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49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2-01-16 19:48
조회
849
3. 사천 명을 먹이심[8:1-10]

<비교: 마 15:32-39>

이 전승은 6:34-44의 오천 명을 먹이신 전승과 여러 가지 점에서 비슷하다. 특히, 제자들이 앞의 기적을 기억하지 못한 점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마가가 한 사건에 관한 두 전승을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닐카(J. Gnilka, p. 381)는 “두 단화는 하나의 기본적인 보도가 마르코 이전에 서로 다르게 형성되었다.······8:1 이하는 전체적으로 6:34 이하에 비하여 좀더 후대에 속하는 보도라는 사실이 입증된다. 이 사실은 우선 6:34 이하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에게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주지시키는 데 비해, 여기서는 예수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예수의 연민에 대한 언급이 8:2에서는 예수 자신의 직접적인 발언으로 나온다.”라고 하였다.
오천 명을 먹인 사화의 변형이라고 하는 불트만(R. Bultmann)은 “이것은 대체로 그 서두에 편집자의 부연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과 3절에서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에 대해 설명이 없다는 점에서는 앞의 것에 비해 더 원래 것이다. 아마 만일 7절에 추가로 언급된 작은 물고기가 6:34-44에 의해 후에 이 본문에 삽입되었다면, 여기서는 물고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도 전자에 비해 이것이 더 원래적인 것이리라. 그러나 그 외에는 이 변형이 이차적이다. 그 이유는 ① 여기서는 예수 자신의 주도에 의하여 행동이 시작되고 있다. ② 6:35의 ‘불쌍히 여기시고’라는 보도에서 8:2의 ‘불쌍히 여기노라’라는 직접 화법이 생겼다. ③ 6:36의 제자들의 제안에서 8:3의 예수 자신의 말이 생겼다는 것이다.”라고 하여, 전체적으로는 앞의 기적보다 오래된 것이고, 변형된 것들만이 이차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1)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비슷한 상황의 비슷한 성격을 가진 두 기적으로 보고 있다.2) 특히, 웨셀(W. W. Wessel)은 6:34-44과 8:1-9은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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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p. 270-271.
2) J. Wesley, E. P. Gould, W. L. Lane, W. W. Wessel, A. E. Sanner, D. W. Burdick, C. F. D. Moule, R. A. Cole. R. Earle, C. R. Erdman, 米田豊, 山口 昇,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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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다른 두 사건들에 대한 기사라고 보는 견해를 지지해 주는 분명한 이유들이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두 기사들에 사용된 언어는 비록 유사하기는 하지만, 중대한 차이가 있다. (2) 예수님 자신이 분명히 두 번 무리를 먹이신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8:18-21). (3) 4절이 제기하는 어려움은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제자들이 항상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예수님이 이적으로 해결할 것을 기대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4절이 제기하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산너(A. E. Sanner)가 리차드슨(Alan Richardson)과 얼레(R. Earle)의 말을 인용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마가는 이 복음의 전반의 중요 주제, 즉 제자들의 소경된 눈을 뜨게 한다는 주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이 두 먹이시는 기적을 기록하였다.”
마가는 이 기사를【1】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로 시작한다.
그 즈음에(ἐν ἐκείναις ταίς ἡμέραις)는 문자적으로 ‘그 날들에’를 의미한다. 따라서, 앞의 사건인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 기적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던 때를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장소가 그 기적이 행해졌던 데가볼리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시간과 장소에 관해 제공된 자세한 지식은 없다. 따라서, 이 사건이 이방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마가의 바람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미 기록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6:34-44)과 관련되는 말이다(黑崎幸, 마경일).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의 큰 무리의 대부분은 데가볼리에서 고침 받은 귀먹고 어눌한 자로 인한 소문을 듣고 온 무리일 것이다. “그들에게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께서는 무리의 마음을 사로잡으셨고, 그분의 말씀과 사역은 대단히 놀라워서 그를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은 거의 떠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W. Hendriksen). 그들 곧 이방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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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유대인들의 주님을 향한 열정은 교권자들과 집권자들의 주님을 향한 적의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는 “제자들의 이해력 결핍이 제시되기 때문에 마가에게는 중요하다”(E. Schweizer).
그 말씀에 대해, 마가는【2】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라고 하였다.
불쌍히 여기노라(스플랑크니조마이, 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1:41의 “민망히 여기사”의 주석을 보라.
6:34에서는 무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셨으나, 여기서는 무리가 먹을 것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다. 사랑의 주님이신 예수께서는 문제를 지닌 군중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보셨지만, 유대의 교권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멸시하는 마음으로 보았다.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는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에 심취하는 바람에 배고픈 줄도 몰랐음을 나타내 준다. 이 무리가 삼일 동안 굶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으나(W. W. Wessel, J. D. Stevens, 山口 昇), 먹을 것이 없는 이유가 삼일 동안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W. Hendriksen, J. Gnilka, p. 383).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마가는【3】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그들을 굶긴 채로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고 염려하실 정도로 그들은 여러 끼니를 걸렀다. 더욱이,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으므로 사태가 더 심각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영생의 진리를 전하고 가르치시는 엄청난 과제를 수행하셨으므로, 육신의 양식 문제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으실 것 같았으나 결코 그렇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의 필요에 대해서도 깊은 동정심이 있으셨고, 또한 도움을 베푸실 준비가 되어 있으셨다. 예수님은 영‧육의 구주 곧 전인적 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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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이시다.
