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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회 총회에 대한 유감이 남아있다/건의안심사위원회에 대해

작성자
박영규
작성일
2016-10-30 08:14
조회
1932
32회 총회 첫째 날 교회연합분과 위원이라 분과 회의에 참석하여 임프란트 수술 후라 말하기가 어려운데 위안부소녀 기념교회 인준에 대한 설명을 했으나 교회연합분괴위원회 소속 한양교회 김병호목사가 해당이 없다고 해서 이용윤 사무국 총무에게 문의 했더니 서기부를 통해서 건의안 심사위원회에 제출하라 해서 서기에게 문의 했더니 내일 아침 일찍 건의안 서류를 구비하고 추천을 받아 제출해 달라고 해서 집에 와서 서너 시간 건의안과 자료를 첨부해서 둘째 날 총회에 가서 아침 예배를 드리고 다섯분의 추천을 받아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 인준 안건을 서기를 통해 건의안 심사 위원회에 제출했으나

총회석상에서 건의안 심사위원장이 건의안 심사 보고서를 발표하며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 건의안이 절차상 문제가 있어 기각이 되었다고 발표해 의장(전용재감독회장)에게 재심을 청구하여 재가를 얻어 건의안 심사 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하여 회의를 한 결과 또한 기각이다. 기각 사유는 절차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영등포지방 감리사, 서울 남 연회 감독도 내가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를 세우려고 동대문 천막교회에서 2015년 1년간 예배를 드리고 2016년 1월 첫 주 수요일부터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옆에서 10월21일까지 매주 수요일 11시에 41주차 위안부소녀 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위안부 소녀기림예배를 드려왔고 연회에서 위안부 기림예배를 위해 선교비도 지원을 받았었고 앞으로도 계속 매주 수요일 11시에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종군 소녀 위안부 기림예배를 드리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드릴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 종군 위안부의 참상과 교회설립취지문과 그동안의 경과와 신문과 방송에 보도된 내용과 앞으로의 계획을 첨부하여 제안서와 추천서를 건의안 심사 위원회에 제출하였으나 두 번이나 기각을 한 것과 역사적인 주님의 교회를 세우려는 것을 훼방하였으니 성령훼방 죄라고 생각한다. 건의안 심사위원 가운데 서너 사람이 개인적인 또는 정치적인 감정으로 장난치고 훼방한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진정 목사인가 역사의식이 있는 자들인가 의문이 간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훼방을 기억하시리라 믿는다.


왜 일본군 종군 위안부 소녀기념교회를 세워야 하는가?!/설립 취지문과 경과.

1991년 동대문교회 집사였던 고 김학순 집사님이 당시 담임 목사였던 장기천 감독회장께 일본이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부정하니 일제하 1930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대한의 소녀 30만 여명이 정신대라는 미명하에 일본이 일으킨 전쟁터에 끌려가 성노예로 정조를 짓밟히고 갖은 고초와 학대를 당한 것을 밝혀 장기천 감독회장의 주선으로 위안부의 참상을 기자회견을 통해 세계최초로 폭로해 위안부의 참상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1991년 정신대 대책협의회와 김학순집사님의 주도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7년간 시위를 이끌어 오다가 김학순 집사님이 1997년도에 소천 후 정신대 대책협의회에서 20년동안 매주 수요일 낮 12시에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나는 성도들과 함께 2015년 1년간 동대문 천막교회에서 위안부소녀 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준비예배를 드리다가 2016년1월 첫 주 수요일부터 김학순 집사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옆에서 매주 수요일 11시에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32회 총회에서 위안부소녀기념교회 인준을 위한 건의안을 내고 건의안 심사위원회에 가서 위원장의 배려로 위안부소녀 기념교회 설립 취지와 그동안의 경과를 설명을 하였으나 한양교회 김병호목사 등이 반대해서 건의안 심사위원 회 보고 때 위안부소녀 기념교회 인준을 위한 건의안이 절차상에 문제가 있다고 심사위원장이 기각이라고 보고를 했다.

