 아니고, 함께 도망가자는 것도 아니라, 마음의 준비를 마쳤으니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기 위해 같이 전진하자는 것이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예수님의 자발적인 복종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이 길을 걸으시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이다.”라고 하였다.

보라는 팔리는 일, 즉 넘겨지는 일이 곧 벌어진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거듭 예고했던 일들이 이제 막 현실이 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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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auer, Worterbuch, 168, Domeyer, passion, 132의 제안들”(inJ. Gnilka, 하권, p.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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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는 무리를 안내해 오는 가룟 유다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348)는 “그의 극악무도함은 스승을 죄인들의 손에 넘겨주는 데서 절정을 이루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섭리에 포함되어 있다. 예수의 예고에 따라 사건들이 일어난다.”라고 하였다. 특히, 마경일 님은 “유다는 하나님의 의지에 반역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다른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려고 하여도 복종할 수 없는 것은, 인간성의 연약으로서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유다와 같이 하나님에의 반역 행위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는 십자가의 사유 권외에 있는 자라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십자가의 사유 권외에 있는 자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은 없다. 문제는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 즉, 회개하고 믿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것이다(참조: 3:29).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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