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15강 1:18-24 교회와 무관한 사도직(1:18-19a)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2-12-12 10:03
조회
83

※ 연재되는 필자의 주석책 「갈라디아서․에베소서」


C. 교회와 무관한 사도직[1:18-24]

지금까지 자신의 사도권의 신적 기원을 주장한 바울은, 이제는 자신의 사도권이 사도들에게서 얻은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교회나 다른 사도들이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도권을 인정하였음을 내세우고 있다.

먼저 그는 자신의 사도권이 사도들과 상관없음을 밝히기 위해, 【18】[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쌔]라고 말한다.

[그 후 삼년 만에]를 가리켜, 黑崎幸吉은 17절의 다메섹으로 돌아간 후 삼년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❶은 회심 후 삼년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바울은 이 기간의 대부분을 아라비아에서 머문 것이 아니라, 다메섹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열심히 수행하며 지냈다(행 9:20-23). 웨슬리(J. Wesley)도 “이 동안에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충분히 발휘하였고 입증하였다.”라고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바울이 [게바] 곧 베드로(요 1:42)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이미 삼년 동안이나 사도로서 복음을 증거한 이후였다. 따라서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은 예루살렘 교회 및 사도들과 관계가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목적은 [게바] 곧 베드로를 심방하기 위함이었다.

[게바](Κηφάν)는 ‘시몬’의 아람어 별명인데, 예수께서 붙여 주신 별명인 베드로로 더 널리 알려졌다(마 16:18, 막 3:16, 요 1:42. 참조: 마 4:18, 8:14).

시몬(막 1:16, 마 16:17, 벧후 1:1. 참조: 시므온<행 15:14>)에 대해 마태복음에는 바요나의 아들로(16:17), 요한복음에는 요한의 아들로(1:42, 21:15-17) 기록되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는 기혼자이었고(마 8:14, 막 1:30, 눅 4:38, 고전 9:5), 동생 안드레와 함께 가버나움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생활하는 어부였다(막 1:16, 21, 29).

그는 솔직하고 열정적이고(마 14:28-33, 막 8:32, 14:29-31, 47, 요 18:10) 충동적이며(마 14:28, 16:22, 17:4, 막 8:32, 10:28, 요 13:8, 18:10), 약간 변덕스러운 데(마 26:33-35, 69-73)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부름을 받은 12제자 중 으뜸이요 대변자가 되었고, 모든 사도의 목록에서 첫 번째로 언급되고 있다(마 10:24, 막 3:16-19, 눅 6:14-16, 행 1:13). 그는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에 예수를 부인한 적이 있고, 또 여러 번에 걸쳐 실수하기도 하였다.

바울은 그를 가리켜, “교회의 세 기둥 가운데 한 사람”(갈 2:9)이라고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교회의 반석인 그는 64년(혹은 67년경이라는 설도 있다.)에 네로 황제의 박해로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심방하]다는 히스토레오(ἱστορέο)인데 “신약 성경에만 사용된 말로서 ‘물어 찾아가는 것’, ‘개인적으로 친숙해 지는 것’, ‘묻고 찾으므로 지식을 얻는 것’ 등의 뜻이다](Vincent).❷ 또한, 이 말은 “문의하다, 이야기하다, 알리다, 사람 또는 장소를 방문하다”(R. T. Stamm)라는 뜻도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던 베드로를 방문한 일에 대해, 블렉웰더(O. F. Blackwelder)는 “바울은 베드로 및 야고보와 협의하는 가운데 자신의 경험을 시험했다.”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❸은 어떤 교훈 내지 지식을 얻기 위해서나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교제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참조: 행 9:26).

이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바울은 [저와 함께 십오일을 유할쌔]라고 하여 자신이 베드로와 함께 지낸 기간이 겨우 십오일밖에 되지 않았음을 강조하였다. 겨우 [십오일]밖에 그 곳에 머무르지 않은 것은 그에 대한 박해 때문이지만(행 9:29-30), 아무튼 결과적으로 복음에 대하여 사도들에게서 배울 기회가 없었다는 것과 사도들과 충분한 의견 교환을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❹

더욱이, 그 짧은 [십오일] 동안 여러 사도들과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바울 자신은 【19】[주의 형제 야고보❺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사도직과 복음은 예루살렘 교회 및 다른 사도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격인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다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만나 십오일을 함께 유했다는 사실은 네 가지의 중대한 의의가 있다.