의장에게 발언권을 얻어 재심을 요구 했는데 건의안 심사위원회에서 재심결과 또 기각이 되었다. 다시 발언권을 얻어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 인준만 해달라는 것이지 재정 지원을 요청한 것도 아닌데 절차상 문제라며 기각을 하니 안타깝다고 발언을 했더니 건의안 심사위원회 소속 서구석 목사가 기각이 된 것은 가부를 물을 수 없다고 해서 실망스러워 사무국 총무 이용윤 목사에게 총회에서 위안부 소녀기념교회 인준의 가부를 좀 물어 보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법이라 안 된다기에 발언을 자제했더니 /

의장(감독회장)이 이건은(위안부소녀 기념교회)발의자가(박영규)열심히 하시면 여러 경로로 돕겠다고 했다.(박영규수용)/총회회의록/당당뉴스기사/ 절차상에 문제가 있어서 기각이 되어 건의안 심사 위원인 김병호목사에게 김병호목사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한마디 했는데 또 기각이 되어 지금까지 울분이 난다.

총회석상에서 내년부터 저는 은퇴가 4년이 남아
은퇴 전에 일제치하에서 고통당한 대한의 소녀 30만 여명의 한을 기억하는 위안부 소녀기념교회를 세워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역사적인 일을 하고 싶었는데 아쉽다고 밝혔다. 과연 감리교회가 역사의식이 있는 교단인가 개탄스럽다.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 인준을 위한 건의안에 추천해 주신 이용윤사무국 총무목사, 홍성국감독, 안승철감독, 도준순 감독, 황광민목사, 김덕창목사께 감사드린다.
2016년 10월30일 주일 아침 서울제자교회 담임목사. 서울제자교회병설 한국위안부 소녀기념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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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한국 위안부 소녀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취지문(건의안)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안건
수신_ 기독교 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참조_ 건의안 심사위원장, 건의안 심사위원
건의자_ 제 32회 총회 회원 서울 남연회 박영규 목사


건의안 추천인

1.이용윤목사(사무국총무)

2.홍성국감독

3.안승철감독

4.도준순감독

5.황광민목사

6.김덕창목사

샬롬.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이번 제 32회 총회 회원인 서울 남연회 영등포지방 서울제자교회 담임 박영규 목사입니다. 제가 이렇게 건의안을 드리게 된 이유는 그동안 기도하며 계획해오던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 교회가 세워진다면, 일제치하 1930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13~20세 전후 대한의 소녀 20~30만 여명이 ‘정신대’라는 미명하에 일본군에게 끌려가 갖은 수모와 정조를 짓밟히며 성노예로 고통을 당하다가 전쟁터에서 죽거나, 살아 돌아와도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죽어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을 기억하며, 이를 바탕으로 민족의 얼을 고취시켜 다시는 그와 같은 치욕적인 역사가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감리교의 산역사인 동대문교회가 철거된 후,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부족하게나마 임시 예배 처인 동대문 천막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매주일 그곳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와 관련한 저의 기도제목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당시 예배를 인도하시는 문세광 · 조환기 원로목사님의 배려로 2015년 1월부터 2015년 12월말까지 매주일 오후 3시30분에 일본군 종군 위안부 소녀 기림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매주일 동대문(천막)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오던 것을 올해부터는 매주 수요일 오전 11시 ~11시40분 약 30-40분 동안 서울 주재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옆에서 성도들과 위안부 소녀 기림예배를 41차 드려 왔습니다. 앞으로도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가 설립 될 때까지 계속해서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제가 동대문교회 철거 후, 천막에서 2015년 1월에 처음 가서 예배드리게 되면서 1991년 당시 동대문교회 담임목사 장기천 감독회장께서 심방을 가셨다가 동대문교회 김학순 집사님을 통해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장본인이라는 이야기와 일본군이 가한 모욕과 성적 학대 등 입에 담을 수 없는 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정부가 위안부에 대해 부정하고, 왜곡하는데 분개한 김학순 집사는 장기천 감독회장의 주선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세계 최초로 위안부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세월이 지나, 이제 위안부 할머니들은 40여분만 남아 계십니다. 그분들은 불교 조계종에서 마련한 쉼터 나눔의 집등 기타 시설에 기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2015년 1월에 동대문교회 임시 예배 처인 천막에 가서 동대문 천막교회 남은 성도들과 예배를 인도하시는 문세광 원로목사님을 통해 김학순 집사가 동대문교회 집사며, 위안부 소녀의 참상을 세계 최초로 알린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대문교회가 철거 된 후 임시 예배처인 천막에서 2015년 1월부터 2015년 12월말까지 우리교회에서 주일알 11시 예배를 드리고 주일 오후 2시 원로 목사님 두분이 인도하는 동대문 천막교회 남은 분들과 예배를 함께 드린 후 오후3시반에 자발적으로 모인 감리회 장로님 다섯 분과 우리교회 성도들이 함께 1년간 위안부소녀 기림예배를 드리다가 2016년 1월부터 매주 수요일 11시에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옆에서 위안부 소녀 기림예배를 41차 드리면서 현재 살아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과 1930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소녀시절에 일본군에게 끌려가 희생당한 수십 만 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를 꼭 세워 역사에 길이 남겨야겠다는 사명을 깨닫고 굳게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개인의 힘으로는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를 설립하는데 부족함을 느껴 32회 감리회 총회에 이와 같은 내용을 건의안 심사 위원회에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이안건이 총회에 상정이 되어 기독교 대한감리회 교회, 목회자, 성도들의 힘을 모아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를 세워 역사에 길이 남겨 교훈으로 삼고 싶습니다. 감독회장님과 건의안 심사위원장님, 건의안심사위원님들께서 잘 검토해 보시고, 이 건의안이 총회에 상정될 수 있도록 선처해 주셔서 소외된 이들의 마음을 회복시키고, 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기여하도록 협력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16년 10월 28일
제 32회 총회 회원 박 영 규 목사 올림
첨부 #1

