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35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07-03-26 15:11
조회
1568
풍성감리교회. 훼이스신학대학(원) 교수. 426-3051)
(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난해 성구 해설/ 형통의 기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영문, 한글/ 설교집 17권)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35 강>>

c.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5:35-43>

마가는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외에도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눅 7:11-17)과 나사로(요 11장)를 다시 살리셨다. 야이로의 딸의 경우에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의 경우에는 장지를 향해 나가는 도중에, 나사로의 경우에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무덤에 있을 때에 살리셨다.

그와 같은 이적을 베드로(행 9:40)와 바울(행 20:9-12)도 행하였고, 엘리야(왕상 17:2)와 엘리사(왕하 4:34)도 행하였다. 이들의 경우에는 예수님과 달리, 단순히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졌을 뿐이다.

마가는 【35】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라고 하였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는 예수께서 자신의 옷 가를 믿음을 가지고 만짐으로써 치유된 여인과 말씀하실 때를 지시하는 것이다.

어린 딸이 죽게 되어서 예수님을 찾아온 야이로의 믿음은, 혈루증을 앓는 여인의 등장으로 길이 늦어지는 바람에 시련을 받았고, 또한 예수님의 사랑의 능력을 목격함으로써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그의 집에서 온 심부름꾼들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라고 한 말로 극심한 시련을 받았다.

클라케(A. Clarke)는 “그들은 예수께 대해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살아 있는 동안에만 유용한, 뛰어난 의사라는 것 이외의 어떤 이해를 갖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죽음이란 모든 것이 끝나는 마지막 절망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회당장 야이로도 예외가 아니다.

어린 딸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을 잃을 정도의 슬픔 중에서도 예수님을 괴롭히지 않으려는 데서 그들의 여유와 예절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대수롭지 않았다.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36】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라고 하였다.

곁에서 들으시고는 파라쿠사스(παρακούσας)이며 ‘귓결에 듣다’, ‘들어넘기다’, ‘무시하다’, ‘유의하지 않다’ 등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심각하고도 절망적인 ‘죽었다’는 소리를 귓결에 들으셨다. 생명의 주로서 생명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께 죽음이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께서 딸을 살릴 마지막 한 가닥 소망마저 없어져 버린 회당장 야이로에게 주신 격려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 예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인간과 세상에 건 모든 소망이 끊어졌다는 것은 절망할 이유가 아니라, 새로운 소망을 가질 이유이다. 인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작이고,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좋은 기회이다.

심부름꾼들이 아닌 예수께서 야이로에게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신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주님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약속 그리고 자비와 능력을 굳게 믿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상황의 변화와 상관없이 영원불변한 사랑의 주를 한결같이 믿어야 한다.

회당장 야이로에게 믿기 어려운 말씀을 하신 후의 예수님에 대해, 마가는 【37】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1:16의 주석을,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은 3:17의 주석을 보라.

예수께서 자신의 이적 행위의 증인으로 가장 가까운 세 제자만을 선택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외에도 변화산(9:2, 마 17:1, 눅 9:28 )과 겟세마네 동산(14:33, 마 26:37)에도 이 세 제자들만 동반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와 같이 중대한 사건들과 그 사건들의 의미를 후대에 전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세 제자들만을 동행케 하신 이유는 다른 제자들을 목격자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셨거나, 혼잡한 상태에서 이적을 행하고 싶어하지 않으셨기 때문인 것 같다.

세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가신 예수께 대해, 마가는 【38】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9:23에는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로 되어 있다. 유대에서는 한국처럼 장례식 때 모인 사람들이 같이 울며 통곡하는 풍습이 있었고, 또 삯을 주고 우는 여자를 고용하기도 하였다(대하 35: 25, 렘 9:17, 18). 요세푸스(Josephus)는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두 명의 피리 부는 자와 한 명의 곡하는 여자를 고용해야 했다.”라고 하였다.

어린 소녀의 죽음으로 인해 울며 심히 통곡하는 가족들과 친지들 그리고 고용된 곡하는 자들과 피리 부는 자들을 보신 예수께 대해, 마가는 【39】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울며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취하여 기절한 상태로 보는 견해(Olshausen 등)는 잘못이다”(이상근).

