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51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2-01-30 12:29
조회
1021
5.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에 대한 경계[8:14-21]

<비교: 마 16:5-12, 눅 12:1>

이 단화에서 두드러진 것은 아마 끝 부분(19, 20절)에서 앞에 서술된 두 사건, 즉 두 급식 설화와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점일 것이다. 먹은 사람의 숫자와 남은 떡을 거두어 담은 광주리의 수가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질의응답에서 다시금 언급된다. “이렇게 앞의 단락들과 관련됨으로써 이 단화는 독자성을 잃게 되고, 보다 큰 맥락의 일부로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 이로써 이 단화가 복음서 기자의 손질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는 추측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추측은 제자들의 몰이해와 그들에 대한 책망이―예수의 입을 통해 흔히 질문 형태로 나타나는데―마르코적인 특성을 나타낸다는 점에서도 확증된다. 여기서 책망이 구약성서의 문구를 빌려온 것이라는 사실만이 이 제자 단화의 고유성으로 간주될 수 있다”(J. Gnilka, pp. 392-393).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15절은 원래 예수님의 독립된 말씀이었으나, 누룩과 떡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삽입되었다고 하는 것이다.1)
“그러나 배와 호수를 건넘이라는 동기 그리고 의도적으로 설정된 제자들의 점심때도 복음서 기자의 전형적인 표현이기 때문에(3:20, 6:31), 전승에 속하는 대화로 보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J. Gnilka, p. 393). 그렇게 보아야 할 또 다른 이유는 “마가의 습관으로는 예수의 말씀을 이야기의 기사의 중간에 삽입하지 않고, 이야기의 최후에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데라).2)
15절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함으로써 횡적으로 폭넓게 연결하는 구실을 한다. 예수님의 경계는 유대주의와 세상 집권층에 대한 것이었다.
마가는 이 단화를【14】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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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 Schweizer, W. W. Wessel, “Schnackenburg, Reploh, Masson”(in J. Gnilka, p. 393, 주 2).
2) in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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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은 것은, 아마도 갑작스럽게 출발했거나, 혹은 예수님과 바리새인 및 사두개인들의 논쟁에 긴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제자들은 경솔했다는 평을 면할 수 없다.
배에 떡 한 개밖에를 배 안에 있는 예수님으로 해석하거나 성찬식에 관련시키는 학자들이 있으나(“J. Weiss”,1) “Manek, Taylor”2)), 그란트(F. C. Grant)는 “이러한 상징주의적 해석은 마가에게는 낯선 것이다.”라고 하였고, 그닐카(J. Gnilka, p. 394)는 “서두에서 상징적인 이해를 찾아볼 수 없으므로, 제자들이 (떡 가져오는 것을) 잊음으로써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는 진술은 그대로 소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처지에 있던 제자들을 예수님이 경계하신 것에 대해서, 마가는【15】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라고 하였다.
누룩은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효소이다. 그것이 작용하는 것을 볼 수는 없으나, 아주 적은 양의 누룩은 가루 서 말을 부풀게 한다. 성경에서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마 13:33, 눅 13:20)가 있기는 하나, 대체로 나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8:15, 마 16:6, 11, 12, 눅 12:1, 고전 5:6, 7, 8).
유대 세계와 헬라 세계에서 누룩은 부패에 대한 은유이었다(W. L. Lane). 특히 유대의 랍비들에게서는 악 또는 악한 욕구(E. Schweizer), 악한 충동, 또는 인간의 나쁜 성향과 성질을 나타낸다(J. Gnilka, p. 394). 그리고 그것은 급속한 영향력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바리새인들(2:16의 주석을 보라.)의 누룩이란 바리새인들의 외식(눅 12:1)과 형식주의적 교훈(마 16:12)을 의미하는 것이다.
헤롯(3:6의 주석과 6:17 이하의 주석을 보라.)의 누룩은 세상성, 즉 오늘의 세속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E. P. Gould, H. E. Luccock). 그것은 부와 명예와 권세 등을 위한 권모술수와 육체적 쾌락이라는 특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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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마경일.
