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41 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07-05-07 17:54
조회
2391
풍성감리교회. 훼이스신학대학(원) 교수. 426-3051)
(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난해 성구 해설/ 형통의 기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Salvation Before Jesus Came/ 설교집 17권)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41 강>>

나. 오병이어의 기적<6:34-44>
    <비교 : 마 14:13-21, 눅 9:12-17, 요 6:1-14>

“이 사건(30-44절)은 네 복음서가 다같이 전하고 있는 유일한 기적이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며,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절정기요, 인기 또한 절정이었다. 이 사건 이후 그리스도의 공생애는 내리막길이 되고, 그의 수난은 번번이 예고된다. 요한복음은 이 때가 수난에서 1년 전인 유월절인 것을 밝히고, 누가는 그 장소가 벳새다였던 것을 밝힌다(눅 9:10)”(이상근).

앞서 언급한바 제자들의 휴식을 방해한 많은 사람들을 보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3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라고 하였다.

정상인이라면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사생활을 침해받은 상황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그 원인이 된 큰 무리에 대해 불쌍히 여기사(에스프랑크니스테, ἐσπλαγχνίσθη : 1:41의 “민망히 여기사”의 주석을 보라.)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 그 이유는 그 큰 무리가 목자 없는 양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목자 없는 양떼는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는 표상이다. 이 표상은 의무를 잊어버린 목자들에 대한 고발로서 사용되거나(겔 34:5), 하나님의 벌을 백성에게 알리는 데 사용된다(슥 13:7). 모세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움으로써 여호와의 백성이 목자 없는 양떼가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민 27:17).

한 마디로 말해, 목자 없는 양떼란 지도자가 없는 무리를 비유한 것이다. 이 비유는 두 가지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첫째, 실제로 이스라엘에는 많은 지도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목자 곧 지도자들이 없다고 하신 점이다. 당시의 지도자들인 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랍비들, 그리고 공직자들은 이미 영적 지도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주의에 빠지는 바람에 하나님의 본질적인 요구와 인간의 본질적인 영혼의 요구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사랑을 잃어버린 외식주의자가 되었고, 율법의 알맹이를 잃어버린 형식주의자가 되었다(참조 : 마 15:14, 23:13, 15, 16). 따라서, 그 지도자들은 율법의 완성자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적 구현이신 예수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계나 일반 사회나 잘못된 지도자가 있는 것은 없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쁘다.

둘째, 백성들을 하고많은 동물들 중에서 양으로 비유하신 점이다. “양보다 더 무력하고 미련하고, 목자가 필요한 동물은 없다”(E. Bick- ersteth).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양이란 목자가 없으면 길이나 목장이나 양식을 찾지 못하고, 또한 위험을 막을 수 없다”(W. Barclay). 이것이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사랑의 눈에 비친 인생의 참 모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참 목자이고, 또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겸손이라 할 수 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인용문이 아니라 널리 알려진 상징이 사용되고 있으므로, 이것은 예수께서 목자로서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려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J. Gnilka, p. 330). 예수님은 무리의 영적 욕구를 채워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말씀하셨다”(山口 昇). “마르코의 이 언급은 그의 목자로서의 활동을 주로 어떤 점에서 이해해야 하는지를 시사한다. 이로써 다음에 나오는 기적은 특정한 빛 안에 놓이게 되고, 기적은 가르침에 종속되어 접합된다”(J. Gnilka, p. 331).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35절부터 44절까지 계속된다. 이 이적 설화는 【35】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36】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라고 한 제자들의 말로 시작된다.

예수님은 모여든 군중에게 말씀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환자들을 고쳐 주셨다(마 14:14). 이 모든 일을 하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지만, 주로 말씀을 가르치시는 데 열중하신 예수님이나 말씀을 듣는 데 열심이었던 군중 모두가 때와 장소 그리고 배고픈 것을 잊고 있었다.

때가 저물어가매는 “사람들이 흔히 하루의 주된 식사를 하는 때로서, 한적한 장소와 함께 제자들이 예수께 군중을 해산하자고 촉구한 동기가 된다”(J. Gnilka, p. 331). 곧바로 제자들은 군중의 배고픔을 해결할 방도로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자고 예수께 제안하였다.

제자들의 제안은 이성적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판단한 결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환자를 고치시는 일과 영의 양식을 먹이시는 일에 열심이신 예수님과 육의 양식을 걱정하는 제자들의 대조를 볼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메시아적 능력을 믿는 대신에, 자기들의 이성적 사고를 따르는 제자들의 불신앙을 볼 수 있다.

黑崎幸吉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불신을 슬퍼하시며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필요한 것이 모두 베풀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제자들의 합리적 제안을 들으신 예수께서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으므로, 제자들의 반문 역시 초점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37】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하였다.