교단 본부 홈페이지 ‘감리회 소식란’에 올렸던 저의 글을 참고로 첨부합니다.

* 한국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 설립 취지문과 기도제목
일제치하 1930년부터 1945년 우리나라의 해방 때 까지 11세부터 20세 전 후의 대한의 소녀 30만 여명이 정신대라는 미명하에 일본이 일으킨 전쟁터에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로 갖은 수모와 고통을 당하고 전쟁터에서 죽거나 귀향해도 반기는 이 없이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죽어간 그분들의 한을 기억하고 함께 아파하며 다시는 일제의 침략과 같은 나라와 국권과 주권을 빼앗기는 치욕적인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고 한국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를 세워 그분들의 넋을 기리고 역사에 길이 남기고 교훈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세계 최초로 동대문감리교회 김학순 집사님이 위안부의 참상을 1991년도에 폭로해서 일본군이 전쟁 시 위안부 소녀들에게 자행한 만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보낸 자객에 의해 집단 성폭행 당하고 칼로 난자당하고 장작더미 위에 불태워 죽인 일본이 자행한 명성황후의 죽음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 인사말씀_ 일본군 위안부 소녀 기림 예배(기도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 김학순 집사님이 1997년까지 7년간 다니셨던 동대문 남은 자들 천막교회에서 52주차 위안부 소녀 기념예배를 드리다가 2016년 1월13일부터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옆에서 매주 수요일 오전 11시에 일본군 종군 위안부 기림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 기도제목
1. 할머님들의 건강을 위해
2. 위안부 소녀의 참상이 한일 양국 교과서에 수록이 되도록
3. 일본 정부와 아베 일본수상이 피해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께 직접사죄와 배상을 하도록
4. 소녀상이 국내외에 더 많이 세워지도록
5. 정부와 국민들과 한국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의 각성을 위해
6. 애국가 부르기 운동 전개를 위해
7. 한일 위안부문제 협상 무효를 위해
8. 위안부 참상이 유네스코 인류 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
9.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을 철거하지 못하도록
10. 명성황후를 암살한 역사기록에 일본정부와 왜왕의 사죄가 촉구되도록
11. 일본 야스꾸니 신사에 합사된 2만1,000명의 한국인 위폐와 유골의 귀환을 위해
12. 일본군 위안부 전범자의 처벌을 촉구하기 위해
13. 동대문 성곽공원과 남산한옥마을이 위안부 소녀 기념공원이 되도록
14. 북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기 위해
15. 남북이 평화하기 위해
16. 일본이 넘보는 독도수호를 위해
17. 우키시마호 침몰 진상규명과 희생된 5,000명의 한국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18. 1923년 일본 관동 대지진 때 일본군과 일경에 살해당한 대한사람 2만3천58명의 희생을 추모함.
19,일본 히로시마, 나가사끼 원폭 사망 4만 명 대한 인을 추모함
20.1938년-1945년 일본에 징용당한 대한청년 85만 명과 전사자 6만 명을 추모함

*참고로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살자 명단
일제강점기 징용·피살자 23만명 명단 확인
남정미 기자

입력 : 2013.11.19 13:25 | 수정 : 2013.11.19 14:32
국가기록원, '주일 한국대사관 보관 강제징용자 23만명 명부' 분석결과 공개
일제 강점기 3·1운동 피살자와 강제 징용 피살자, 관동대지진 피살자 등이 실린 ‘일제 강점기 희생자’ 명부가 첫 공개됐다.