죽은 자를 자는 것으로 비유한 것은 구약성경(창 47:30, 삼하 7:12, 신 31:16, 왕상 2:10, 단 12:2)이나 신약성경(마 9:24, 27:52, 요 11:11, 행 7:60, 13:36, 고전 7:39, 11:30, 15:6, 18, 51, 벧후 3:4)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한국이나 이교 세계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이 완곡어법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예수께서 죽은 소녀를 다시 살리실 의도로 하신 말씀이다. “그는 죽음을 잠 정도로 여기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한다. 성서에 나오는 고대적인 신앙에 의하면, 죽음에 대한 지배권을 지니는 것은 하나님만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참조 : 12:27)”(J. Gnilka, p. 278).

초상집 사람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마가는 【40】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라고 하였다.

저희가 비웃더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냉소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님을 단순한 인간으로만 보고, 예수님 안에서 생명의 창조주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바로 그들의 비웃음이 어린 소녀의 죽음을 확인해 주었으며, 따라서 예수께서 그 어린 소녀를 다시 살리신 사실을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의 내어 보내신은 1:2의 “몰아내신지라”와 같은 말이다.

예수께서 불신앙의 비웃음인지도 모르고 비웃는 자들을 다 내어 보내신 이유는, 자신의 이적 행위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으시기 위한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43절). 그러나, 목격자의 필요성을 아시는 예수님은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동반하여 죽은 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방관자는 하나님의 계시의 밖에 설 수밖에 없다. 그 반면에, 그 안에 차여한 자 곧 예수와 아이의 부모와 증인으로서의 세 제자 그리고 죽은 아이, 이렇게 몇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총의 현실 안에 있는 특권을 소유했다”(마경일).

마가는 죽은 소녀가 있는 곳에 들어가신 예수께 대해, 【41】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라고 하였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 자기 아이에게 손을 얹어 주시기를 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권위와 권능과 자비로 이미 죽은 아이의 손을 잡아 주시기까지 하셨다”(W. Hendriksen).

달리다굼(ταλιθά κούμι)은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한 아람어(히브리어)이며, ‘일어나라’라는 뜻이다. 그리고 내가 네게 말하노니는 마가가 첨가한 설명이다.

달리다굼이라는 명령은 잠자는 아이를 깨우는 모든 부모가 사용하는 말이다. 똑같은 말이라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의미와 무게가 달라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메시아로서의 의미와 무게를 지닌다는 점에서 단순한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일반 부모들이 아닌 예수께서 죽은 소녀에게 하신 말씀인 달리다굼, 즉 ‘일어나라’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메시아적 능력이다. 이 말씀은 또한 재림하셔서 죽은 성도들을 부활케 하실 음성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성취를 의미한다(참조 : 시 33:9). 이 점에 대해, 마가는 【42】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 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이라고 하였다.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는 “예수님의 명령이 지체 없이 실현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기적의 발생은 말씀과 결부되어 있다”(J. Gnilka, p. 278).

여기서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는 존재로 밝히 드러나셨다. 예수님은 곧 생명의 주이시다. 이 사실은 장차 있을 그분 자신의 부활에 의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날 것이다.

나이 열 두 살이라와 혈루증의 여인이 열 두 해 앓은 것을 관련시켜, 유대인의 수 개념으로 풀어 보려는 주해자가 있으나, 이는 다만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23절에 “어린 딸”이라고 했으므로, 아이가 걸을 수 있는 충분한 나이임을 표시하려 함이 아닌가 생각된다(마경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의 원문(ἐξέστησαν ἐκςτάσει μεγάλῃ)을 직역하면, ‘사람들이 큰 놀라움으로 놀랐다.’이다. 말하자면, 너무 놀라서 망연 자실(茫然自失)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죽은 소녀를 소생케 하신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보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란 것이다.

예수께서 경계하신 것에 대해, 마가는 【43】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는, 소위 ‘메시아 비밀’의 동기 중 하나이다(1:44의 주석을 보라). 그러나, 예수님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그 소문이 널리 퍼졌다. 마태는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마 9:26)라고 첨가하였다.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는 예수님의 세심한 사랑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예수님의 명령은 “소녀의 영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소녀의 존재가 실제로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Billerbeck II, 10의 라삐계 사례들 참조). 또한, “이 명령은 소녀가 다시 살아났을 뿐 아니라 건강이 온전히 회복되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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