마태와 누가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은 아이(요 6:8- 9)와 이백 데나리온(막 6:37, 요 6:7)이라는 금액을 생략하였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의 너희는 강조형이다. 현재 그 많은 무리를 먹일 만한 양식이 제자들에게 없는 것을 훤히 아시는 예수님이 이 명령을 하신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즉, 이성적 사고에 젖어 있는 제자들에게 신앙적 사고를 불러일으키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이성적 사고를 드러내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답답하게 느껴지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예수님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그 만한 돈이 있었던 것 같다. 요한복음 6:7에 의하면, 이 액수는 빌립의 추산으로 “각 사람에게 조금씩 먹게 할지라도 오히려 부족한” 액수였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므로, 이백 데나리온으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군중을 먹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언급된 이백 데나리온 때문에 군중의 수가 44절에 진술된 것보다 훨씬 적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설화자의 관심은 숫자의 조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불신앙을 부각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수님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와 전능을 믿는 믿음이 없었다.

예수님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투로 반문한 제자들을 꾸짖으시거나, 그들에게 답변하시지 않았다. 마가는 【38】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직전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하셨고, 지금 또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가서 보라라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그 참 뜻을 깨닫지 못하고, 군중 속에서 알아본 후에 기막히다는 듯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라고 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요한이 더욱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 6:8-9).

여기의 떡들(아르투스, ἄρτους)은 밀가루가 아니라 보리 가루로 만든 ‘빵들’이며,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이었다. 모양은 접시처럼 둥글고, 두께는 엄지손가락 정도였다. 그리고 물고기는 구운 것이거나 소금에 절인 것이 아닌가 싶다.

한 아이의 보잘것없는 음식이, 계산 없는 순수한 마음과 함께 좋아하는 예수께 바쳐졌을 때, 예수께서는 바야흐로 엄청난 이적을 행하려고 하신다. 이 이적을 위해 준비된 상황에 대해, 마가는 【39】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라고 하였다.

이 구절과 다음 구절은 목격자의 생생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떼를 지어(쉼포시아 쉼포시아, συμπόσια συμπόσια)는 문자적으로 ‘떼들 떼들’이다. 이 떼는 식탁에 둘러앉은 무리를 가리킨다. 유대인의 식탁은 ‘■’자 형으로 앉게 되어 있고, 트인 곳으로 수종자가 드나들면서 수종들게 되어 있었다.

“쉼포시아란 바로 그 단어가 암시하고 있듯이, 본래는 ‘함께 술을 마시는 것’, 혹은 ‘술잔치’라는 뜻을 지닌다.■■■■■■그 단어는 일종의 잔치라는 부차적인 의미로 발전하였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 그러한 잔치는 음악과 노래와 더불어 함께 먹고 마시는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우리는 연사들이 이미 동의된 하나의 주제에 관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고, 이에 대해 전체가 토론하는 ‘심포지움’을 여전히 개최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견해들을 수록한 토론 보고서 자체도 하나의 ‘심포지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히 ‘잔치’, ‘회합’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떼를 지어’라고 한 것이다”(W. Hendriksen).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라고 한 명령을 미루어 “그때가 늦겨울 혹은 이른봄이었음을 알 수 있다”(W. W. Wessel).

그 무리는 먹을 음식이 어디서 어떻게 공급될지 몰랐지만 그대로 순종하였다. 주님의 말씀 또는 명령이란 이치를 따지거나, 이해 여부에 앞서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다. 일단 순종하고 나면 이치가 터득되고, 깊은 이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 무리의 순종에 대해, 마가는 【40】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라고 하였다.

“사람이 떼지어 앉은 푸른 풀밭은 다양한 사변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것은 역사적인 회상으로 간주되거나, 황야에서 싹이 트는 메시아 시대의 상징으로, 또는 시편 23:2의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를 암시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어쩌면, 이것은 단지 식사의 다채로움과 기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채로운 식사 공동체 구성원 하나 하나가 푸른 풀밭에 심겨진 묘목들처럼 보인다. 묘목의 상징은 라삐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J. Gnilka, p. 332).

예수께서는 질서를 유지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질서정연한 곳에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신다.

레인(W. L. Lane)은 “군중을 혹은 백씩 혹은 오십씩 질서정연하게 앉힌 것은 광야에서의 모세 진영의 질서를 상기시킨다(출 18:21). 이 세부 묘사는, 특히 쿰란 문서가 이러한 무리 지음을 마지막 시대에 광야에 모인 참 이스라엘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충격적이다( CD XIII. 1. ; 1QS II. 21 ; 1QSa I. 14f ; 1QM IV. 1-5). 만일 이 개념이 40절에서 전제된다면, 왕국에 관한 교훈을 배운 군중은 메시아적 은혜를 경험하도록 광야로 불려진 새 출애굽의 백성들로 특징된다. 광야에서의 요소들이 복합적이지만, 마가는 예수를 종말론적 구세주, 즉 지도자 없는 양떼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제 2의 모세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목할 만한 설명을 하고 있다.

군중이 예수님의 지시대로 혹은 백씩 혹은 오십씩 앉은 후의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마가는 【41】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라고 하였다.