19일 오후 안전행정부 산하 박경국 국가기록원장은 지난 6월 일본 도쿄 주일한국대사관 이사 도중 발견한 일제강점기 희생자 명부 67권을 분석해 발표했다.
국가기록원 발표에 따르면 해당 명부는 1953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지시로 전국적인 조사를 통해 작성한 명부로, 1953년 4월 제2차 한일회담을 준비하면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공개된 명부는 ‘3·1 운동시 피살자 명부(1권 630명)’와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1권 290명)’, ‘일정(日政)시 피징용(징병)자 명부(65권)’ 등 총 67이다.
이 명부에는 총 23만여명의 희생자가 등재돼 있으며, 특히 3·1운동 피살자와 일본 징용시 피살자 명단 등이 최초로 공개 됐다.

3·1운동 피살자의 경우 기존에 유공자로 인정된 391명보다 246명 많은 637명이 등재됐다. 특히 이름 뿐 아니라 성별, 나이, 주소, 순국일시, 순국장소, 순국 상황 등이 함께 기록돼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고 향후 독립유공자 선정에도 도움이 될 전망이다.

지역별로는 경기도 지역에서 169명 중 100여명, 충청도 지역에서 100명 중 69명, 천안지역에서 29명 중 16명, 예산지역에서 10명 중 7명의 3·1운동 피살자가 새롭게 발견됐다.
관동 대지진 피살자 명부도 최초로 확인됐다. 해당 명부는 1권으로,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당시 희생된 한국인 명부가 실려있다. 명부에는 한국인 290명의 희생자가 피살일시와 피살장소, 피살상황 등과 함께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어 보상 뿐만 아니라 관련 연구도 활발히 이뤄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해당 명단에 따르면 관동 대지진 당시 일가족 4명이 다 학살된 경우도 있었으며, 2살 아이도 학살된 것으로 파악됐다.
지금까지 관동 대지진 당시 한국인 학살자 수는 적게는 6000명에서 많게는 2만명 가량일 것으로 추정했지만, 구체적인 명단이 드러난 것은 처음이다.
강제 징용 피살자 명부도 함께 공개 됐다. 강제 징용 피살자 명부는 총 65권으로 22만 9781명의 명단이 실렸다.

이번에 공개된 명부는 1950년 기록한 최초의 명부란 점에서 역사적 가치 높으며, 특히 경북 경산 지역의 경우 1000여명이 신규 명단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국가기록원 측은 “명부에 대한 세부적 분석이 마무리 되는대로 국가보훈처 등에 자료를 제시해 과거사 증빙 자료나 국가유공자 선정 등에 도움이 되게 하겠다”며 “내년부터는 일반 국민도 열람 가능하도록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위안부 강제 동원 관동대학살 90년 강제 징용 피해자 3·1 운동 희생자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 협력단체 및 동역자-동대문천막교회(임시 예배처 성도들), 기독교 김학순집사 기념사업회 기도모임, 한국 기독교 원로 목사회, 세계 선교회, 한국 네티즌 연대, 서울제자교회, 문세광목사, 한휘언장로, 최애도장로.

* 동역자 여러분과 성도님들의 관심과 기도를 바랍니다.


첨부 #2

‘뉴스앤조이’ 기사내용을 참고로 첨부합니다.

[뉴스앤조이-강혜원 인턴기자]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의 폭로로 위안부 참상이 사회에 드러났다.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위안부에 대한 사회의 관심도 긴 시간만큼 점차 무뎌졌다. 얼마 전, 한일 위안부 협상이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인 배상 없이 양국 정상 간에 졸속으로 타결됐다. 다시 사회가 위안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불가역적'으로, 위안부 협상이 타결된 후에 말이다.

한편 10년 동안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는 교회를 꿈꿔 온 목사가 있다. 그는 제자감리교회 박영규 목사로, 1년째 동대문 천막 교회에서 '세계위안부소녀 기념교회'(위안부기념교회) 예배를 진행했다. 이번 위안부 협상 결과를 보며 수요 집회에도 나서게 됐다. '위안부 소녀 기림 예배'로 말이다. 박영규 목사를 만나기 위해 위안부 교회 설립 1주년 예배가 진행되는 동대문 천막 교회를 찾았다.