(1)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사도직과 복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교회를 떠난 사도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자기 마음대로 교파를 만든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의 유전과 제도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의 현실을 보면, 바울의 태도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 조금만 명성이 높아지면 자기가 속해 있던 교회나 교파를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교회나 교파를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 사실상 개신교의 가장 큰 비극은 ‘은혜 받았다’, ‘계시 받았다’라고 하는 자들이 자기가 속한 교회를 떠나 제멋대로 교회 또는 교파를 만드는 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이 베드로를 방문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실로 중대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인 베드로와 초대 교회의 지도자 격인 야고보가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을 인정했다는 점이다.❻ 이 일에 있어서는 바나바의 도움이 컸다. 이 점에 대해 누가는,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님을 본 것과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행 9:26-27)라고 기술하고 있다.

(3) 신학을 확립하는데 있어서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즉, 베드로와 야고보가 바울을 인정했다는 것은 곧 그의 “이방 전도”(16절)를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만을 위한 구세주라고 하던 종래의 신학적 주장이, 이제 비로소 예수께서는 우주적 구세주라는 신학적 주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문제는 후에도 커다란 쟁점이 되어 마침내 예루살렘 총회가 열리게 되고, 거기서 베드로와 야고보의 지지 발언에 힘입어 다시금 확정된다(행 15장).

(4)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성장한 야고보와 만나고, 또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내내 함께 생활한 베드로와 십오일간을 지내는 동안에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바울이 그 이전에는 지상 예수님께 대해 전혀 몰랐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보른캄(G. Bornkamm)은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으며, 그의 서신에는 역사적 예수님이 없다. 전승 지식에 의한 것이 약간 있으나 대단한 것이 아니다.”❼라고 성급하게 결론지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목격했거나, 그분께 관하여 알 수 있었을 것이란 설득력 있는 가능성이 몇 가지 있다.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 사건을 회고할 때에❽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 말은 매우 흥미있는 암시를 준다. 만일 그가 예수님을 본 적이 없었다면 어떻게 다메섹에서 만난 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았겠는가? 녹스(J. Knox)는 “다메섹 부근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된 것은 바울과 그리스도와의 첫 접촉이 아니다. 전에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인식할 수 있었다.”❾라고 주장하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J. Calvin, M. Henry, J. B. Lightfoot, H. Alford, E. D. Burton, R. C. H. Lenski, S. J. Mikolaski, “Zahn, Beet”(in 이상근), E. H. Perowne, E. Huxtable, 內村鑑三, 이상근.
2) in 이상근.
3) J. Calvin, E. Huxtable, S. J. Mikolaski, C. R. Erdman, J. Dow, 內村鑑三, 윤성범, 박윤선, 이상근.
4) J. Calvin, M. Henry, J. A. Bengel 등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5) 최세창, 야고보서, 제1부 Ⅰ. 저자를 보라.
6) E. Huxtable, R. T. Stamm, R. C. H. Lenski, 박윤선.
7) G. Bornkamm, op. cit., p. 110.
8) 행 9:1-7, 22:6-16, 갈 1:11-16, 고전 0:1-2, 5:3-11. 특히, 고전 9:1에는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라고 함으로써 그가 예수님을 본 것을 강조한다. 또, 고전 15:8에도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9) J. Knox, Chapter’s in a Life of Paul(New York: Abingdon Press), p. 123.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출처: 최세창,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78-82.

필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5권/ 기타 다수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갈-엡.JPG

004-1.jpg



첨부파일 : 갈-엡.JPG
첨부파일 : 004-1.jpg
전체 1

  • 2022-12-12 10:04

    필자의 주석책에는 각주로 되었고, 주석되는 성경의 구절과 용어는 고딕으로 구분했는데, 이 인텨넷 화면에는
    그대로 표시되지 않으므로(히브리어도 표기 안 됨) 각주를 미주로 바꿨고, 고딕을 부호 [ ]로 바꿨습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공지사항 관리자 2012.05.23 3750
132 최세창 2022.12.26 76
131 최세창 2022.12.19 80
129 최세창 2022.12.05 83
128 최세창 2022.11.28 88
127 최세창 2022.11.23 77
126 최세창 2022.11.17 80
125 최세창 2022.11.12 75
124 최세창 2022.11.09 86
123 최세창 2022.11.05 78
122 최세창 2022.11.02 73
121 최세창 2022.10.28 72
120 최세창 2022.10.24 60
119 최세창 2022.10.22 81
118 최세창 2022.10.17 105
117 최세창 2022.10.10 68
116 최세창 2022.10.10 88
115 노성진 2022.09.01 91
114 김희영 2020.02.24 599
113 신승도 2019.08.14 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