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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옷

작성자
원학수
작성일
2015-09-05 12:05
조회
1045
사람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옷
출애굽기 28:1-5, 골로새서 3:5-17.



닭이 오리 알을 품어서 깨었다고 해서 병아리가 되지 않습니다.
오리 알은 누가 품어도 오리새끼가 나옵니다.
복숭아씨가 살구 씨를 대신할 수 없듯이 살구 씨는 살구나무의 싹이 나서 자라기 마련입니다.

아합 왕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한 때는 굵은 베옷을 입고 느릿느릿 걸음을 걸었을 때 하나님은 아합을 관대하게 보기도 하셨으나 아합은 히스기야가 될 수 없고 끝내는 아합의 사악한 성품 그대로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물건을 포장하는 것으로 가치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포장된 속에 들어있는 물건의 보호를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귀하고 거룩한 것으로 꾸민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거나 인격이 바뀌거나 성품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옷이나 바꾸어 입는다고 사람이 바뀌어 질수 없고 새로워 질수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옷을 입으면 사람은 완전히 바뀌어 질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지어주시는 옷은 거룩한 옷이며, 영화로운 옷이며, 아름다운 옷을 입으면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그 옷은 마음에 지혜 있는 자가 지은 옷입니다.
옷의 종류는 흉배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로 되어있습니다. 그 옷의 재료는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옷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입었을 때, 사람의 가치가 바뀌어 지고 성품이 바뀌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옷에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옷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선 그 옷의 제작에 대한 깊은 영적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옷의 제작은 마음에 지혜 있는 자를 택하신다는 것입니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보다 지혜 있는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인간이 지혜를 얻으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바라고 믿고 찾는 자라야 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지혜로워 보여도 하나님을 떠난 삶은 미련한 자의 삶이고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리 미련하게 보여도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따르는 자는 지혜로운 삶인 것입니다.

빌라도는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지혜로웠으나 하나님을 떠난 그의 삶은 가장 미련한 삶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 무모하게 힘없이 죽어갔으니 얼마나 미련한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기까지 순종하였으니 가장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보다 지혜로운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사람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옷을 완성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옷의 종류를 살펴보면 흉배가 있습니다.
흉배는 가슴에 다는 것으로서 청색, 자색, 홍색실과 금실로 장방형의 네모반듯하게 만들고 그 위에 열두 보석을 달았고 그 보석 위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들을 새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은 언제나 사랑하는 백성들의 이름을 가슴에 앉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목자는 언제나 사랑하는 양떼들의 이름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양떼는 언제나 목자의 가슴속에 이름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목자와 양떼 사이에 사랑으로 연결되어있지 않으면 참다운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나는 참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떼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셨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지금도 우리를 위해 도고의 기도를 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켜주십니다.
그러므로 흉배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합니다.

에봇의 옷이 있습니다.
제사장의 예식을 행할 때 입는 옷으로 두 견대가 달린 옷인데 “금실,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곤 베실로(출 28:6-8) 짠 옷입니다.
두 견대에는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이 각각 여섯씩 두 줄로 새겼습니다(출 28:9-14).
믿음과 생명과 고난을 보여주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민족을 위하는 사랑으로 헌신과 봉사를 각오해야 하는 책임을 나타내었습니다.

목자는 양들의 실수와 잘못을 책임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변론하고 고난을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사장의 두 어깨에는 모든 민족의 지파들을 지고 있어서 무겁게 책임감 있게 감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죄도 흠도 없으시지만 온 인류의 죄와 허물을 홀로 감당하신 제사장 중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의 고난을 어깨에 메고 골고다에 올라가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에봇은 우리 예수님의 고난과 멸시와 죽으심으로 책임을 감당하신 사랑의 모습입니다.

겉옷이 있습니다.
“너는 에봇 받침 겉옷을 전부 청색으로 하되 두 어깨 사이에 머리 들어갈 구멍을 내고 그 주위에 갑옷 깃같이 깃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 하고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석류를 수놓고 금방울을 간격하여 달되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한 금방울, 한 석류가 있게 하라”(출 28:31-34)고 했습니다.

청색이란 생명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21)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생명을 주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생명을 주는 것이라야 참 종교이며 참 신앙입니다.
주의 종들은 양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공급하여줍니다.
아무리 귀에 아름답게 들려지는 소리라 할지라도 생명과 관계없는 것이라면 아무의미가 없는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귀에 둔탁하고 가슴에 고통을 주는 소리라 할지라도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면 참으로 가치 있는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겉옷에 금방울을 달게 한 것은, 생명의 옷에 약동의 소리가 들려지게 한 것입니다.
만약 금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제사장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활동합니다.
생명의 소리는 쉬지 않고 양떼들에게 들려져야만 합니다.
생명의 복음은 주야를 가리지 아니하고 전파되며 국경과 장벽을 넘어서 증거 되어 집니다.