위안부기념교회 설립 예배는 1주년을 맞았지만 여느 때처럼 조촐하게 진행됐다. 가스가 새어 나오는 낡은 난로가 천막 한 가운데서 위태롭게 작동되고 낡은 스피커에서는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동대문교회 교인들과 제자감리교회 교인들은 찬송과 기도를 하며 예배를 했다. 예배를 마친 후 박영규 목사에게 위안부기념교회의 초창기부터 수요 집회 예배를 하기로 결심하게 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_ 위안부기념교회 설립 예배 장소 찾던 중, 고 김학순 할머니가 다니던 동대문교회를 만나다
동대문 천막 교회에서 위안부기념교회 예배를 진행한 데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었다. 동대문교회는 2013년 동대문성곽공원이 생기면서 철거됐다. 동대문교회 교인들은 교회 복원을 위해 공원 초입부에 천막을 세우고 예배를 했다. 위안부를 최초로 세상에 알린 고 김학순 할머니는 동대문교회 출신이다. 당시 김학순 할머니는 몇 교인들의 권면으로 위안부 참상을 최초로 고발하게 됐다.

"원래는 감리교 재단인 배화여대나 이화여대 강당을 빌려서 위안부기념교회 예배를 하려고 했어요. 그러던 도중 동대문 천막 교회가 눈에 들어왔죠. 좋은 건물보다 허술한 천막에서 예배하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들을 추모하는 의미도 더 잘 전달될 것 같았고요. 그래서 무작정 동대문교회 원로목사님이신 문세광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죠. 통화 중에, 위안부 참상을 고발하신 고 김학순 할머니가 다니시던 교회가 바로 이 곳 동대문교회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동대문교회는 지금도 위안부 역사와 관련이 깊은 분들이 출석하고 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참상을 고발할 때 도움을 줬던 고 장기천 감독도 동대문교회 출신이다. 현재는 그의 부인 김영혜 씨를 비롯하여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일제 치하에서 구국 간호사로 활동했던 최애도 장로도 매주 위안부 예배에 참석한다.
1년 전 동대문교회와의 운명적 만남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세계위안부소녀 기념교회 건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달려 온 박영규 목사. 그는 왜 위안부 역사를 기리기 위해 굳이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것일까. 그가 단지 목사이기 때문일까?

박영규 목사는 이번 협상을 통해 현 정권이 위안부의 역사를 지우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교회만이 가질 수 있는 강력함을 주장했다. 박영규 목사는 '교회'를 통해 위안부 역사를 영원히 기록하길 바랐다.

"정대협을 비롯한 다른 민간단체들은 위안부 기념관을 세우고 소녀상을 설치하려고 하잖아요. 물론 그러한 움직임도 굉장히 중요합니다만, 지금 현 정권을 보세요. 이번 위안부 협상 타결한 거 보면, 아픔의 역사는 점점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근데 교회는 강력해요. 공산주의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거든요. '세계위안부기념교회'를 세우면 위안부 역사도 이 교회와 함께 영원히 기록되겠죠. 제가 굳이 위안부를 위해 다른 게 아닌 교회를 세우려는 이유입니다."

"위안부 협상, 대통령은 용서할지 몰라도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을 것"
박영규 목사는 위안부 협상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10년간 위안부를 위해 기도하고, 1년 동안 천막에서 위안부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예배를 매주 진행했다. 박영규 목사에게 이번 위안부 협상은 더 의미가 클 것 같았다. 그는 피해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사과 없이 돈 몇 푼으로 타결된 이번 협상에 대해 유감을 밝혔다.

"이번 협상은요, 겨우 100억 주고 이제 더 이상 위안부 얘기를 꺼내지 말라는 협박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일본 총리가 방송에 직접 나와서 사과를 했어야죠. 강자가 약자한테 돈 몇 푼 줄 테니 입 다물라, 이거 아닌가요?"

그는 일제 치하에서의 위안부 참상을 거침없이 쏟아 냈다. 일본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위안부는 초경도 안 한 어린 여자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어요. 남자 여럿을 상대하고 만신창이가 돼 있는데 아래에 묻은 정액을 닦아 낼 때 종이 한 장 주지 않고요, 새끼줄을 가랑이 사이에 넣고 지나가게 했답니다.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 내야 해요. 직접적인 사과요. 대통령 혼자서 전화 받고 용서하면 뭐합니까. 이번 협상은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_ 새로운 '행동'의 시작, 수요 집회 사전 예배 진행
오랜 기간 위안부를 위해 힘써 온 그이기에, 이번 위안부 협상에 더 분노했다. 그리고 더 좌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영규 목사는 이번 협상 결과를 통해 다시금 기독교인들이 행동해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예수가 사회에서 세리·창녀 등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실천을 보여 줬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목사로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예배로 수요 집회에 힘을 더하기로 결심했다. 1월 13일, 1213차 수요 집회부터 '위안부 소녀 기림 예배'를 드리게 됐다. 그는 "하나님이 그만하라고 하실 때까지 함께, 끝까지 예배로 수요 집회에 연대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될 수요 집회 사전 예배에 종교계와 많은 시민이 연대해 주기를 청했다. 첫 예배는 주위에 알리지 않고 조촐하게 시작할거라는 그는 점진적인 연대를 바랐다. 1년간 위안부기념교회 설립 예배를 꾸준히 진행하자, 세상에 조금씩 알려진 것처럼 말이다. 박 목사는 벌써부터 수요 집회 예배가 또 다른 시작이 될 것임을 강조하며 설레는 표정을 드러냈다. 비장하기도 했다.

