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52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2-02-07 12:17
조회
1170
6. 소경을 고치심[8:22-26]

이 전승(기적 설화)은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구조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귀머거리를 고치신 이야기(7:32-37)와 아주 흡사하다. 서두에서는 문자적인 데까지 서로 일치하며, 내용에 있어서도 치료가 무리와 떨어진 곳에서 행해진 점, 침을 사용하신 점, 손을 얹으신 점, 완쾌된 사실을 알리지 못하게 하신 점 등이 거의 같다. 불트만(R. Bultmann)은 “이 둘은 거의 같은 특징을 보이기 때문에 같은 것의 변형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른 점은 여기에는 주문이 없고, 고침이 단계적으로 수행되었다는 것뿐이다.”1)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데라는 24절의 구체적 표현은 동일한 사건의 다른 전승에 있어서의 차이점이라고 하기보다는 이것이 독립된 설화라는 것을 매우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주해서).2) 山口 昇은 “또한, 25절에서 다시 안수하는 일이 기술되고 있는데, 이것은 복음서 중에 유가 없으므로 동일 사건의 재술이라고는 볼 수 없고, 상상에 의하여 지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하다. 그 위에 이 치유의 기사는 치유의 경과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 전승이 역사적 사건에 기초한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라고 하였고, 얼레(R. Earle)도 생생한 세부 묘사를 보아 베드로의 예리한 관찰에 근거한 것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마가는 이 기사를【22】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로 시작한다.
벳새다(Βηθσαϊδαν: ‘고기의 집’이란 뜻)는 일반적으로 갈릴리 호수의 북동쪽에 있는 벳새다 율리아스로 이해되고 있다.3) 이 벳새다를 가리켜 마가는 마을이라고 하는데(23, 26절), 누가는 도시라고 하였다(눅 9:10). 이 모순 때문에 슈미트(Schmidt)는 D와 it 사본 등을 좇아 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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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 266.
2) in 山口 昇.
3) H. Alford, E. Bickersteth, W. L. Lane, D. W. Burdick, J. H. Burn, R. Earle, W. Hendriksen, J. Gnilka, p. 398, 黑崎幸吉,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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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Betanien)로 읽는다.1) 그러나 山口 昇은 “사본상의 증거는 벳새다 편이 유력하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모순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점에 대해,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이 모순되는 듯한 점에는 이상하거나 동요될 만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벳새다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었으나, 후에 분봉왕 빌립(눅 3:1)이 확장하고, 아름답게 꾸몄던 것이다. 그래서 벳새다가 성읍이 되자, 어거스투스(Augustus) 황제의 딸인 율리아스를 기념하여 벳새다 율리아스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그 곳은 오랫동안 마을에 불과했었으므로, 얼마 동안 계속해서 마을이라고 불려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잘 설명하고 있다. 데라와 크란필드도 벳새다를 옛날 어촌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면, 마을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였다.2)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맹인을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M. Henry, R. A. Cole)과 사랑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믿음은 “당시의 동방에서 맹인이 혹독한 저주의 하나였다”(W. Barclay)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참 믿음과 참 사랑은 모든 시대의 세상적 관점과 판단과 상황을 뛰어넘는 것이다.
예수님이 손대시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1:41의 주석을 보라.
한 맹인을 데리고 온 사람들의 부탁을 들으신 예수님에 대해, 마가는【23】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7:33의 주석을 보라.
안수하시고는 5:23의 주석을 보라.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은 “이 기사만의 특색이다. 이것도 이 기사가 7:32-37의 재술이 아닌 것의 증거가 될 수 있다”(山口 昇). 또한, 이 질문은 예수께서 이 소경을 단계적으로 치료하고 싶어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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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p. 397, 주 4.
2) in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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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질문을 들은 맹인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24】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이라고 하였다.
맹인은 아직 시력이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나무 같은 것들의 움직임으로 볼 정도의 시력만 되찾은 것이다. 아마 그는 날 때부터의 맹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반쯤 시력을 회복한 이 맹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물체로만 보는바 심안이 어두운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모든 인간은 자신들의 온갖 욕망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맹인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25】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라고 하였다.
완전한 치유가 다시 한번 안수함으로써 이뤄졌다는 것은, 기적 행위자의 일시적 무능이나 치유의 어려움이나 기적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적 권능은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것이었다.
아무튼, 예수님의 점진적(단계적) 치료는 본서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것이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이 맹인이 이렇다 할 믿음이 없이 이끌려 왔기 때문에, 믿음을 갖도록 하시기 위한 것 같다.1) 예수님의 치유의 궁극적 목적은 만물을 밝히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게 하는 것이다.
맹인을 완전히 고치신 예수님은 여기서도 기적의 치유에 대해 소문내지 못하도록 조치하신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26】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그 치유된 맹인을 벳새다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고, 집으로 보내신 이유에 대해서는 1:34의 주석과 1:43-44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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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J. Wesley와 E. Bickersteth는 맹인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예수께서 능력의 보조를 맞춘 것이라 한다. 그리고 米田豊은 구원과 성결(거룩)과의 이 단계의 은혜를 암시하는 것으로 거듭 역설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성령의 역사는 신령한 눈을 밝게 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절기 설교집 외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T. 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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