반포 속옷이 있습니다.
반포 속옷은 가장 먼저 입는 옷이며 가장 기본적인 옷입니다.
“반포 속옷은 가는 베실로 짜라”(출 28:39)고 했습니다.
“가는 베실로 짜라는 것은 성결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입어야 할 옷은 성결의 옷입니다.
성결치 않고서는 봉사하는 일이나 충성하는 일들이 정결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부정한 마음이나, 부정한 손이나, 부정한 몸으로 나아오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래서 정결 의식을 가르치셔서 정결케 된 뒤에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반포 속옷이 또 하나 흰색인 것은 성도들의 성결을 상징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흰 옷을 사서 입으라고 하신 것은 성결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점도 흠도 없으신 분이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결해지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과 소극적으로 죄를 회개하며 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관을 만들었습니다. 관도 가는 베실로 짜고 그 위에 “여호와의 성결”이라고 이름을 써서 머리에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성결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다거나 칭찬을 받기 위해 한다거나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하는 자세로 해야 합니다.
눈가림으로 하는 것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봉사와 충성의 자세로 해야 합니다.

띠가 있습니다.
띠도 가는 베실로 만들어 띠라고 했습니다.
띠는 일 할 때 옷을 허리에 묶어서 간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기들도 그 띠에 달게 되어있습니다.
칼이나 물통이나 활이나 전통을 달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라”(옙 6:14)고 하였습니다.

띠를 띠는 것은 활동준비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출발하기 전에도 “띠를 띠라”고 했습니다.
종들에게 띠를 띠라고 한 것도 일을 준비하게 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진리로 띠를 띠라고 한 것은 말씀에서 주는 의미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진리로 띠를 띠어야 곁길로 가지 않고 속된 것에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옷들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입혀서 거룩한 제사장 직을 감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이 옷을 입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였고 그들의 신분과 인격과 성품이 바뀌어 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뀌어 졌습니까?

1.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룩하다고 할 때 종교적인 신성한 것을 전제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개념의 의미를 생각할 때 신성의 의미가 있고, 구별되다, 봉헌되다의 뜻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거룩하다는 것의 반대어는 무엇이겠습니까?
속된 것, 더러운 것, 부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 옷을 입혀서 거룩하게 한 것이라면 이 옷은 참으로 놀라운 신비의 옷이 분명합니다.
사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처음부터 성별되어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레위는 혈기로 칼을 차고 사람들을 많이 죽였던 사람이며, 레위지파를 이스라엘이 축복하기보다는 저주를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레위 지파 가운데 아론은 동생 모세를 도와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모세를 돕는 대변자이기도 하였습니다(출 4:14).

모세가 80세에 아론은 83세로서 3살 위였으나(출 7:7) 모세를 도와 모세의 협력자로 모세를 부축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의 지팡이를 든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붙들어 올려주었던 사람입니다(출 17:10).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아론은 가까이 접근도 못하고 멀리서만 경배했던 사람입니다(출 24:3).

어떻게 보면 아론도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속된 사람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이 구별하여 머리에 기름을 붓고 거룩한 옷을 입혔을 때 아론은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시내 산에 가까이 접근하지도 못하던 아론이 거룩한 옷을 입었을 때에는 성소의 지성소까지 들어가 하나님 앞에 제사하며 하나님의 법궤를 가까이 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더디 내려오므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사하고 절했던 사람입니다(출 32: ).
그 때문에 3천 명가량이 죽었습니다(출 32:29).
그렇다고 하면 지혜로운 사람이 지은 옷이 사람의 가치와 성품과 신분을 바꾸었거든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을 때 그 신분과 가치와 성품은 바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시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아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든 옷은 사람의 외형적인 면에서 보이는 것만 바뀔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은 그 사람의 내적인 성품과 품격까지도 바뀌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면 운명까지도 바뀌어 집니다.
사람의 영혼 문제까지도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영혼이 삶을 얻게 되고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보시니 누가 정죄 하겠습니까?