2) in J. Gnilka, p.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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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제자들에 대한 경계의 사례로 바리새파와 헤롯을 드신 것에 대해 늘 역사적인 관점에서 답변되었다. 즉, “그들의 일치점은 예수께 대한 그들의 증오, 위선, 특히 그들을 결합시켰던 민족적‧정치적인 메시아 기대에 있었다는 것이다.”1) 이 일치점에 관련하여 그닐카(J. Gnilka, pp. 394-395)는 “이 물음은 마르코의 관점에서만 풀릴 수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과 헤로데파 사람들이 이미 예수가 그들의 완악함을 질책하는 3:6에서 함께 나온다(3, 5). 이와 같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의 돌이킬 수 없는 불신앙을 드러냈던 것이다. 헤로데 안티파스는―여기서 헤로데만이 경고의 대상으로 될 수 있다―그의 명령으로 목이 베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예수를 봄으로써 예수에 대한 몰이해를 입증하였었다.”라고 설명하였다.
예수님의 경계가 제자들에게서 올바로 이해되지 못한 것에 대해, 마가는【16】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이라고 하였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제자들은 누룩에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부여하여, 주께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에게서 떡을 받지 말라고 하신 것으로 생각하였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제자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에 있는가를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적 교훈을 물질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그들은, 예수님의 앞선 경계를 받아들여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경계마저 깨달을 만한 영적 이해력이 없었으니 예수님의 답답하심이 오죽하셨겠는가! 더욱이, 기적적인 급식 사건을 목격하고, 직접 나눠주고, 또한 먹기까지 했던 제자들(14:13-21, 15:32-39)임을 아시는 예수님은 무척이나 답답하셨을 것이다.
그러한 예수님에 대해, 마가는【17】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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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lostermann, Schniewind, Lohmeyer, Pesch I, 413. 또한 J. Gnilka, Verstockung, 38” in J. Gnilka, p. 394, 주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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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과 다음 구절에 걸친 예수님의 비판적인 질문들은, 예수님의 답답하고 언짢은 마음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너희 마음이 둔하냐의 마음(카르디안, καρδίαν)은 2:6의 주석을 보고, 둔하냐(페포로메넨, πεπωρωμένην)는 3:5의 “완악함”의 주석을 보라.
계속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마가는【18】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치 못하느냐라고 하였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는 예레미야 5:21과 에스겔 12:2의 예언자적 탄식을 인용한 것인데(참조: 사 42:18, 19, 43:8), 그 구절들에서 “우둔하여 지각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과 “패역한 족속”이 신의 심판에 대한 위협적인 선포를 듣고 있다.
마가는 이 말을 마음의 둔함과 관련짓고 있다(4:12의 주석을 보라). 제자들의 기억치 못하는 상태가 구원받을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대조: 3:5과 4:12의 경우), 불신앙 상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기억치 못하느냐는 앞서 두 번에 걸친 기적의 급식 사건 자체에 대한 기억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들 속에 담긴 영적 의미에 대한 기억을 묻는 것이다.
이 점은 계속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문답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19】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둘이니이다【20】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제자들은 이성적인 면에서는 두 사건의 전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속뜻인 영적 의미를 기억할 만한 영적 지각은 없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시 135:15-16, 렘 5:21, 겔 12:2) 불신자들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의 교훈과 기적이 인간들을 위한 메시아적 현존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을 깨닫고 기억하지 못하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깨달았다거나 기억했다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예수님의 교훈과 기적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있을 수 없다.
먼저 받은 은혜란 새로운 은혜를 위한 믿음과 기대를 확고히 하는 것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염려하는 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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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다(마 15:33).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탄식 조의 질문에 대해, 마가는【21】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탄식하신 동기에 대해 웨셀(W. W. Wessel)이 잘 설명하고 있다. “몇 개의 떡 조각을 가지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 남을 만큼의 떡을 만들어 주셨던 당사자이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배 안에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얼마든지 먹을 양식을 제공해 주실 능력을 가지신 분이 그들과 함께 있는데, 왜 먹을 것을 걱정하고 있는가? 그래서 예수님이 탄식 조로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는 “어찌 내 말한 것을 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16:11-12)라고 보충 설명을 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이 교훈의 내용까지 깨달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저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절기 설교집 외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T. 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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