박 목사는 수요 집회 전에 진행되는 '위안부 소녀 기림 예배'가 새롭고 다양한 행동의 시작이 될 것임을 말했다. 그의 최종 목적은 단지 '세계위안부소녀 기념교회'를 세우는 것에 있지 않다.

"이번 수요 예배는 새로운 행동이자 실천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걸 시작으로 동대문 성곽 공원에 위안부 소녀 기념 동산을 세우고 사대문 안에 위안부 소녀상을 세우는 것도 나중의 계획이랍니다."

거창한 계획을 듣고 후원 부분을 걱정하는 기자의 질문에, 박영규 목사는 당차게 답했다.

"후원이 별로 안 되면 뭐 어때요. 저희 제자감리교회 이름을 '세계위안부소녀기념교회'로 바꿔서라도 꼭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겠습니다. 위안부 역사를 영원히 남길 수 있는 운동을 꾸준히 할 겁니다."

_ 제1차 위안부 소녀 기림 예배, '평화' 강조
1월 13일, 1213회 수요 집회가 열렸다. 이날 박영규 목사는 수요 집회 시작에 앞서 '제1차 위안부 소녀 기림 예배'를 진행했다.

영하 10도를 웃도는 날씨였지만 박 목사는 예배가 시작하기 한 시간 전인 10시부터 예배를준비했다. 소녀상 옆에서 조그만 강대상을 두고 자신의 차례를 꿋꿋이 기다렸다. 미리 만들어 온 주보를 주변 시민과 기자들에게 나눠 줬다.

그는 '12곳에 평화가 필요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정치·가정·노사 등에서의 사랑과 평화를 강조했다. 이어진 기도에서는 일본 정부의 직접적인 사과와 한국 정부의 각성을 촉구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도 기도했다. 예배는 '한국위안부소녀기념교회 설립 취지문'과 박 목사가 작성한 '위안부 소녀'라는 시 낭독으로 마무리 됐다.

수요 집회와 연대를 시작한 '위안부 소녀 기림 예배'. 박영규 목사는 첫 예배를 마친 후 "이 예배는 하나님이 제게 주신 사명입니다. 감개무량합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첨부 #3

국민일보 기사를 참고로 올립니다.

[인터뷰] 서울제자교회 박영규 목사 “아픈 역사 잊지 않게…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 추진” 기사의 사진‘위안부 소녀 기념교회’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박영규 서울제자교회 목사가 3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에서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합의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서울의 한 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예배가 어느새 1주년을 맞았다.

영등포구 도신로에 있는 서울제자교회는 올 1월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첫 준비예배를 드렸고 매주일 오후 3시 옛 동대문교회 터 천막교회에서 예배를 이어가고 있다.

이 교회 담임 박영규(66) 목사는 31일 “2014년 12월 25일 당회에서 일본군의 성 노예로 학대 받은 위안부 소녀를 기리고 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기념교회를 4대문 안에 설립키로 했다”며 “교회 이름도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로 하고 기념사업회를 꾸려 그 아픔을 보듬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박 목사는 “교회가 역사의 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적극 나서게 됐다”며 “기념교회와 기념동산, 역사기념관 등이 완공되면 모든 재산은 기독교대한감리회 유지재단에 편입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목사는 협성대 신학과를 졸업한 감리교 중진이다.

