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16강 1:18-24 교회와 무관한 사도직(1:19b-22)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2-12-19 19:32
조회
84

※ 연재되는 필자의 주석책 「갈라디아서․에베소서」


바클레이(W. Barclay)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선교가 가장 큰 관심을 끌었을 때에, 바울은 그 곳의 생도이었음이 틀림없었고, 이 어린 바리새인이 예루살렘을 뒤흔드는 갈릴리의 사람을 보았거나 그분께 대해 들었을 것이다.”❶라고 하였다. 또, 그는 고린도후서 5:16의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는 말씀을 들어 바울이 다메섹에서의 만남 이전에 예수님을 본 적이 있다고 주장하였다.❷

그러나 “알았다”는 말을 가지고 바울이 예수님을 보았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감이 있다. 헨리(M. Henry)는 “사도들은 육적인 예수를 보았지만, 바울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 중요한 것은 육적인 예수가 아니라 영적으로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의미로 말했다.”❸라고 하였다. 어쨌든, 바울이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라고 한 것을 보면, 바울 역시 육의 예수님을 보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예수님께 대해 육(신분, 재산, 지식, 학문, 가문 등)적인 표준을 따라 알았던 것만은 사실이다.❹

바울이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나, 그가 역사적 예수님께 대해 알았을 가능성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 수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서 많은 무리를 가르치시며,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고, 유대 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혹독히 비난하시며 충돌하곤 하셨을 때,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공부하고 있었다(행 22:3). 바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행 26:4). 이 점으로 미루어 바울이 역사적 예수께 대한 기본적인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부정될 수 없다.❺

또한, 교회에 대한 바울의 격렬한 핍박 역시 그가 예수님과 예수님께 대해 충분한 지식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스탐(R. T. Stamm)은 “만일 그에게 유대교에 대해 혁명적인 위협이 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준 예수님과 예수님의 교훈에 관해 충분한 지식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렇게 격렬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사도로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남으로써 얻은 역사적 예수님께 대한 지식이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더욱 자세하게 일깨워 주고, 생생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이 사도들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권위 있는 것임을 강력히 주장하기 위해,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신에 대해 들은 편견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20】[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라고 하였다.

이 표현은 일종의 맹세로서 어떤 사실을 단언하는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의 것들은 바울의 서신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후 1:23, 11:31, 롬 1:9, 빌 1:8, 살전 2:5, 딤전 2:7).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고 한 것은 15-19절의 주장과 1장 끝까지에 해당되는 것(E. Huxtable)이나,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야고보 외의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다짐(이상근)이 아니라, 칼빈(J. Calvin)의 말대로 전체의 서술에 확장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말과 행동을 항상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처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곧 하나님 앞에서의 삶인 것이다. 하나님께 합당한 삶이란 하나님 앞에서 거짓이 없는 언행으로서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 및 사도들과 무관한 것임을 주장한 바울은, 베드로와 십오일간 함께 지낸 후의 선교 여행을 소개하고 있다. 먼저, 【21】[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라고 한다.

당시의 [수리아]는 바울의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방이었으며, 그 수도는 안디옥이었다. 그리고 [길리기아]는 [수리아]만큼 중요하지는 않았으며, 그 수도는 다소❻이었다. 이 구절과 관련된 누가의 기록은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행 9:29-30)라고 되어 있다.