“기적 행위를 서술하는 대신에 회집된 식사 공동체의 가장으로서의 예수의 역할에 대한 서술이 이어진다. 유다교적 식사는 식탁의 좌상이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 기도로 시작되고 끝났다. 시작 기도는 ‘세상의 왕, 우리 하느님 야웨여, 찬미를 받으소서!’라는 말로 시작되고, 그때그때 음식 종류에 따라 다르게 계속되었다. 떡[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도가 드려질 수 있었다. ‘당신께서 빵을 땅에서 생겨나게 하셨나이다.’ 손가락 두께의 접시 만한 떡을 떼어서 가장이 식탁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맨 먼저 빵을 먹었다”(Billerbeck IV, 620-622 ). 이와 같이 예수님은 유대교적 공동체 식사의 관습대로 행동하신 것이다. 다른 점은 단지 제자들이 군중의 수에 맞게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주는 일을 맡은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의 하늘을 우러러는 찬미 기도와 감사 기도 등 기도의 동작이다(7:34, 눅 18:13, 요 11:41, 17:11, 행 7:5).

축사하시고는 율로게센(εὐλόγησεν : 과거형)으로서 ‘찬미하다’, ‘감사하다’, ‘사람이나 일을 위해 복을 빌다’ 등을 의미한다.

이 이적에 대해 파울루스(Paulus)와 그를 따르는 홀츠만(Holtzmann )은, 예수께서 음식을 준비해 온 사람들에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도록 하여 유용하게 한 예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바이스(W- eiss)조차도 그와 같이 굉장한 이적에 관해 늘어나는 회의에 직면하여, 그 설명의 역사성을 보존하기 위해 그 설명의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자연적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히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예수님의 거동이 최후 만찬에서의 거동과 같다고 하는 거듭된 주장이다. 그러므로 급식 설화는 교회 공동체의 성찬식을 염두에 둘 때에 분명해지며 성찬식 교리 문답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판단은 매우 불확실하다. 그닐카(J. Gnilka, p. 333)는 “마르코도, 마르코 이전의 전승도 마르코복음 14:22-23의 성만찬 전승에 동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복음서 저자는 8:14-21에서 급식 보도를 성만찬 교리 문답으로가 아니라 제자 설화로 해설한다. 식사의 내용이 다르다. 여기에는 포도주가 없고 성만찬에는 물고기가 없다. 성만찬은(떡과 포도주에 대한) 해설 말씀에 그 특수성이 있다. 일치점들은 유다적인 식탁 예식에 근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에게서 신령한 양식을 얻고자 따라온 군중은 육신의 굶주림마저 완전히 해결받았다. 한 마디로, 마가는 【42】 다 배불리 먹고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복은 풍성하게 베풀어진다. 군중 모두가 다 풍족하게 먹고도 많이 남았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43】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라고 하였다.

바구니는 코피누스(κοφίνων)이며, “고리버들로 만든 작은 바구니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집을 떠날 때, 이 작은 바구니 속에 점심과 필수품을 담아 들고 다님으로써 이방인의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W. W. Wessel).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는 유대의 식사 습관과 관련되는 것이다.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는 일은 유다적 식사에서 늘 하는 일이며, 음식의 부패를 방지하려는 것이다”(Billerbeck I, 687f). 요한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요 6:12)라고 명령하신 사실을 밝히고 있다. 무한한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작은 조각까지 소홀히 취급하시지 않는 예수님의 태도를 알 수 있다.

그란트(F. C. Grant)는 “12바구니는 이스라엘의 12지파, 혹은 12사도를 상징하는 것 같다.”라고 하지만, 그닐카(J. Gnilka, p. 333)는 “숫자를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 근거가 아주 불확실한 것이다. 열 두 제자와의 관련성이 있을 듯하지만, 그러한 관련성이 복음서 저자의 의도에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올바른 설명을 하고 있다.

그때에 먹은 사람들의 수에 대해, 마가는 【44】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라고 하였다.

그 이적의 엄청난 위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태는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라고 하였다. 남자의 수만 밝힌 것은 유대의 인구 조사의 관례를 따른 것이다.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자신을 완벽한 구세주, 즉 육신과 영혼 모두에 양식을 제공하는 분으로서 나타내고 계시다(참조 : 8:19-21, 요 6:35, 48)”(W. Hendriksen). 예수님이 충족시키실 수 없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의 풍성한 사랑을 받을 줄 알아야 한다. 콜(R. A. Cole)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리석은 욕망이 아니라 필요를 채워 주신다.”라고 하였다.



전체 0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공지사항 관리자 2012.05.23 3750
52 최세창 2012.02.07 1165
51 최세창 2012.01.30 1016
50 최세창 2012.01.24 978
49 최세창 2012.01.16 849
48 최세창 2012.01.09 950
47 최세창 2012.01.03 1040
46 최세창 2012.01.03 978
45 최세창 2007.06.11 2892
44 최세창 2007.06.05 2645
43 최세창 2007.05.28 2495
42 최세창 2007.05.21 2509
40 최세창 2007.04.30 2326
39 최세창 2007.04.23 2405
38 최세창 2007.04.16 2662
37 최세창 2007.04.09 1962
36 최세창 2007.04.02 1516
35 최세창 2007.03.26 1563
34 최세창 2007.03.19 1347
33 최세창 2007.03.05 1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