교회는 홈페이지(seouljejach.co.kr)와 페이스북 블로그 카카오톡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기념교회 설립의 필요성을 알리고 있다. 박 목사의 사모 김영분(64) 전도사도 서울 종로구 율곡로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열리는 수요시위에 참석해 뜻있는 이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박 목사 등 성도들은 주일 오전 11시 서울제자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뒤 바로 지하철 등을 이용해 동대문교회 터로 이동한다. 교회 측이 동대문교회 옛 터에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있다.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을 폭로한 이가 바로 동대문교회에 출석하던 고 김학순(1997년 작고)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감리교 집사였던 김 할머니는 당시 동대문교회 담임목사인 고 장기천(2007년 소천) 감독회장의 권면으로 1991년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이 일본군의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렸다. 김 할머니의 용기 있는 고백을 들은 한국 교계는 일본의 만행을 여론화시켰다.

박 목사는 이번 한·일 양국 정부의 위안부 문제 합의 발표를 두고 “굴욕적인 밀실 야합”이라고 성토했다. 정작 피해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따라서 일본이 아무리 한국정부와 협정을 맺었다고 할지라도 잘못은 쉽게 용서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박 목사는 “발표 이후에도 아베 총리는 ‘이 문제에 대해 더는 사과하지 않겠다’는 식의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다”며 “결국 미국과 일본의 이익만 챙긴 셈이 됐다. 한국정부가 정말 성급하게 일을 처리한 것 같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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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감리회 32회 총회록 일부를 당당뉴스에서 발췌해서 올립니다.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 문제 아래 기타란에 있음.

건의안심사보고 및 결의 결과

통과된 건의안

-한반도핵위기관련 2016서울신학선언 채택의 건

-여성15%할당 의무화 건

-모성보호정책연구수립의 건

-동성애방지대책의 건(사회평신도국과 의논후 입법의회 상정키로)

-통합목회대학원 설립추진을 위한 촉구의 건

-나라를 위한 구국기도회 건 -(총실위 의논)

-무궁화심기운동의 건 - 남궁억선생이 벌였던 교회와 주변에 무궁화심기운동을 감리교회가 하자는 안이다.)

-감리회역사박물관 건립



기타

- 위안부소녀기념교회설립 (총회결의하지 않고 별도 추진)

- 시국선언문(감독회의에서 라운드테이블 구성해 발표키로)

- 교회성폭력대책위원회 설치의건 (입법사항이므로 상정하지 않기로)

(장정유권해석건이 수건이 상정되었으나 장정유권해석위원회가 조직이 되지 않아 모두 위원회조직이후로 미뤄졌다. 이 경우 쵱회 회기중에 상정된 의뢰건으로 보아 정정유권해석을 위한 공탁금을 따로 납부하지 않아도 된다.)



15:00

감독 및 감독회장 이취임식



전체 4

  • 2016-11-01 18:31

    저는 총대가 아니지만,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총회 실황을 보았습니다.
    박영규 목사님께서 하시는 발언도 들었고 의장이신 전임 감독회장님께서 하신 말씀도 들었습니다.

    건의안 심사에서 절차상의 문제로 기각(폐기)가 되었지만 박 목사님께서 긴급 동의로 안건을 제출하는 것 자체를 의장의 직권으로 막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안건을 받고 그것이 긴급 동의안으로 총회원(총대)들이 동의와 재청을 하지 않는 다면 당연히 가부를 물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절차도 없이 열심히 하시라 그러면 뜻있는 사람, 교회가 도울 것이다라는 말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또한 그러한 상황을 두 눈으로 보고 듣고 있던 총대분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습니다.

    말로만 믿음의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르자고 하는 감리교회인가요??
    한 편으로 저희교회 성도들이 32회 총회 방송을 보지 않은 것에 감사드려야 하는 담임 목사!
    가슴이 먹먹하네요.

    박영규 목사님의 귀한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겠습니다.


    • 2016-11-01 20:04

      예향교회목사님께서 총회 중계를 보셨군요. 관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목사님의 격려의 말씀에 힘이 납니다. 목사님 같이 역사의식을 가지신 분들에 의해 감리회는 지탱이 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저에겐 큰 힘이 됩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 2016-11-01 08:21

    의롭고 외로운투쟁에 경의를 표합니다
    역사의식없는 감리회는 대오각성
    해야합니다
    사단법인위안부소녀기념사업회는
    불교인들이 설립하여 운영 잘 하고
    있지요
    그 일이 감리교회의 사명입니다
    감리교회 깨어지고
    역사를 찾아 세워 나갈 때
    그럴때 감리회 . 감리교회의 부흥을
    기대 할 수있습니다
    박목사님 ! !
    그 눈물겨운 소망 이루어 집니다