예수님은 같은 동정심을 제자들도 소유하기를 바라신다. 예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그와 같은 동정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무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도록 요청했어야 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대답하였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4】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하였다.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는 주위에 있는 촌과 마을에서 음식물을 구할 수 있었으므로 상황이 보다 유리하였으나(6:36), 이 광야에서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대답은 아주 이성적인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메시아적 능력을 믿는 신앙이라는 점에서는―오천 명 이상을 먹이신 기적을 기억하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아주 우둔한 것이었다.
제자들의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의 질문과 그들의 대답에 대해, 마가는【5】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이라고 하였다.
6:38에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었는데, 여기서는 “떡이 일곱 개이고, 작은 생선 두어 마리”(7절)이다. 그닐카(J. Gnilka, p. 384)는 “많은 사람들이 일곱 개의 떡을 8절의 일곱 광주리와 마찬가지로 헬레니즘적 교회 공동체의 7인 집단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평가하려 한다(행 6:3). 이런 평가는 전승사적으로 지극히 의심스럽다. 오히려 일곱은 충만을 나타내는 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일곱 개의 떡에서 가득 찬 축복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도 설득력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냥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에서 음식물을 창조할 수도 있었지만, 그분은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적은 것이나 유용한 것을 사용하시기 위해 택하신다”(J. D. Stevens)는 점이다.
문답이 끝나자마자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 마가는【6】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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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무리를 명하여 푸른 잔디(6:39에서처럼)가 아니라 땅에 앉게 하셨다. 이 사실은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신 경우와 계절이 다른 것을 나타낸다(E. Bickersteth, W. Hendriksen).
축사하시고는 유카리스테사스(εὐχαριστήσας)이며, 6:41의“축사하시고” (율로게센, λόγησεν: ‘찬미했다’, ‘감사했다’, ‘사람과 일에 복을 빌었다’)와 같은 말로 사용되었다.
웨스트코트는 “감사[축사]는 불확실하고 예기치 않은 선물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하나님과의 교제의 선포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복되신 주의 경우에 있어서 기도의 참 성격은 신의의 의식적 실현이며, 혹 있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간구가 아니다.”1)라고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다.
레인(W. L. Lane)은 “예수께서는 매일의 양식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가르치실 의도이셨다.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은 증가한 양식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에 의한 것임을 알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떡들은 제자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손을 통해 무리에게 나뉘어졌다.
여기의 축사하시고와 성찬식과의 관련성(山口 昇)은 불확실하다. 게다가 급식 설화를 성만찬에 대한 교리 문답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는 더 의문스럽다. 그 이유는 바울 서신에 일상적인 식사 기도가 같은 말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롬 14:6, 고전 10:30, 딤전 4:3-4).
그 다음에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 마가는【7】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라고 하였다.
5절의 떡에 관한 언급과 함께 나오지 않았으므로, 독립된 과정인 것 같다고 하는 학자들(J. Gnilka, p. 385, 山口 昇)이 있으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목격자들이 본 대로 쓴 기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W. Hendrik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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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E. Bickerste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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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식이 끝난 결과에 대해, 마가는【8】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기적의 위대함을 과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있어서는 부족이 변하여 과잉으로 된다. 아무리 적은 것이라 해도, 감사로써 이를 받아들일 때, 넘쳐 무한히 풍요한 은사가 되는 법이다” (黑崎幸吉). 그리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광주리는 스퓌리다스(σπυρίδας)이며, 6:34의 “바구니”(코피논, κοφίνων)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8:20, 마 15:37, 16:10). 이 광주리는 바울의 제자들이 밤에 바울을 탈출시키기 위해 그를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릴 때 사용한 광주리와 같은 것이다(행 9:25).
마가는 배불리 먹은 사람 수와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9】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시고【10】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라고 하였다.
약 사천 명은 마태복음 15:38에 의하면, 여자와 아이를 제외한 수이다. 그러므로 사천 명이라는 숫자―‘사’라는 숫자는 네 개의 범위를 상징한다―를 제 민족에 관련시키는 상징적 해석은 불합리하다.
예수님은 이 많은 사람들의 요구―아마도 영적인 요구(예수님은 그들과 무려 사흘이나 함께 계셨었다)와 육체적인 요구 모두―를 채워주신 후에 그들을 흩어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다.
달마누다 지방이 어느 곳에 위치한 것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또, 마태는 “마가단”이라고 기술했는데, 달마누다의 다른 지명인지, 혹은 그 근처에 있는 한 장소의 지명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 난해 성구 사전 I, II/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형통의 기도/ 절기 설교집/ 설교집 19권/ 영성의 나눔 1, 2, 3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T. 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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