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소식

시대 불의 질타한 대쪽 같던 목회자 고 고영근(高永根, 1933-2009) 목사

작성자
장병선
작성일
2013-03-05 18:43
조회
910
시대 불의 질타한 대쪽 같던 목회자  

이만열 교수가 기억하는 시대 불의 질타한 대쪽 같던 목회자 ) ... 옥고 마다 않고 유신 체제 향해 예언자적 설교 외쳐

데스크 승인 2013.03.03  00:27:40  이만열 ()    

여러분, 오늘 고 고영근(高永根, 1933-2009) 목사의 3주기 추모 축제에 다녀왔습니다. 고영근 목사님은 한 때 부흥강사로서 전국을 다니며 혼신의 힘을 기울여 영적 각성을 외쳤고, 유신 시대에는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다 옥고를 두 차례나 치렀던 분입니다.

잘 나가던 부흥강사였던 그는 1970년대에 들어서서 부흥 운동이 갈수록 기복 신앙과 물량 주의로 빠져들게 되자 세례요한처럼 광야의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 무렵 한국교회는 교세 확장에 주력하는 보수와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진보로 나뉘고 있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그는 영광보다는 진리를, 이익보다는 사명 쪽을 택했습니다. 그가 택한 광야의 길은 복음의 사회참여를 강조하면서 유신과 그 동조자들의 죄악을 질타하는 예언자적 사명이었습니다.

고영근 목사는 유신 후반기(1976-1979) 4년 동안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처음은 단양장로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1976년 3월부터 1년 4개월간이고, 그 다음은 1977년 11월 26일 강진읍교회에서 부흥회를 마친 후 약 2년간입니다. 죄명은 긴급조치 9호 위반이었습니다. 유신 체제하에서는 긴급조치가 헌법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행세했습니다.

그는 단양장로교회 부흥회에서 고위층과 군 장성들의 사치스런 생활, 군의 정권 찬탈과 정치 참여를 비판하고 정치와 사이비 종교의 야합을 꾸짖으면서 \"한국교회여! 미몽에서 깨어나라\"고 외쳤습니다. 이로 인해 \\'국민의 혓바닥을 싹둑싹둑 잘라버린 악법 중의 악법\\'인 긴급조치 9호에 저촉, 옥고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강진읍교회에서도 기장 전남노회 교회․사회위원회 주최의 기도회에서 소외당하는 농민들과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종교 등의 실상을 청중에게 낱낱이 알리며 기도를 호소했던 것이 또 긴급조치에 걸렸던 것입니다.

목민선교회 회장이었던 그에게는 나라 전체가 목회지요, 목장이며, 감옥 또한 그의 선교지였습니다. 3년 이상 수감 생활을 하면서 그는 감옥의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했고, 수감자들을 감화시켜 많은 믿음의 자녀들을 양산했습니다. 그는 옥고를 치르고 있는 자신을 걱정, 위로하는 옥 밖의 많은 지인들에게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과 위로를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밖에서 혹시라도 석방 운동을 할까 봐, 자신을 비굴하게 만드는 석방 운동은 하지 않도록 재삼 당부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마다하지 않는 그의 고고한 인품과 용기를 느끼게 하여 듣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유신 정권은 대외 관계 등을 고려하여 복역 중인 목사나 종교인들에게 적당한 명분을 붙여 석방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광주에서 6년 징역을 언도받았을 때, 당국은 그를 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소속 교단인 예장통합 총회장 앞으로 탄원서 형식의 각서만 쓰면 석방시켜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그는 매우 엄한 말로, \"박정희 이놈! 네가 반성문과 각서를 쓸 일이지 어찌하여 피해자에게 각서를 쓰라고 하느냐? 악마의 자식 같은 놈아!\"라고 호통을 치면서 정권의 압력에 강력하게 대응했습니다.

이 때 그는 각서를 쓰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습니다.

\"첫째, 앞으로는 정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복음만 전하겠다는 말은 과거에는 복음만 전하지 않고 정치 문제를 거론했다고 자인하는 것이요, 둘째는, 무릎은 한 무릎 꿇으나 두 무릎 꿇으나 꿇기는 마찬가지니 무릎을 꿇을 수 없음이요, 셋째, 300여 명의 학생들이 그냥 고생하고 있는 이 상태에서 목사가 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지 못하고 먼저 나가는 것은 양떼를 이리 가운데 버리고 도망함이요, 넷째, 편지를 쓰면 당국에서는 고 목사가 개전의 정을 표시해서 석방했다고 신문에 보도하면 나를 위해 기도하던 성도들을 실망시키는 것이요, 다섯째, 공산당들도 25년 독방 징역을 살면서 각서 한 장 안 쓰는데 목사가 감옥살이 4년도 못되어 각서 쓰고 무릎을 꿇는 것은 양심이 허락지 않음이다.\"

그의 대쪽 같은 신앙의 절조가 보이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그의 용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유신 시대에 옥고를 치르거나 죽음을 당한 이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인혁당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고난을 겪은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로서 설교(강론)가 문제가 되어 긴급조치 위반으로 어려움을 겪은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고영근 목사는,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말씀을 통해 자기 시대와 지배층의 죄악에 대해 강렬하게 외쳤습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저술과 녹음테이프에는 그런 예언자적인 내용이 돋보입니다.


그의 이 같은 예언자적 용기는 일찍이 의주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어받았던 신사참배 반대 정신과도 상통합니다. 목회자로서 유신 시대에 고난을 당한 분들 중에는 어떤 운동이나 조직에 연루된 경우가 많습니다. 또 고난을 당한 후, 그 예언자적 품위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훼절하는 경우도 더러 보였습니다. 그러나 고영근 목사는 유신의 엄혹한 시절이나 유신이 끝난 뒤에도 초지일관 자기 시대의 예언자적 사명을 지속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그는 잊혀서는 안 될 믿음의 선진(先進)입니다.


그렇게 우리 앞서 고통받은 선진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이만큼이라도 자유와 평등, 정의와 인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빚진 자로서 우리는 지금 무임승차하고 있지 않은지 늘 자성(自省)해야 합니다.


이 글은 <옥중에서 희망을 노래하다: 목사 고영근 옥중서신>(2013.3, 도서출판 새롬)의 머리글에 게재한 필자의 글을 간추린 것입니다.

이만열 / 숙명여대 명예교수
* 관리자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3-03-06 11:32)



전체 2

  • 2013-03-05 22:07

    고영근목사님을 모신 부흥회에서 술주정뱅이였던 우리 교회 권사 남편이 성령을 받고 훌륭한 주의 제자로 거듭난 사실에 나는 늘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 2013-03-05 22:07

    고영근목사님을 모신 부흥회에서 술주정뱅이였던 우리 교회 권사 남편이 성령을 받고 훌륭한 주의 제자로 거듭난 사실에 나는 늘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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