    • 2016-11-01 09:25

      백영찬 장로님, 격려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한국기독교와 감리회 역사를 발굴해서 역사 바로 세우기에 앞장서시는 장로님의 노고에 찬사를 드리오며 감리교회 김학순집사님이 1991년 위안부 참상을 당시 동대문교회 담임목사이신 장기천 감독회장님의 주선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폭로함으로 일본군의 위안부에 대한 만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91년부터 1997년까지 김학순집사님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주도하다가 소천하셨는데 정신대 대책협의회에서 지금까지 24년간 매주 수요일 낮12시에 시위를 이어 나가고 있는데 감리회는 무관심했습니다. 제가 위안부 소녀들의 참상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1년 10개월 동안 위안부 소녀 기림예배를 인도하며 32회 총회에 알리고 안건을 상정하여 교단 차원에서 위안부 소녀들의 참상을 기억하는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인준을 받으려고 했는데 건의안 심사위원회에서 두번씩이나 기각을 해서 분개했습니다. 그러나 의장인 김독회장의 배려로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 안건은 [별도로 추진하기로]하고 제안자인 제가열심히 하면 [여러 경로로 돕겠다]는 회의록을 보고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미국 등에 나치스에의해 학살당한 유대인들을 위해 홀로고스트 박물관을 건립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 것처럼 우리나라와 감리교단 차원에서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를 세우고 기념사업을 해서 다시는 일본군의 성노예로 정조를 짓밟히고 죽거나 학대와 폭력으로 평생 상처를 받고 죽어간 위안부 소녀들, 할머니들의 애환과 한을 기억하고 역사에 남겨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총회 실행부 회의에서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인준과 지원을 결의해서 효력이 발생 되어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를 건립해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감리회가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용한 홀로고스트 박물관에 대한 자료입니다. 참고로 올립니다. 장로님의 기도와 협력을 부탁 드립니다.
      야드 바솀 홀로코스트박물관
      [ Yad Vashem Holocaust History Museum , ─博物館 ]
      요약
      나치스에 의해 학살된 600만 명의 유대인을 추모하기 위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세운 추모 박물관.
      홀로코스트 박물관
      설립일
      2005년
      소재지
      예루살렘
      규모
      면적 4,200㎡
      주요소장품
      유대인 희생자 유물 및 증언·사진 자료, 생존자의 고백 자료
      정식 명칭은 홀로코스트역사박물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에 희생된 600만 명의 유대인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박물관으로, 원래는 1953년 야드 바솀(Yad Vashem) 기념관으로 건립되었다. 야드 바솀은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뒤에 21세기에도 계속 홀로코스트(대학살)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고, 다시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뼈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1990년대 중반부터 확장 공사를 시작해, 10년의 공사 끝에 2005년 3월 15일 재개관하였다.

      새로 개관한 박물관은 기존 기념관의 4배 규모로, 면적은 4,200㎡이다. 이스라엘계 미국인 건축가가 설계하였고, 총 공사비는 미화 5600만 달러가 들었다. 건물은 크게 전적박물관·미술박물관·전시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외관은 꼭대기가 뾰족한 가파른 산(山) 모습에, 각 모서리는 긴 선형(線形) 구조를 하고 있다. 내부 길이는 180m이다.

      나치스에 학살된 600만 유대인의 위령탑과 희생자들의 유물 및 사진, 생존자들의 증언 자료, 희생자들이 수용소 안에서 그린 그림 등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원뿔꼴인 \'이름의 홀(Hall of Names)\' 내부 벽면은 무수한 희생자들의 사진들로 채워져 있다.

      이 박물관 외에도 세계 각국에는 곳곳에 홀로코스트박물관 및 추모관들이 세워져 있다. 그 가운데 1993년 미국 내 유대인들의 기금과 미국 정부의 지원으로 건립된 워싱턴의 미국홀로코스트박물관이 가장 규모가 크다. 야드 바솀 홀로코스트박물관은 세계 각국에 있는 이들 홀로코스트 관련 박물관과 추모관들의 본부 역할을 한다.

      2005년 3월 15일 개관식 때 이스라엘 정부는 국제연합 사무총장을 비롯해 세계 40개국 지도자들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은 한 명도 초청하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 국가이면서도, 오히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를 홀로코스트에 비교해, 마치 자신들이 피해자인 것처럼 국제사회에 이미지를 조작한 데 따른 것이다.

      참조항목
      예루살렘, 홀로코스트, 에밀리 신들러
      [네이버 지식백과] 야드 바솀 홀로코스트박물관 [Yad Vashem Holocaust History Museum, ─博物館]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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