바울이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복음을 증거했다고 기록한 것에 대해, 루터(M. Luther)는 “사도들을 보기 전이나 후나, 그는 항상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은 복음의 설교자임을 확신시키려 애쓰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바울은, 【22】[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라고 함으로써, 유대에 있는 교회들이 그때까지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자신의 새로운 면모를 알 기회가 없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스탐(R. T. Stamm)은 “유대가 예루살렘을 포함한다.”라고 하지만, 앞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십오일 동안을 베드로와 함께 있었다고 한 것을 미루어 예루살렘을 제외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엔 크리스토, ἐν χριστῷ)는 베드로전서에는 세 번 나오는데(3:16, 5:10, 14), 바울 서신에는 대단히 많이(약 164회) 나타나고 있다. 바울의 독특한 표현인 ‘[그리스도 안에]’란 그리스도와 성도의 영적 연합, 즉 신자가 그리스도께 접목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같은 의미로 ‘그리스도와 함께’, 혹은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그리스도와의 교제’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A. Schweitzer).❼또, “이 표현은 ‘성령 안에’와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A. Deissmann).❽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복이 주어지며, 또 우리는 그 안에 서 복을 받아 누리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 안이야말로 신령한 복의 근원이요 통로요 영역이다. 그러므로 모든 영적 생활(지·정·의 포함)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바울의 신비주의라고도 한다. 그의 신비주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헬라적 신비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이 점에 대해 다이스만(A. Deissmann)이 잘 설명하고 있다.

⑴ 전자는 반응 작용으로서의 신비주의인 반면에, 후자는 능동적 행위로서의 신비주의이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접근해 오시는 것과 인간이 신에게 접근해 가는 것이다. 전자가 하나님의 선물 혹은 은혜의 신비주의인 반면에, 후자는 인간의 노력이 주도하는 신비주의이다.❾

⑵ 전자는 신비주의의 목적이 신과의 교제(communio)인 반면에, 후자는 일치(unio)이다. 즉, 하나님의 현존을 통한 인격의 성화와 인격의 상실이다. 전자가 신의 뜻을 향한 인간의 적응인 반면에, 후자는 신화(deification)이다. 사실상 전자는 윤리적 열정주의의 신비주의인 반면에, 후자는 경건적 도취의 신비주의이다. 전자는 인격성의 부정이며, 후자는 인격성의 긍정이다.❿
[교회]는 1:2의 주석을 보라.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란 아름다운 묘사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스도교를 의미한 것인지는 모르나 그들의 관계는 더욱 큰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영역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의 뜻과 그의 영과 그의 묘사야말로 그들이 일하고 활동하는 요소를 이룬 것이다(C. R. Erdman). 어느 지역에 교회가 있든지 그 영구불변의 장소는 바로 [그리스도 안]인 것이다(O. F. Blackwelder). 바울의 이 말 속에는 그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한 교회에 비해, “이미 활기 있게 그리스도께 연합한 조직된 공동체들에 대한 존경심이 담겨 있다”(E. Huxtable).

교회가 교회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회당을 비롯한 모든 다른 단체와의 결정적 차이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직과 제도가 다른 교파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한 믿음의 형제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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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W. Barclay, op. cit., p. 53.
2) Ibid.
3) M. Henry, op. cit., p. 621.
4) 참조: 黑崎幸吉, 고린도전후서(新約聖書註解), 곽철영 역(서울: 제일출판사, 1969), p. 36.
5) J. G. Machen, op. cit., 76.
6) W. Barclay: 바울이 자란 곳이며 학교에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운 고장이었다. J. G. Machen, op. cit., p. 45. C. H. Dodd, The Meaning of Paul for Today(London: Collins Clear-Type Press, 1971), p. 21. 다소는 국제적인 도시로 학문과 무역의 중심지이며, 또한 종교가 성행하였다.
7) A. Sch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trans. by W. Montgomery(London: Adam & Charles Black, 1956), pp. 122-124.
8) A. Deissmann, Paul, trans. by W. E. Wilson(Peter Smith, 1972), p. 139.
9) Ibid., p. 158.
10) Ibid., pp. 150-151. 참조: A. Schweitzer, op. cit., pp. 373-374. 윤리적인 면을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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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82-87.

필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5권/ 기타 다수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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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19 19:34

    필자의 주석책에는 각주로 되었고, 주석되는 성경의 구절과 용어는 고딕으로 구분했는데, 이 인텨넷 화면에는
    그대로 표시되지 않으므로(히브리어도 표기 안 됨) 각주를 미주로 바꿨고, 고딕을 부호 [ ]로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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