2. 영화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에스더 6장에 보면 유다 사람 모르드개는 바사 국의 수문장이었는데 어느 날 아하수에로 왕을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모살하려고 공모하는 것을 알게되어 그 사실을 왕에게 고발하여 왕의 목숨을 살려준 공로로 아하수에로 왕의 왕관을 쓰고, 왕의 옷을 입고, 왕의 말을 타고 가장 존귀한 자 하만 총리의 손으로 말고삐를 잡게 하여 온 거리를 돌면서 “왕이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고 큰 소리로 영포하게 하는 존귀와 영광을 받았습니다.
단 하루의 잠깐 받는 영화와 존귀함도 이렇게 크거늘 하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영화를 우리가 받아 누리게 된다고 하면 얼마나 더 크고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아론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을 때 산에서 더디 내려오므로 산 아래에서 백성들과 금송아지를 제작하여 그 앞에서 절하고 춤추며 제사하는 죄를 범했습니다(출 32장).
그 일로 인해 모세는 하나님께서 써주신 십계명 두 돌판을 깨뜨려 버렸고 금송아지를 불에 태워서 그 재를 백성들에게 마시게 하였으며, 그 날 3천 명가량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출 32:29).
이러한 죄는 하나님 앞에 너무도 큰 죄인데도 하나님은 그에게 특별히 제작하신 옷을 입혀서 영화롭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죄인도 들어서 영화로운 옷으로 입혀주십니다.
천한 사람을 들어서 영화로운 옷으로 입혀주시는 분이십니다.
천한 사람을 들어서 영화로운 신분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사사기 17장에 보면 에브라임 산성에 미가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가는 유다 가족에 속한 베들레헴의 소년 레위인이 거할 곳을 찾아 헤매다가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 이르렀을 때 미가는 그가 레위인으로 거할 곳을 찾는다고 말하자 그에게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을 주기로 약속하고 자기 집 제사장을 삼아 거룩히 구별하고 제사장 직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자녀들을 이렇게 성별 되게 구별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나그네 같은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와 같은 죄인도 구별하셔서 하늘의 천사장도 부러워하는 귀한 직분을 주셨습니다.
하늘의 천사장도 부러워하고 있으니 얼마나 영화로운 사람이 되었습니까?
죄로 죽을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살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참으로 영화로운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거룩하고 의로운 성도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비천한 우리가 이 옷을 입고 영화로운 신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사국의 수문직이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옷을 입었을 때 영화로웠던 것보다 더 큰 영화를 얻게 된 것입니다.
에브라임 산지에서 베들레헴 소년인 레위인이 제사장 옷을 입었을 때 영화로움보다 더 큰 영화를 얻게 된 것입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 옷을 입을 때보다 더 영화로워집니다.
우리도 그 옷을 입어야하겠습니다.

3.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영적으로 인간들을 바라볼 때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하고 부패해진 죄의 상처로 보았습니다(사 1:5-6).
마치 영적 문둥병자와 같이 보았던 것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으며 힘이 있는 장군이었지만 문둥병이 걸려 있을 때 언제나 절망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사마리아에 선지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엘리사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이 멀리서 찾아왔지만 그에게 문을 열고 영접하기는커녕 내다보지도 않고 다만 “요단강에 들어가 7번 목욕하라”는 말만 전달하였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나아만 장군은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고 몹시 화를 내었으나 그 종들이 억지로 요단강에 목욕을 하게 했더니 놀랍게도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은 깨끗하게 치료되었습니다.
모든 질병의 근원이 사라지고 깨끗하게 치유되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죄인들도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물과 피를 모두 흘리신 것은 죄인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한 것이며 영적 부패 상태를 치유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비누가 만들어지기 전 옛날에는 짚을 태워서 그 재로 빨래도하고 팥을 삶아서 머리를 감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양잿물이 만들어지면서 왕겨와 보리겨를 섞어서 빨래비누를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시커멓게 생긴 빨래비누가 얼마나 편리했는지 모릅니다.
그 후 하얀 비누가 나오고 이제는 물비누, 가루비누 등 각양각색비누들이 나와서 아주 편리하게 사용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새 비누가 개발되고 연구되었다 할지라도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씻어주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를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린 보혈 밖에 없습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도, 간음현장에서 잡혔던 여인도, 거라사의 무덤 사이에 있던 군대귀신 들렸던 자들도, 7귀신 들렸던 말달라 마리아도, 십자가 상의 오른쪽 강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씻겨져서 아름답게 되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옷을 어떤 옷입니까?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 새로워지는 역사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거룩하고 영화롭고 아름다워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제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전체 1

  • 2015-09-06 15:52

    설교집 5권을 출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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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일로 보내 드릴수 있습1니다.
    연락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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